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

여진족

[ 女眞族 ]

요약 동부 만주(滿洲)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隋)·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로 불리었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女眞)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滿洲族)이라고 불렀다.

말갈족의 부족 가운데 속말말갈(粟末靺鞨)과 백산말갈(白山靺鞨)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朝陽]에 해당하는 영주(營州)로 이주하였고,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의 유민들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한 뒤 피지배층으로 복속되었다. 쑹화강[松花江]과 헤이룽강[黑龍江] 하류 지역에 근거를 두고 발해에 대항하였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에 복속되어 여진이라 불리었다.

발해가 멸망한 뒤 그 고토(故土)에 준거한 여진족은 새로 건국한 고려(高麗)와 관계를 맺었다. 여진족 중에서도 고려와 관계를 가진 것은 고려의 북서부에 있던 압록강 유역 양안(兩岸)의 서여진[西蕃]과 동북의 함경도 지방 일대에 걸쳐 거주한 동여진[東蕃]인데, 고려가 이들 두 곳의 여진과 직접적으로 교섭한 것은 태조 왕건(王建)의 북방개척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초기에 여진은 고려를 상국(上國)으로 섬겼고, 고려는 이들를 회유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歸化人)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당시 여진인은 활·말·화살·모피 등 전쟁 도구를 조공(朝貢)하고, 의료품·식량·농기구·그릇 등 생활필수품을 주로 수입해 갔다.

이와 같은 고려의 회유정책에 의하여 여진과의 관계는 평온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숙종(肅宗) 때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完顔部]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 북간도(北間島) 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하였다. 1104년(숙종 9) 영가의 뒤를 이은 조카 우야슈[烏雅束]는 더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한 여진부락을 경략하였다. 이때 고려에 복속한 여진인으로 완옌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무리가 있어 우야슈는 이들을 추격, 함경도 정평(定平)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고려에서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보내어 우야슈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추밀원사 윤관(尹瓘)을 보내 겨우 화맹(和盟)을 맺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정평·장성 외의 여진부락은 완옌부의 치하에 들어갔다. 윤관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을 보고하면서 기병(騎兵)의 양성, 군량(軍糧)의 비축 등을 건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신기군(神騎軍:騎兵)·신보군(神步軍:보병)·항마군(降魔軍:승려부대)으로 이루어진 별무반(別武班)을 편성, 특별부대로 훈련시켰다.

1107년(예종 2) 고려는 윤관을 도원수(都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군사 17만을 동원, 함흥평야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청(北靑)까지 진출하여 함주(咸州)를 중심으로 9성(九城)을 쌓았다. 또한 남방의 민호(民戶)를 옮겨 9성에 이주시켰으며, 특히 길주성(吉州城) 안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국보제사(鎭國普濟寺)를 창건하고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그러나 9성을 쌓은 뒤 이를 방어하기가 어려운데다가 여진족이 9성을 돌려달라고 애원하여 9성을 쌓은 지 1년 만에 여진족에게 돌려 주었다. 그 뒤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1115년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고, 1117년 고려에 형제관계를 요구하여 왔고, 1125년 요(遼)를 멸망시킨 뒤에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송나라와의 교류에도 간섭하였다. 당시 집권자 이자겸(李資謙)과 경주파 문신(文臣)은 금나라와 타협함으로써 이후 고려의 북방개척정책은 일시 좌절되었다. 1234년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하자 여진족은 만주지방에서 부족단위로 할거하였고, 원(元)·명(明) 교체 이후에는 압록강·두만강 연안에서 빈번히 소란을 피웠다.

고려를 이은 조선은 초기에 여진족에 대하여 회유와 무력의 양면정책을 폈다. 회유정책으로는 귀순을 장려하여 관직·토지·주택을 주어 귀순자를 우대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함경도 경성(鏡城)과 경원(鏡源)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조공무역(朝貢貿易) 및 국경무역을 허락하였으며, 한양에 이들의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북평관(北平館)까지 설치하였다. 당시 여진은 말·모피 등의 토산물을 바치고, 식량·의복재료·농기구·종이 등을 교환해 갔다. 한편, 무력정책으로는 국경지방에 진보(鎭堡)를 설치하여 전략촌으로 바꾸어 방비를 강화하였고, 복속하지 않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였다.

태조는 경원에 성보(城堡)와 주(州)·군(郡)과 역참(驛站)을 두었다. 1403년(태종 3)에는 강계부(江界府), 1414년에는 여연군(閭延郡)을 두어 여진의 준동에 대처하였다. 세종은 4군(郡)·6진(鎭)을 개척하여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연안선을 확보하고 여기에 삼남(三南) 사람을 이주시켰다. 세조 때는 남이(南怡)·어유소(魚有沼) 등이 압록강변의 여진을 토벌[丁亥西征]하였고, 신숙주(申叔舟)는 회령(會寧) 부근의 여진을 축출하고 모련위(毛憐衛) 여진족의 근거지를 토벌[庚辰北征]한 뒤 하삼도(下三道) 백성 l만 명을 이주시켰다.

1479년(성종 10)에는 서북 방면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이 침입하여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이 이를 격퇴하였고, 1491년에는 동북 방면의 여진추장 우디거[兀狄哈] 부족이 회령의 조산보(造山堡)에 침입하여 도원수 허종(許琮)이 이를 물리치는 등 여진족은 조선의 북변에서 크고 작은 소란을 피웠다. 그 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국력이 차차 쇠약해지자 이 틈을 타 여진족은 세력을 확장해 나가다가, 1616년(광해군 8)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가 흥경(興京)에서 후금(後金)을 세우고 1627년(인조 5)에는 정묘호란, 1636년에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탈하였으며, 그 뒤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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