이필제의 난

이필제의 난

[ 李弼濟─亂 ]

요약 1871년(고종 8) 3월 10일 동학교도 이필제(李弼濟:1824~1871)가 영해(寧海)에서 일으킨 봉기(蜂起).

향반(鄕班) 출신의 이필제는 1863년( 14) 동학(東學)에 입도한 후 농민을 적극적으로 규합하여 나갔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충남 일대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진주로 피신한 그는 주성칠(朱成七)로 이름을 바꾸고 1870년 7월 을 일으켰으나(晉州作變) 실패하였다. 다시 영해로 피신한 그는 1871년 최시형(崔時亨)과 협의, (敎祖) 최제우(崔濟愚)의 원일(寃日)인 3월 10일을 봉기일로 정하고 동학의 조직망을 이용하여 동학교도 500여 명을 동원하였다. 그들은 영해부를 야습하여 군기고(軍器庫)를 접수한 후 부사를 문죄, 처단하였다. 이어 8월 2일 문경(聞慶) 봉기를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12월 서울 서소문 밖에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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