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왕십리

[ Wangsimni , 往十里 ]

요약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 ·행당동(杏堂洞) 일대의 왕십리역 ·왕십리 로터리 부근을 일컫는 말.

성동구의 중심지이며 예로부터 서울 동부지구의 중심지의 하나이다. 왕십리 로터리에서 을지로(乙支路)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서 가로변은 나전칠기 공예품 제조에 필요한 각종 재료의 도산매상점이 밀집해 있고, 기타 일반상가 ·시장 등 상업지구를 형성하여 행당동 ·응봉동(鷹峰洞) 등 주택가에 상업기능을 제공하고 뚝섬 지구와 도심지를 연결하는 중간적 위치에 있다. 왕십리역은 지하철 2호선이 건설되면서 전철화된 경원선(京元線)과 지하철의 교차지점이 되어 서울 동부의 새로운 철도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왕십리의 지명에 대해서는 조선 건국 초기 무학대사(無學大師)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천도할 곳을 찾으러 다니던 무학대사는 뚝섬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넌 뒤 넓은 들판을 보고는 그곳이 새 도읍지가 될 만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무학대사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며 그곳에서 북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라고 알려주어 한양 도성을 세울 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 뒤 무학대사가 노인을 만난 곳을 ‘십리를 가다’라는 뜻의 왕십리(往十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왕십리의 지명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민담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고려 시대에 이미 서울은 남경(南京)이라 불리며 중요한 행정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한때 고려 왕조는 이곳으로의 천도를 추진하며 신경(新京)이라고 부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려 말기의 문인인 이색(李穡, 1328~1396)의 시문을 모은 《목은시고(牧隱詩藁)》에는 “무포(務浦)에 와서 배에서 내린 뒤에 남경(南京) 동촌(東村) 왕심리(旺心里) 민가에서 묵었다”며 ‘왕심리(旺心里)’라는 지명이 나온다. 그리고 17세기 조태억(趙泰億, 1675~1728)의 문집인 《겸재집(謙齋集)》에도 “종암(鍾岩)에 모여 왕심리(旺心里)로 향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따라서 왕십리라는 지명은 고려 때부터 전해진 ‘왕심리’라는 명칭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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