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

윤두서

[ 尹斗緖 ]

요약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 시·서·화에 두루 능했고, 유학에도 밝았다. 조선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지만 인물화와 말 그림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묘사를 하였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현재 그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자화상 《윤두서상》(국보 240)이 있다.
해남 공재고택

해남 공재고택

출생-사망 1668 ~ 1715
본관 해남
효언(孝彦)
공재(恭齋)
활동분야 예술
주요작품 《윤두서 자화상》《해남윤씨가전고화첩》

본관 해남이고 자는 효언(孝彦)이며 호는 공재(恭齋)이다.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다. 그의 아들은 윤덕희(尹德熙)이고 그의 외손자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다.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시서생활로 일생을 보냈으며 죽은 뒤 가선대부·호조참판이 추증되었다. 그는 시·서·화에 두루 능했고, 유학과 경제·지리·의학·음악 등 여러방면에 박학을 추구하던 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星湖 李瀷)과도 깊은 친분을 맺고 있었다. 15세에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나 그가 22세 때 부인이 사망했다. 그의 셋째형은 당쟁에 휘말려 귀양지에서 사망하였고 큰형과 함께 모함을 받아 고생을 하였다. 이런 사건들로 인해 윤두서는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버리게 된다.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잠(李潛-성호 이익의 형)이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맞아죽는 일까지 생기자 그는 더욱 침잠하게 되었다. 윤두서가 46세가 되던 1713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해남으로 이주하였다가 2년후 사망하였다.

화가로서는 특히 인물화와 말을 잘 그렸는데, 산수화를 비롯한 일반 회화작품은 대체로 조선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한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보인다. 그러나 인물화와 말 그림은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하였으며, 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현재 그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을 들 수 있다. 그가 남긴 작품 중《나물 캐는 아낙네》, 《밭가는 농부》, 《짚신 삼는 사람》은 모두 하층민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민풍속화로 평가할 수 있으며 조선 회화상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와 손자인 용(愹)에게 계승되고, 조선 후기의 화가 허유(許維)도 종가에서 그 전통화풍을 익혔다 한다. 유작으로는 60여 점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481)을 비롯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 《노승도(老僧圖)》 《출렵도(出獵圖)》 《백마도(白馬圖)》 《우마도권(牛馬圖卷)》 《심산지록도(深山芝鹿圖)》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