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경

이기경

[ 李基慶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 병조정랑·정언(正言)·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을 지냈다. 주자학과 다르다고 하여 천주교를 배척하는 데 앞장섰다. 저서《벽위편(闢衛編)》은 천주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출생-사망 1756 ~ 1819
본관 전주
휴길
척암
활동분야 정치
주요작품 《벽위편》

본관 전주(全州). 자 휴길(休吉). 호 척암(瘠菴). 1777년(정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78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의 벼슬을 거쳐 강제문신(講製文臣)에 뽑혔고 감찰(監察)·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했다. 정치적으로는 남인이었으며 정약용(丁若鏞)과 막역(莫逆)한 사이였다. 한 때 이승훈(李承薰)·이벽(李蘗) 등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책을 얻어 보고 정약용과 함께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으나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라하여 금지하자 천주교를 멀리하고 배척했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 때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을 천주교 탄압에 미온적이라 하여 공박하였고, 이승훈이 천주교서적을 간행하고 있다고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오히려 이승훈의 비난과 공격을 받았고 무고죄로 정조(正祖)의 노여움을 샀다. 이기경은 그 때문에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가게 되었으며 이 일로 정약용 형제를 비롯하여 이승훈, 이가환 등과 원수관계로 등지게 되었다. 1794년 유배형에서 풀려나와 이듬해 지평(持平)에 복직되고, 후에 병조정랑·정언(正言)·이조좌랑(吏曹佐郞)을 지냈다.

1804년(순조 4) 김대비(金大妃:貞純王后)가 재차 수렴청정(垂簾聽政)하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단천(端川)에 귀양가고 이듬해 풀려나왔으나 이남규(李南圭)의 탄핵을 받아 운산(雲山)에 유배, 1809년 풀려났다. 천주교를 배격하기 위해 지은 《벽위편(闢衛編)》은 천주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편서(編書)에 《사교징치(邪敎懲治)》가 있다.

역참조항목

이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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