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1세

제임스 1세

[ James I ]

요약 스튜어트 왕가 출신의 최초의 영국 왕으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일을 추구하여 스스로를 그레이트브리튼의 왕이라고 칭했으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국기를 합하여 오늘날 영국의 국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제임스 1세

제임스 1세

출생-사망 1566.6.19 ~ 1625.3.27
별칭 제임스 6세
국적 영국
활동분야 정치

이름은 찰스 제임스 스튜어트(Charles James Stuart)이며,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1세(Mary I of Scotland)와 단리 경(Lord Darnley) 헨리 스튜어트(Henry Stuart)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리 1세가 영주들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자 1567년 7월 24일 돌이 갓 지난 나이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James VI)로 불렸다.

1589년 8월 덴마크의 왕인 프레데리크 2세(Frederick II)의 딸 앤(Anne of Denmark)과 결혼했으며, 1594년에 맏아들 헨리(Henry)를 낳았으며, 1600년 둘째 아들 찰스(Charles, 뒷날의 찰스 1세)를 낳았다. 1598년 아들 헨리를 위해 왕권에 관해 논한 <자유로운 군주권의 참된 법(The True Law of Free Monarchies)>을 저술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에 기초해 왕은 의회의 조언이나 승인이 없이 자유롭게 법률이나 칙령을 제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래서 잉글랜드로 가서 그해 7월 25일 왕위에 올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공동 왕이 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라고 불렸는데, 스튜어트 왕가에서는 처음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앤(Anne) 여왕 때인 1707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가 될 때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공통의 왕 아래에서 서로 다른 의회와 정부를 가지고 있어 ‘왕관연합(Union of the Crowns)’이라고도 불리는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재위기간 동안 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일을 추진했다. 스스로를 그레이트브리튼의 왕(King of Great Britain)이라고 불렀으며, 유나이트(the Unite)라는 공동화폐를 만들어 통용시켰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국기인 성 조지의 십자가(St. George's Cross)와 스코틀랜드의 국기인 성 앤드류의 십자가(St. Andrew's Cross)를 합하여 유니언 잭(Union Jack)이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영국의 국기를 만들어 통일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회의 완강한 반대에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다.

한편, 그는 1604년 국교회의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표준 성경을 영어로 만들라고 지시하여, 1611년 오늘날 킹제임스 번역본(King James Version, KJV)이라고 불리는 <흠정역 성서(欽定譯聖書)>를 간행했다. <흠정역 성서>는 19세기 말까지 영국 국교회에서 사용된 유일한 공식 영어 성경이며,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의회와는 계속해서 갈등을 빚었다. 그는 의회의 특권과 관행을 무시했고, 사사건건 의회와 대립했다. 1622년 화이트홀 궁전(Palace of Whitehall)을 확장하는 등 재정 지출을 늘려 의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가톨릭과 청교도를 억압하여 국교회로의 개종을 강요하였다. 그는 1604년 국교회와 청교도 등의 종교계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가톨릭과 청교도의 양극을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때문에 그는 가톨릭과 청교도의 반감을 사서, 1605년에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 Guido Fawkes라고도 함) 등의 가톨릭 세력이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화약음모사건(Gunpowder Plot)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적대적 관계를 가져왔던 에스파냐와 화해하면서 유럽에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는 적국의 배를 공격하여 화물을 약탈하는 사략선(私掠船, privateer)의 활동을 금지시켰고, 반(反)-에스파냐 동맹 관계에 있던 오스만제국과는 단교(斷交)를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방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의 거센 반발로 국가가 부담하던 대사관 경비 등을 상인들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오스만제국과의 국교는 유지하였다.

아메리카대륙에 대한 개척이 시작된 것도 그의 재위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1607년 5월 14일 북아메리카에 영국인의 정착지가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이곳은 그의 이름을 따서 제임스타운(Jamestown)이라고 불렸다. 1620년에는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라고 불리는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Mayflower) 호를 타고 북아메리카로 집단 이주하기도 했다.

제임스 1세는 1625년 3월 27일 하트퍼드셔(Hertfordshire)의 시어볼즈 별궁(Theobalds House)에서 병사했으며, 그의 둘째 아들인 찰스 1세(Charles I)가 왕위를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