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주여진정벌

건주여진정벌

[ 建州女眞征伐 ]

요약 조선 전기에 남만주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한 일.

조선은 1403년(태조 3) 명나라가 여진족을 다스리기 위해 그 거주지역에 건주위를 설치하자, 그 해 강계부(江界府)를 설치하여 여진을 통제하는 한편, 1406년에는 함경도 경성(鏡城)과 경원(鏡源)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조공무역 ·국경무역을 허락하는 등 여진족에 회유와 무력의 양면정책을 폈다. 두만강 ·압록강 북안(北岸)의 산간부에서 농업 ·수렵 ·목축 등으로 생업을 영위하던 건주여진은, 관직 ·주택 ·토지를 주며 귀순을 장려한 조선의 회유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변방을 자주 침범하였고,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조선이 설치한 4군 6진을 철폐한 뒤로는 더욱 침범이 심하였다.

명나라도 변방에서 준동하는 그들을 통제할 수 없어 조선에 여진을 정벌하자는 제의를 하게 되었다. 마침 1467년(세조 13)에 함경도 길주(吉州)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를 평정하기 위하여 토벌군(討伐軍)이 북진하였는데, 그 병란이 진정되었을 무렵 명나라에서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를 협격(挾擊)하자고 제의해왔다. 이에 세조의 명을 받은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 등은 군사 약 1만을 이끌고, 길주에서 북상하여 건주위의 본거지에 이르러 여진족을 쳐서 성을 함락시키고 이만주 부자(父子)를 죽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여진족은 수시로 조선의 북쪽 국경을 침입하였는데, 1479년(성종 10) 명나라의 제의로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로 하여 군사 4,000이 공격하였으나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여진족 중의 일파인 건주좌위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17세기 초에 청(淸)나라를 세웠다.

참조항목

건주여진

역참조항목

강순, 어유소, 윤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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