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장조

[ 莊祖 ]

요약 조선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의 아버지로 사도세자 또는 장헌세자로 불린다.
융릉

융릉

출생-사망 1735 ~ 1762
본관 전주(全州)
윤관(允寬)
의재(毅齋)
본명 이선(李愃)
별칭 사도세자, 장헌세자
활동분야 정치

본관은 전주(全州), 성은 이(李), 이름은 선(愃)이다. 자(字)는 윤관(允寬)이며, 호는 의재(毅齋)이다. 시호는 사도(思悼)·장헌(莊獻)으로 시호인 사도세자나 장헌세자로 더 알려져 있다.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영빈 이씨(映嬪 李氏)이다.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를 비로 맞이해 의소세손(懿昭世孫) 이정(李琔), 제22대 왕인 정조(正祖) 이산(李祘), 청연군주(淸衍君主), 청선군주(淸璿君主)를 낳았으며, 궁인 출신의 양제 임씨(良娣 林氏)와 수칙 박씨(守則 朴氏)와의 사이에서 은언군(恩彦君) 이인(李imagefont),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 청근현주(淸瑾縣主)를 낳았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 맏아들인 경의군(敬義君) 이행(李緈)을 세자로 삼았으나 그는 1728년 10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그 뒤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1735년 음력 1월 21일에 후궁인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장조를 낳았다. 이처럼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아들이었으므로 장조는 서자로 태어났지만,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양자가 되어 원자(元子)의 칭호와 세자로서의 예우를 받았다.

1736년 음력 3월 15일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행동거지가 의젓하고 총명해 3살 때 영조와 대신들 앞에서 《효경(孝經)》을 읽고 ‘천지왕춘(天地王春)’이라는 글자를 썼다고 전해진다. 9세 때(1743년) 영조가 직접 홍봉한(洪鳳漢)의 딸을 간택해, 이듬해 세자빈으로 책봉했다.

영조는 장조를 총애했으며, 어려서부터 후계자로 엄격히 교육하려 했다. 그리고 장조가 15세 때인 1749년에는 대리청정(大理聽政)을 하며 본격적으로 후계자로서의 경험을 쌓게 했다. 그러나 노론소론의 당쟁이 격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장조의 대리청정은 순탄치 못했다. 특히 경종 때 왕세제이던 영조의 대리청정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신임옥사(辛壬獄事)를 겪었으므로 노론과 소론 모두에게 세자의 대리청정은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다.

장조는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영조와 노론, 소론 등 당파 간의 정치적 갈등에 휩싸이면서 몸이 쇠약해졌고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조선왕조실록》과 《한중록(閑中錄)》 등에는 장조가 평소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증세가 있었으며, 심리적 압박 때문에 새 옷을 갈아입지 못하거나 가슴 통증에 시달리는 등 심리적 질환도 앓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조와 영조의 관계는 1761년 서명응(徐命膺)·윤재겸(尹在謙)의 상소로 장조가 영조 몰래 20일 동안 관서(關西) 지방을 다녀왔으며, 동교(東郊)에 집을 지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영조는 그 기간 동안 세자궁인 창덕궁에서 근무하던 관리들을 모두 처벌했다. 그리고 1762년 음력 5월 22일에는 궁궐에서 변란 모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형조에 고발한 나경언(羅景彦)을 영조가 직접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경언이 장조가 저질렀다는 10조목의 비행을 적은 문서를 전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문서는 폐기되어 오늘날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761년에 은전군 이찬과 청근현주의 생모인 수칙 박씨를 때려서 죽인 것, 여승(女僧) 출신의 가선(假仙)이라는 여인을 궁으로 불러들인 것, 궁중의 궂은일을 담당하는 액속(掖屬)의 무리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며 시전 상인들의 물품을 거두어들였을 뿐 아니라 액속들이 위세를 빌어 상인들에게 행패를 부린 일 등이 고발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음력 5월 24일에 직접 흥화문(興化門)으로 나아가 시전 상인들을 불러 장조가 거두어들인 빚을 갚아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음력 윤5월 13일(7월 4일)에는 장조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러 자결을 명령했다. 장조는 자결하려 했으나 세자궁의 여러 신하들이 이를 말렸다. 그러자 영조는 장조를 세자의 자리에서 내쫓고 서인(庶人)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고,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고변한 내용을 전하며 그를 뒤주에 가두었다. 다음날에는 장조를 시위하던 환관 박필수(朴弼秀)와 여승 가선, 서읍(西邑)의 기녀 다섯 명을 참수했다. 뒤주에 갇힌 장조는 8일째인 음력 윤5월 21일(7월 12일)에 사망했다.

장조가 죽자 영조는 그에게 다시 세자의 호칭을 회복시켜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세자의 예로 장례를 치러 음력 7월 23일에 양주(楊州) 배봉산(拜峰山)에 매장했으며 묘호(廟號)를 수은(垂恩)이라고 했다. 장조의 장례식에는 영조가 백관(百官)과 함께 직접 무덤으로 행차해 신주(神主)에 글자를 썼다. 다음날 영조는 세손인 정조를 후계자로 삼아 동궁으로 부르게 했다.

정조는 1777년 왕위에 오른 뒤에 아버지인 장조의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높이고, 묘의 봉호도 영우원(永祐園)으로 고쳤다. 1789년에는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하고 묘의 봉호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다. 뒷날 고종은 1899년 장헌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고, 현륭원의 명칭은 융릉(隆陵)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