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방
[ 李時昉 ]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귀의 아들,시백의 동생. 서산군수·공조참판 등을 지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군사와 군량을 모으는 데 공을 세웠다. 지방 행정을 수행, 국방체계 정비에 관여했다. 대동법 시행을 주장했다.《서봉일기》가 있다.
출생-사망 | 1594 ~ 1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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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연안(延安) |
자 | 계명(季明) |
호 | 서봉(西峯) |
시호 | 충정(忠靖) |
별칭 | 연성군(延城君) |
주요수상 |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 |
주요저서 | 《서봉일기》 |
본관 연안. 자 계명(季明). 시호 충정(忠靖). 호 서봉(西峯). 귀(貴)의 아들이며 영의정 시백(時白)의 동생이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아버지를 따라 유생으로 거사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다. 서산군수 ·공조참판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에 군사와 군량을 모으는 데 공을 세웠다.
광주목사 ·나주목사 ·전라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어 지방 행정을 수행하거나 남한산성방어사 등을 맡아 국방체계의 정비에 깊이 관여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정산(定山)에 유배되었다가 1640년 풀려났다. 그 후 심기원(沈器遠)의 옥사 때 연관되었다는 비판도 받았으나 공조와 형조의 판서로 승진하여 갔으며, 1649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효종 즉위 후 재차 판서를 역임하다가 청나라에 빌붙어 나라를 배신한 김자점(金自點)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파직되었으나 현종 재위 시에 다시 공조판서를 지냈다. 반정공신 세력의 중심에 속하여 정치적 격동 속에 여러 번 위기를 맞았으나 일에 신중히 대처하고 군사 ·민생 등의 실무에 열중하면서 일반 사족들과 무리없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호조참판이나 공조판서로 있을 때는 대동법 시행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문집으로 《서봉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