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성
[ 申翊聖 ]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1627년 정묘호란에는 세자를 호위, 전주로 피란,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고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끝까지 척화를 주장하여, 선양으로 붙잡혀 갔다가 뒤에 풀려났다.
출생-사망 | 1588 ~ 1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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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평산(平山) |
자 | 군석(君奭) |
호 | 낙전당(樂全堂) ·동회거사(東淮居士) |
시호 | 문충(文忠) |
별칭 | 동양위(東陽尉) |
주요수상 | 선무원종공신 1등 |
주요저서 | 《낙전당집(樂全堂集)》 《청백당일기(靑白堂日記)》 등 |
주요작품 | <영창대군 비> ·<율곡이이비> |
본관 평산(平山). 자 군석(君奭). 호 낙전당(樂全堂) ·동회거사(東淮居士). 시호 문충(文忠). 선조의 사위, 척화5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이다. 12세에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광해군 때는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벼슬이 박탈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재등용되고, 이괄(李适)의 난 때는 3궁(宮)을 호위했고, 1627년 정묘호란에는 세자를 호위, 전주로 피란,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고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끝까지 척화를 주장하여, 선양[瀋陽]으로 붙잡혀 갔다가 뒤에 풀려났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글씨로 <영창대군 비> ·<율곡이이비> 및 저서에 《낙전당집(樂全堂集)》 《청백당일기(靑白堂日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