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Stele for Buddhist Monk Boje at Silleuksa Temple, Yeoju ,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 ]

요약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 탑비.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지정종목 보물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천송동, 신륵사) / (지번)경기 여주시 천송동 산113-1
시대 고려시대
종류/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크기 전체 높이 2.12m, 비신(碑身) 높이 1.21m, 폭 0.61m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승려 보제존자(普濟尊者) 혜근(惠勤)의 탑비(塔碑)이다. 탑비(부도비)는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 등을 기록한 비석으로, 고승(高僧)이 입적한 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 세웠다. 비문에 적힌 기록을 통해 이 탑비의 주인공이 혜근이며, 혜근이 입적한 1376년(고려 우왕 2)으로부터 3년 후인 1379년(고려 우왕 5) 경에 탑비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제존자 혜근

혜근(惠勤)은 1320년(고려 충숙왕 7)에 태어나 1376년에 입적한 고려시대 승려이다. 1339년(고려 충숙왕 복위 7)에 출가하여 묘적암(妙寂庵), 회암사(檜巖寺) 등에서 불법(佛法)을 익혔다. 1347년(고려 충목왕 3) 원나라의 연경(燕京, 현 베이징)으로 유학을 떠나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의 밑에서 지도를 받고, 이후 중국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며 법론(法論)을 벌이다가, 원나라 혜종(惠宗)의 명에 의해 1355년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1358년(고려 공민왕 7)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머물다가 1361년(고려 공민왕 10) 왕과 태후의 청으로 신광사(神光寺)에 머물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이후 공부선(功夫選)의 시관(試官)이 되어 과거 시험을 거행하였고, 1371년에는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로 봉해졌다. 이후 송광사에 머물다가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1376년 왕의 명으로 영원사(塋源寺)로 옮겨 가던 중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다. 혜근이 입적하자, 우왕은 혜근에게 '선각(禪覺)'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혜근의 승탑과 탑비를 짓도록 하였다. 혜근의 탑비는 여주 신륵사 뿐만 아니라 양주 회암사지에도 위치하고 있다.

탑비의 구성과 양식

대좌·비신·개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석의 전체 높이는 2.12m이고, 비신의 높이는 1.21m이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본문 이미지 1

대좌(臺座)는 비석의 받침돌로 비신과 개석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의 대좌는 지대석(地臺石) 위에 직사각형의 별석을 올리고, 다시 그 위에 복련(覆蓮: 엎어놓은 연꽃무늬)·간석(竿石)·앙련(仰蓮: 솟아오른 연꽃무늬)으로 장식한 비좌(碑座: 비신을 꽂아 세우기 위해 홈을 판 자리)를 올렸다. 비좌 윗면에는 직사각형으로 홈을 파서 비신과 기둥을 꽂았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본문 이미지 2

비신(碑身)은 탑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비석의 앞면에는 혜근의 행적·사상·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혜근의 제자와 수월사(水月寺) ·보광사(普光寺) 주지를 비롯하여 석수(石手)·목수(木手)에 이르기까지 약 200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비신의 양 옆에는 화강암 기둥을 세우고 기둥 안쪽에 세로로 홈을 파서 비신을 고정하였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는데, 대리석의 강도가 다른 암석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양 옆에 화강암 기둥을 두어 비신을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당대 명문가였던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비문을 짓고, 한수(韓脩)가 해서체(楷書體)로 글씨를 썼다.

개석(蓋石)은 탑비의 머리 부분으로 장식적인 역할과 비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의 개석은 팔작지붕 형태로 제작되었고, 지붕의 기왓골, 공포, 막새기와 등 세세한 부분까지 표현하였다. 이러한 지붕 형태의 개석은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 지어졌는데,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보물),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등이 이와 유사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가치 및 의의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는 고려시대 왕사로 추대되었던 혜근의 탑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또한 비석에 새겨진 비문에는 혜근의 행적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제도, 불교문화 등에 대한 기록도 포함하고 있어 역사학·불교학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며, 비석에 쓰인 글자는 금석학, 서예학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장식과 모양이 간략해진 고려 후기 석비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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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고려시대 묘비 보물 제229호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의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 승려 나옹의 탑비(묘비)로 전체 높이 2.12m, 비신 높이 1.21m 이며 사리탑인 보제존자석종과 함께 1379년(고려 우왕5)에 세워졌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대리석의 비신을 세우고 비신 양옆으로 화강암 기둥을 세워 지탱하게 하였으며 그 위로 지붕돌이 얹혀진 모습이다. 비문에는 이색의 글이 서예가 한수의 해서체로 쓰여져있다.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했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밀양으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여 신륵사 뒷편에 석비,석종,석등이 나란히 세워졌다.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