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

원성왕

[ 元聖王 ]

요약 신라의 제38대 왕(재위 785∼798).
출생-사망 ? ~ 798
국적/왕조 신라
재위기간 785년∼798년
본명 김경신
시대 남북국시대
활동분야 정치

성은 김(金), 이름은 경신(敬信), 시호는 원성(元聖)이다.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일길찬(一吉湌) 김효양(金孝讓)이고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이다. 각간(角干) 김신술(金神述)의 딸을 비(妃)로 맞이하여, 김인겸(金仁謙), 김의영(金義英), 김예영(金禮英) 등을 낳았다. 맏아들인 김인겸은 원성왕(元聖王)이 왕위에 오른 뒤에 태자로 봉해졌지만 791년(원성왕 7)에 죽어 혜충(惠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뒤 둘째아들인 김의영이 태자로 봉해졌지만 그도 794년(원성왕 10)에 죽어 헌평(憲平)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장성하여 자녀들이 있었으므로 제39대 소성왕(昭聖王, 재위 799~800)부터 제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까지 신라의 왕위는 원성왕의 후손들에게 계승되었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어머니가 지조부인(知鳥夫人)으로 창근이사[昌近伊巳, 일부 판본에는 창근이이(昌近伊己)로 되어 있다]의 딸이며, 왕비는 숙정부인(淑貞夫人)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기이(紀異)’ 편의 ‘원성대왕(元聖大王)’ 조에는 왕에게 혜충태자(惠忠太子), 헌평태자(憲平太子), 예영잡간(禮英匝干),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 등 다섯 명의 손자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王之孫有五人).

원성왕은 제36대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때에 이찬(伊湌)의 직위에 있었고, 780년(혜공왕 16)에는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다. (김지정의 난) 그리고 반란의 과정에서 혜공왕이 죽고 김양상이 제37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으로 왕위에 오른 뒤에는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어느 왕 때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원성왕이 각간(角干)의 직위에 있으면서,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를 봉양한 효자 성각(聖覺)을 포상하도록 이찬 김주원(金周元)과 함께 왕에게 진언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원성왕은 785년(선덕왕 6) 정월 선덕왕이 병으로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신하들이 원래 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그가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 입궁하지 못하자 하늘의 뜻으로 여겨 상대등이었던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원성왕이 아찬(阿飱) 여삼(餘三)의 꿈풀이와 권유에 따라 북천(北川, 알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 김주원이 개울을 건너지 못했고, 그 사이에 원성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원성왕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무열왕계의 김주원과 갈등이 있었음을 나타내며, 822년(헌덕왕 14)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다.

왕위에 오른 원성왕은 고조부 대아찬 김법선(金法宣)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증조부 이찬 김의관(金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조부 이찬 김위문(金魏文)을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아버지인 김효양을 명덕대왕(明德大王)으로,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했다. 그리고 선덕왕의 왕비인 구족부인(具足夫人)을 외궁으로 내보내고 3만4천석의 조(租)를 지급했으며, 이듬해인 786년(원성왕 2)에는 김원전(金元全)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왕위 계승 사실을 알렸다. 《삼국유사》에는 조부의 이름이 훈입(訓入)이며, 고조부인 김법선은 잡간(匝干) 마질차(摩叱次)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성왕은 785년(원성왕 1) 이찬 충렴(忠廉)과 제공(悌恭)을 각각 상대등과 시중으로 임명했고, 장군인 총관(摠管) 직위의 명칭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제공이 곧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찬 세강(世强)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790년(원성왕 6)에는 종기(宗基)를 시중으로 삼았고, 이듬해 제공이 반란을 꾀하다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자리에서 물러난 종기를 대신해 자신의 손자인 대아찬 김준옹(金俊邕)을 시중으로 삼았다. 792년(원성왕 8)에는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世强)을 상대등으로 삼았고, 김준옹이 병으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찬 숭빈(崇斌)을 시중으로 삼았다. 794년(원성왕 10)에는 숭빈이 사직하자 잡찬(迊湌) 언승(彦昇)을 시중으로 삼았고, 795년(원성왕 11)에는 혜충태자의 아들인 김준옹을 태자로 봉했다. 796년(원성왕 12)에는 시중 언승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이찬 지원(智原)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797년(원성왕 13)에는 시중 지원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아찬 김삼조(金三朝)를 시중으로 임명해 국정을 맡겼다.

원성왕은 중앙귀족의 내분으로 불안정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실시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인 권농(勸農) 정책과 구휼(救恤) 정책을 펼쳐 민심을 얻으려 했다. 786년 금성(金城) 일대에 기근이 들자 두 차례에 걸쳐 6만여 석의 곡식을 백성에게 나눠주었다. 788년(원성왕 4)에는 《곡례(曲禮)》·《효경(孝經)》·《논어(論語)》·《문선(文選)》·《예기(禮記)》·《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등 유학 경서의 독해 수준에 따라 상·중·하로 나누어 관리로 선발하는 독서삼품과를 실시했다. 《삼국사기》에는 활솜씨로 선발하던 것을 이때에 와서 고쳤으며, 오경(五經)과 삼사(三史),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두루 능통한 자는 절차를 밟지 않고 등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789년(원성왕 5)에는 한산주(漢山州)에 기근이 들자 그곳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고, 790년(원성왕 6)에는 전주(全州) 등 7개 주의 사람들을 징발해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했다. 그리고 이 해에도 큰 가뭄이 들자 한산주와 웅천주(熊川州)의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796년(원성왕 12)에도 금성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자 창고를 풀어 백성을 구제했다.

원성왕 때에도 신라는 당나라와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했는데, 792년(원성왕 8)에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를 지녔으며 몸에서 향기가 나는 김정란(金井蘭)이라는 미녀를 당나라로 보냈다고 한다. 790년(원성왕 6)에는 일길찬(一吉飡) 백어(伯漁)를 발해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것은 신라에서 발해로 사신을 보낸 것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원성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불교 진흥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785년(원성왕 1) 승관(僧官)을 두어 정법전(政法典)이라 하여 승려 가운데 재주와 덕행이 있는 자를 선발해 등용했으며, 787년(원성왕 3)에는 승려인 혜영(惠英)와 범여(梵如)를 불교 교단을 관리하는 소년서성(少年書省)으로 임명했다. 794년(원성왕 10)에는 봉은사(奉恩寺)를 창건하고, 서궁(宮西)에 망은루(望恩樓)를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로 전해진다.

원성왕은 798년(원성왕 14) 음력 12월에 죽었으며,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奉德寺) 남쪽으로 옮겨 화장했다. 《삼국유사》에는 왕릉이 뒷날 숭복사(崇福寺)라고 불린 토함산 서쪽의 곡사(鵠寺)에 있으며 (경주 숭복사지), 최치원(致遠)이 비문을 적은 비석이 서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경주시 외동읍 괘능리에 있는 경주 원성왕릉(元聖王陵)은 사적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성왕이 죽은 뒤에는 손자인 김준옹이 제39대 소성왕(昭聖王, 재위 799~800)으로 왕위를 이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원성왕이 흥망의 이치를 깨달아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아버지인 김효양에게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받아 일본의 왕 문경(文慶)이 감히 신라를 침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795년(원성왕 11)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동천사(東泉寺)와 분황사(芬皇寺)의 연못과 우물에 살던 용을 잡아가려 했으나 원성왕이 용을 구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원성왕 본문 이미지 1(김)예영김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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