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복

점복

[ 占卜 ]

요약 미래에 대한 어떤 징조를 미리 판단하고자 하는 기술.
사주관상가

사주관상가

단순히 점(占)이라고도 한다. 자연현상이나 생리적 현상을 판단하는 것과 인위적(人爲的)으로 어떤 현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판단한 결과로써 장래를 점치는 것 등이 있다. 이 같은 속신(俗信)에는 점복과 함께 예조(豫兆)·금기(禁忌)·주술(呪術) 등이 있어 이들은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으며, 이 밖에 귀신·도깨비·부적(符籍)까지도 포함시켜 생각할 수 있다. 즉 예조나 점복은 미래를 사전에 예지(豫知)하는 지식과 기술이며 금기와 주술은 불측(不測)의 결과를 예방하고 처리하는 기술이다. 점복의 역사는 인류생활과 더불어 찾아볼 수 있고, 점복의 발달과 더불어 인류의 문명도 발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점을 치는 목적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진실을 탐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여기에서 진실이란 신의(神意)를 말하는 것으로, 고대인들은 신의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면 곧 신의 벌을 받는 것으로 믿었으며 그 신벌을 받지 않기 위하여는 먼저 신의를 정확히 파악하여 그 신의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점복이 필요했을 것이며, 이러한 목적은 점차 확대되어 나중에는 점복이 범인(犯人)의 방향이나 실물(失物)의 행방을 추측하여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까지 이용되었다. 둘째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하여 점복이 생겼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지욕(豫知欲)은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이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아왔을 때, 새해에 전개될 일들을 미리 알고자 하는 것도 인간의 기본심리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예지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점복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긴 점복은 동서양에서 문화정도의 고저(高低)와 상관없이 일찍부터 어느 민족에게나 있어왔다. 유럽에서는 바빌로니아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성술(占星術)과 동물의 간 등에 의하여 점치는 내장점(內臟占)이 일찍이 발달하였고, 점장(占杖)에 의하여 지하수나 광맥을 찾아내는 점법이 있는가 하면, 무심히 책을 폈을 때 먼저 눈에 띄는 문장으로 점을 치는 개전점(開典占) 등도 있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서로써 개전점을 쳤는데, 이것을 성서점이라 하였다. 또 트럼프로 점치는 가루다점도 유명하였으며 몽점(夢占)도 있었다.

동양에서는 인도의 점성술, 중국의 복서(卜筮)가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특히 중국의 점복은 한국과 일본 등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대표적인 점복은 복서로서, 복(卜)은 수골(獸骨)이나 귀갑(龜甲)을 사용하여 행하는 점이며 서(筮)는 서죽(筮竹)과 산목(算木)을 사용하는 점이다. 수골은 견갑골(肩胛骨), 귀갑은 거북의 복부(腹部) 껍질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불에 구워 트는 모양으로 길흉을 점쳤다. 이 점의 뜻을 판단하기 위하여 전문적인 점자(占者)를 두기도 하였다. 서는 《주역(周易)》을 전거(典據)로 삼아 음양의 산목과 서죽의 산술적 조작으로 괘를 얻어 판단하는 점으로, 민간에서 크게 발전하여 오행설(五行說)과 간지설(干支說)을 받아들이면서 몇 개의 유파가 생겼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서죽이나 산목 대신 동전 등을 이용하는 역점이 일반화되었다. 이들 점법 이외에도 중국에서는 각종 점성술이 발달하여 중국의 역사는 실로 점성술사에 의하여 발달되었다고도 한다.

한국의 점복도 일찍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미 상고시대부터 복, 즉 수골이나 귀갑을 이용하는 점이 있었다. 그 예로서 부여의 점속(占俗)을 보면 전쟁이 일어나면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톱을 보고 전쟁의 승패를 미리 점쳤다. 즉 소의 발톱이 벌어져 있으면 흉(凶)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했다. 이것은 분리와 결합을 뜻하는 것으로 결합하면 이긴다는 진리를 나타낸다. 점복은 상대(上代)로 소급할수록 정치와 밀착되었고 그 결과를 믿는 경향도 강하였다. 점의 결과를 판단하는 기술은 원래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것이어서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에 민심을 통합하기 위하여는 몇 개의 결과가 나와서는 곤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점을 치는 과정도 비밀에 싸여 있었고 그 점복자는 권력과 밀착된 전문가가 관장하였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점복은 크게 나누어 자연적인 점복과 인위적인 점복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어떤 특이한 자연현상을 통하여 미래의 천후를 추측한다거나 어업·수렵 등의 생산 결과를 예지하는 일월성복(日月星卜)·홍복(虹卜)·운복(雲卜)·수빙점(水氷占)·천기점(天氣占) 등과 같은 자연현상점을 말하며, 후자는 적극적인 점복술로 탁선(託宣)·주법(呪法) 등으로 길흉을 판단하는 몽점(夢占)·신비점(神秘占)·작괘(作卦)·현상점(現象占) 등을 가리킨다.

이 인위적 점복을 행하는 점자를 그 직능에 따라 전문적인 점자와 부업적인 점자로 구분할 수 있어, 전자는 고대 사회의 일관(日官)·일자(日者)·무자(巫者)·사무(師巫)·점복관(占卜官)·복술자·신점자(神占者) 등이 이에 해당되며, 후자는 다른 직업을 주업으로 하면서 부업으로 점복 행위를 하는 기도업자·승려 등이 이에 해당한다. 위정자는 점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전문적인 점복가를 두었는데 백제에서는 이들을 일자 또는 무자라 하였고, 고구려에서는 사무 또는 단순히 무(巫)라 하였다. 신라에 이르러 이들을 일관이라 부르고 그들이 소속된 관청을 관상감(觀象監)이라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시대에 구체화되어 천문·역수(曆數)·측후(測候)·각루(刻漏)를 담당하는 태사국(太史局)과 점복을 담당하는 태복감(太卜監)을 두고 여기에 복박사직(卜博士職)과 복정직(卜正職)을 임명함으로써 점복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루었다.

이들 관청은 그후 여러 가지 명칭으로 개칭되는 한편 과거제도를 통하여 점복사를 등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서운관(書雲觀)을 두고 천문·지리·역수·점산(占算) 등을 관장하게 하였다. 한편 이들 국가기관이 관장하는 점복과 병행하여 민간에서도 많은 점복술이 오랜 세월을 두고 깊이 뿌리를 박게 되었다. 특히 점세적(占歲的) 행사가 크게 성행하여 전통적인 점복 이외에도 토정비결(土亭秘訣)·직성행년법(直星行年法)·행년치성법(行年致誠法)·오행점(五行占)·행년액일법(行年厄日法)·출행법(出行法)·분출행법(分出行法)·절초법(折草法)·구궁법(九宮法)·사주법(四柱法)·병인마채점(病人馬采占)·병인산점(病人算占)·천간자병점(天干字病占)·지지자병점(地支字病占) 등 각종 점속이 횡행하였으며 그 일부는 지금도 전한다.

현대 과학문명의 발달은 이들 미속(迷俗)을 근본적으로 부인하여 이를 불식시키려 하나 인간의 본능 속에 자신의 운명과 길흉을 예지하려는 심리작용이 있는 한 좀처럼 이들 속신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참조항목

산판점, 청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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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상

점상 동전으로 점을 보아줄 때 쓰는 도구.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