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바시야 왕조

압바시야 왕조

[ Abbasids ]

요약 우마이야조의 뒤를 이어 750∼1258년에 동방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칼리프조.
이슬람 제국의 성립과 발전

이슬람 제국의 성립과 발전

원어명 ‛Abbāsid dynasty

우마이야 왕조를 이어 이슬람 칼리프제를 계승한 압바시야 왕조는 13세기 중엽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나, 압바시야가(家) 칼리프가 종교와 정치 양면에서 최고의 지도자·권력자로서 군림한 것은 945년까지이고, 그 이후는 정치상의 실권이 거의 없었다. 압바시야 왕조는 압바시야가(家) 혁명으로 성립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말기에 이르러 통치집단 내부의 분열이 일어났으며, 1년 동안 칼리프가 4번이나 바뀌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이에 더해 부족 간의 분쟁이 더욱 격심해졌고, 마침내 중앙정부의 권위가 도전받게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 마르완 2세(Marwan b. Muhammad: 744~749 재위)때에 이르러 우마이야 왕조는 자칭 하시미야(Hashimiyya)당파에서 시작한 반란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하시미야 당파는 진정한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계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하시미야 가문의 일원인 압바시야 가문 출신의 이브라힘(Ibrahim)은 745년부터 호라산(Khorasan)을 중심으로 반란을 시작했다.

이브라힘은 747년 마침내 호라산에서 무장봉기하였고, 반란 세력은 분쟁 중이던 우마이야 지지 아랍 부족을 제압하고 이 지역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후 이들은 서쪽으로 진격을 시작했고 잡(Zab) 강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저항을 물리친 뒤, 749년에 사파흐가 쿠파에서 칼리프임을 선언, 이듬해 우마이야 왕조 최후의 칼리프를 살해함으로써 압바시야 왕조를 정식으로 성립했다.

우마이야 왕조 체제의 본질은 소수의 지배자인 아랍인이 피정복자인 이민족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었으나, 압바시야 왕조 하에서는 종래 아랍의 특권적인 지위가 상실되고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이슬람 제국으로 발전했다. 정복민으로서의 아랍민족 우월주의는 퇴색하고 지배층에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비아랍계 무슬림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면서 자연히 무슬림 평등 원칙이 확립되었다. 또한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므로서 정치, 군사, 문화, 경제의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되었으며, 페르시아제국의 왕정제, 관료제 및 행정제도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새로 건설된 바그다드는 세계 동서무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상업활동에 종사함으로서, 신학자나 법학자 등 이슬람의 성직자층과 나란히 관리•상인•지주가 지배계급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제5대 칼리프인 하룬알라시드(재위 786∼809)와 그의 아들 알 마문(재위 813~817) 시대는 압바시야 왕조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다음의 칼리프 알 무으타심(재위 833~842)이, 어릴 때부터 군인으로 훈련받은 맘루크라 부르던 튀르키예 노예 용병들을 궁성의 경호원으로 고용하면서 쇠락의 씨앗이 심어졌다. 이들은 지연적•혈연적 관계가 없었으므로 오직 칼리프에게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칠 수 있었다. 따라서 칼리프는 중앙정부에서의 고조된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간의 갈등을 드러내지 않고 파괴시킬 자신의 친위대로 이들을 고용하는 한편, 제국의 안전을 도모하는 고급 군사집단으로 이들을 훈련•성장시켰다. 그러나 맘루크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자각하게 되자 이들은 스스로 지배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결국 압바시야 왕조의 칼리프제는 861년부터 945년까지 맘루크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동시에 제국 전역에서 정치세력화된 지방 토호나, 지방으로 파견되었다가 세력을 확장한 맘루크 정권 등이 반(半)독립화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독립 왕조는 파티마왕조(909~1171)였으며, 파타마조는 북아프리카 전역을 세력권 안에 넣었으며 시칠리아, 이집트, 시리아 등을 통치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중동은 서부의 파티마조와 동부의 압바시야 왕조 치하로 양분된 상황이었다. 당시 압바시야 왕조는 945년부터 페르시아계 시아파인 부와이흐조(945~1055)에 의해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당했으며, 칼리프는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칼리파제가 맘루크나 부와이흐 같은 이민족에 의해 좌우되면서도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것은 무슬림 수장으로서의 칼리파의 전통적 존엄성이 유지되어야만 아미르나 술탄들이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1세기 전반에 이르자 파티마조, 부와이흐조는 모두 쇠퇴했으며, 셀주크투르크족이 1055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부와이흐로부터 압바시야 왕조의 통치권을 넘겨받았다. 셀주크투르크(1038~1194)는 칼리프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대신 세속통치의 절대권력을 의미하는 술탄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실질적으로 칼리프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다. 이후 셀주크투르크조가 붕괴하고 몽골의 침입이 있기 전인 13세기 초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 칼리프는 종교상의 권위만을 유지하는 데 그쳤으며, 1258년 바그다드가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칸(Hulagu,재위 1256~1265)에게 점령당하면서 칼리프제(制)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압바시야 왕조는 행정면에서는 칼리프를 중심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취하여 그 대리로서의 재상(와지르)이 전(全)행정기관을 통괄하고, 때로는 각 주의 총독(아미르)이나 세무장관(아밀)•재판관(카디)의 임명권도 장악하였다. 중앙정부에는 세무청(稅務廳)•군무청•지출청•문서청•역체청(驛遞廳)•최고감사청 등의 여러 관청이 있었고, 지방에는 총독•세무장관•재판관이 칼리프 또는 재상에 의해 파견되었는데, 이 지방관들은 칼리프가 파견하는 역체관의 감시를 받았다.

세제에 있어서는 토지가 세금을 지불한다는 법적 의제(法的擬制)를 이슬람법으로 합법화하여 하라지 지역으로 규정된 토지에서는 지주(地主)가 이슬람교도인가의 여부에 관계없이 무거운 지조(地租:하라지)를 부과하고 비(非)이슬람 교도에 대해서는 따로 인두세(人頭稅:지즈야)를 부과하였다.

압바시야 왕조는 경제적으로도 번영한 시대였다. 이라크를 중심으로 농업이 크게 개발되는 한편, 섬유산업이 발달하여 그 제품은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문화면에서는 이슬람과 아랍어를 기조로 하고 헬레니즘문화를 섭취•융합하여 다채로운 이슬람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코란》연구와 법학•철학•수학 등의 여러 학문을 발달시켰고, 또 아라베스크라고 불리는 유명한 장식무늬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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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민족이 세운 이슬람 왕조

다양한 민족이 세운 이슬람 왕조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