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수

이공수

[ 李公壽 ]

요약 고려 인종 때의 문신. 1126년 척준경과 함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자겸을 제거하였으며, 인종이 묘청을 총애하자 이를 비판하였다.
출생-사망 ? ~ 1137
본관 인주(仁州)
원로(元老)
문충(文忠)
별칭 초명 수(壽)
활동분야 정치

본관 인주(仁州). 자 원로(元老). 초명 수(壽). 시호 문충(文忠). 재상이 되면서 ‘공(公)’자를 더하였다. 아버지는 예(預)이다. 어려서부터 외조부 최유선(崔惟善)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나, 1086년(선종 3) 다시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이후 궁전고판관 ·금오위녹사 ·직한림원 등을 역임하다 예종이 태자가 되자 첨사부녹사로 뽑혔다. 서경유수판관(西京留守判官)이 되었을 때 예종이 서경에 행차하였는데, 백성에게 고통을 끼치지 않으면서 왕에 대한 접대를 원만하게 수행하여 임금이 칭찬하였다. 이에 임금이 가마의 수행을 명하였으나, 관례를 들어 사양하였다.

1109년(예종 4) 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어 14년간 선군(選軍)의 임무를 맡았는데, 공평무사하여 군졸들의 칭송을 받았다. 이후 연영전학사 ·위위경(衛尉卿) ·비서감 등을 거쳐 공부상서가 되었는데, 그때마다 지제고(知制誥)를 겸하였다. 1124년(인종 2)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발탁되어 재상이 되었다.

당시 이공수의 6촌형제인 이자겸(李資謙)이 정권을 천단하고 있었는데, 1126년(인종 4) 2월 인종이 내시 김안(金安) 등을 시켜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인종이 이자겸에게 선위(禪位)하려 하였으나, 이공수가 적극 제지하였다.

5월에 척준경(拓俊京)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한 공으로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의 칭호를 받았고, 1128년(인종 6) 3월 문하시중이 되었다. 인종이 묘청(妙淸)을 총애하자 이를 비판하였고, 4번이나 치사를 청하는 글을 올렸다가 1131년 동덕공신(同德功臣)의 칭호를 더 받고 치사하였다.

참조항목

이자겸, 척준경

역참조항목

연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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