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왕

소성왕

[ 昭聖王 ]

요약 신라의 제39대 왕(재위 799∼800).
출생-사망 ? ~ 800
국적/왕조 신라
재위기간 799년~800년
시대 남북국시대
활동분야 정치

성은 김(金), 이름은 준옹(俊邕), 시호는 소성(昭聖/昭成)이다.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14대손으로,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손자이다. 원성왕의 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김인겸(金仁謙)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모친은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이다. 김언승(金彦昇, 제41대 헌덕왕), 김수종(金秀宗, 제42대 흥덕왕), 김충공(金忠恭, 제44대 민애왕의 아버지), 김제옹(金悌邕) 등의 동생이 있었다. 대아찬(大阿湌) 김숙명(金叔明)의 딸인 계화부인(桂花夫人) 김씨를 비로 맞이해 김청명(金淸明, 제40대 애장왕), 김체명(金体明), 장화부인(章和夫人) 김씨 등의 자녀를 두었다. 딸인 장화부인은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의 왕비가 되었다.

소성왕(昭聖王)의 아버지인 김인겸은 원성왕(元聖王)이 왕위에 오른 뒤 태자로 봉해졌지만 791년(원성왕 7)에 죽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원성왕은 죽은 태자의 아들을 궁중에서 키웠으며 조정의 요직을 맡겼다. 그래서 소성왕은 789년(원성왕 5) 대아찬(大阿湌)의 직위에 올라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790년(원성왕 6)에는 파진찬(波珍湌)의 직위에 올라 재상이 되었다. 791년(원성왕 7)에는 이찬 제공(悌恭)의 반란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종기(宗基)를 대신해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 792년(원성왕 8)에 병으로 시중의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되었고, 794년(원성왕 10) 숙부인 헌평태자(憲平太子) 김의영(金義英)이 죽자 이듬해에 태자로 봉해졌다.

소성왕은 798년(원성왕 14) 음력 12월에 조부인 원성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소성왕은 799년(소성왕 1) 부친은 혜충대왕(惠忠大王)으로, 모친은 성목태후(聖穆太后)로 추봉했다. 그리고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청주(菁州)의 거노현(居老縣, 지금의 경남 거제시)을 국학(國學) 학생들을 위한 녹읍(祿邑)으로 정했다. 800년(소성왕 2)에는 충분(忠芬)을 시중으로 임명하고, 맏아들인 김청명을 태자로 봉했다.

하지만 소성왕은 800년 음력 6월에 왕위에 오른 지 2년도 되지 않아 죽었다. 태자인 김청명이 왕위를 이어 제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으로 즉위했는데, 당시 나이가 13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소성왕의 동생인 병부령 김언승이 섭정을 하였다. 소성왕의 장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왕릉의 위치도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제35대 경덕왕(景德王)의 왕릉으로 알려진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의 고분을 소성왕의 왕릉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한편, 《삼국유사》 ‘탑상(塔像)’ 편의 ‘무장사미타전(鍪藏寺彌陁殿)’ 조에는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부인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물을 바쳐 무장사 위쪽의 미타전(彌陁殿)에 아미타여래의 불상과 여러 신장(神將)의 상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소성왕 본문 이미지 1청명(애장왕)장화부인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