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유소
[ 魚有沼 ]
- 요약
조선 전기의 무신.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했고 명나라가 건주위(建州衛)를 공격할 때 이를 도와 크게 공을 세웠다. 그 뒤 오위장, 함경북도절도사, 영안북도절도사, 평안도순찰사,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어유소장군 사당
출생-사망 | 1434 ~ 14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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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충주(忠州) |
자 | 자유(子游) |
시호 | 정장(貞莊) |
주요수상 |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 |
본관 충주(忠州). 자 자유(子游). 시호 정장(貞莊). 무장 득해(得海)의 아들이다. 1456년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1451년에
내금위에 선보(選補)되고 1456년 무과에 1등으로 장원하여 사복시직장(司僕寺直長)과
감찰을 역임하였다. 1460년에 여진정벌에 공을 세워 통례문통찬(通禮文通贊)이 되고,
1463년에는 회령부사가 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반란 때 1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난을 진압해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명나라가 건주위(建州衛)를 공격할 때 이를 도와 크게 공을 세웠다. 그 뒤 오위장(五衛將) ·함경북도절도사 ·영안북도절도사 ·평안도순찰사를 지냈다. 1477년 병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문신들의 반대로 우찬성으로 돌아왔다. 1479년 명나라의 정벌을 도우러 만포진(滿浦鎭)에 갔으나 압록강 물이 얼지 않아 도강할 수 없고 동사자가 속출할 것을 염려하여 군사를 돌렸는데, 이 때문에 탄핵받아 이듬해 3월 강원도 양근(陽根)으로 유배되었다. 성종은 그를 아껴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관에 임명하였는데 문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행동지중추부사로 물러앉았다. 1489년 경기 영평(永平)의 활터에서 죽었다. 묘소는
동두천시 광암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