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파

시아파

[ Shi'a ]

요약 이슬람 세계에서 수니파 다음으로 큰 분파로 시아 이슬람(شيعة)이라고도 한다.
아슈라 데이

아슈라 데이

원어명 shī‘ism

'시아'는 사전적으로는 '분파'라는 뜻으로 수니파(정통파)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시아파는 수니파와 함께 이슬람의 한 갈래이며, 이 둘은 똑같이 정통 이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간혹 이 둘을 정통 이슬람과 이단으로 구분해서 보거나 민족적·종족적 의미를 담아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오늘날 전 세계 무슬림 인구의 90%가 수니파이고 나머지 10% 정도가 시아파이며, 시아파의 대부분이 이란과 이라크에 집중 분포되어 있으므로, 시아파를 민족적·지역적으로 구분할 수는 있으나 이는 현재적 상황일 뿐 영속적이지 않음을 이슬람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아파가 출현하게 된 발단은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누가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그를 계승하느냐에 대한 교권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후일 시아파를 이루게 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족 중에서 계승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여러 면에서 예언자의 사촌동생이자, 예언자의 딸 파띠마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된 알리(Ali)가 적격자로 여겼다. 그러나 칼리프 선출은 선거로 대표자를 뽑는 전통에 의해, 알리가 아닌 아부 바크르를 제 1대 칼리프로 결정하였으며, 아부 바크르를 인정하지 않고 알리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후일 시아파를 형성하는 중심 세력이 되었다. 특히 정통 칼리프 중 3대 칼리프 오스만(Uthman)에서 4대 칼리프 알리로 칼리프가 계승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갈등이 발생하며 시아파가 분리된다.

3대 칼리프 오스만이 새벽기도 중 암살당하고, 그 암살의 배후가 밝혀지기 전에 알리가 제 4대 칼리프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오스만의 6촌 동생이자 당시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있던 우마이야(Umayyah) 가문의 무아위야(Mu'awiyah)가 오스만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며 알리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알리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아위야 군(軍)과의 첫 전투인 낙타전투(A.D. 656년)에서 승리했으며, 두 번째 전투인 시핀전투(A.D.657년)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자 불리해진 무아위야군이 협상을 요구했으며, 알리 진영에서는 이 협상에 대한 찬반을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알리는 협상에 임했으나, 이로서 그는 군사적 손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칼리프로서의 지위가 반란자 무아위야와 대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협상 반대파들은 알리 진영을 뛰쳐나가 '카와리지' 일파를 형성했으며, 1년 반에 걸친 협상에서 중재자들은 책략을 쓰는 무아위야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결국 이슬람 세계는 양분되고 칼리프 알리의 지위는 하락했으며, 이라크 지역으로 돌아간 알리는 카와리지파에 의해 A.D. 661년 1월에 살해되었다.

알리의 죽음으로 힘의 균형이 무아위야에게 기울었으며 그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한편 칼리프위에 올라 우마이야조를 세웠다. 무아위야(재위 661~680년)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무시하고 아들 야지드(Yazid)에게 칼리프위를 세습했으며, 야지드에게 위험한 인물이었던 칼리프 알리의 차남 후세인을 견제하고자 했다. 후세인(Husayn)은 이라크의 쿠파에서 자신을 칼리프로 추대하려는 지지자들의 초청으로 메카를 떠나 은밀히 쿠파로 향했으나, 카르발라(Karbala)에서 우마이야 가문의 충복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Ubidullah b. Ziyad)에게 살해당했으며, 그 일가족이 몰살당했다(680년 10월).

이러한 후세인의 비참한 최후가 알려지자 이라크 지방은 알리 가문에 대한 동정과 반(反)우마이야 정서가 고조되었으며, 결국 이들은 후세인의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이며 하나의 정파에서 종파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을 '시아 알리(알리의 추종자)' 혹은 '시아'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카르발라의 참극은 이슬람사에서 수니와 시아라는 무슬림 종파가 나뉘는 분기점이 되었다.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4대 정통 칼리프와 역대 칼리프왕조의 칼리프(계승자·대리자라는 뜻)로 보는 데 반하여,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제4대 칼리프)만을 정통 칼리프로 보고, 알리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들은 이맘(종교지도자)으로 보았으며, 각 유파마다 해석이 다른 신성(神性)을 부여하였다.

시아파에게 이맘의 지위와 존재는 수니파의 평가와는 매우 다르다. 수니파에게 이맘은 예배를 관장하는 종교지도자이며, 칼리프는 신의 계시와 명령에 따라 종교를 보호하고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정교 일치적 수장이다. 그러나 시아파에게 이맘은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스승이며, 알리와 그의 후계 이맘들은 모두가 범인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로 여겨진다. 즉, 이맘은 무오류의 초인적 존재로서 현세 문제뿐만 아니라 샤리아(이슬람 율법)상의 제만 문제에 대해 절대적 해석권과 판결권을 갖는다는 독자적인 교리관이 형성되어 있다. 우마이야조에 대항하는 수차례의 정치적 무장봉기에서 연속적으로 실패한 시아파는 심한 박해와 좌절을 격으며 운동 초기부터 지하로 숨어들었다. 오랜 지하 활동으로 인해 시아파는 여러 이단적 사상에 쉽게 물들었으며, 후에 동방 기원(起源)의 이교적 요소가 다분히 혼입되어, 수피즘과 같은 신비주의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그 유파는 매우 다양한데, 누구를 정통성있는 이맘으로 여기는가에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 본류는 12이맘파, 혹은 이마미파(al-Imamiyah)라고 불리며,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주류이다. 중요한 시아파 교리들을 정립했으며, 12명의 이맘을 모시고 있다. 두번째 분파는 자이디야(Zayydiyah)파이며, 제 5대 이맘 알 바끼르의 동생 자이드를 추종하는 파로, 초기에는 적극적인 반(反)우마이야 활동을 벌였으나 점차 교리적으로 가장 수니파에 가까운 온건파로 발전했다. 세번째 분파는 제 6대 이맘 자으파르 앗 싸디끄의 장남 이스마일(Ismail, A.D.760년 사망)을 추종하는 이스마일파로, 한때 이집트 지방을 통치한 파띠마조가 이 파에 해당한다. 이스마일파는 다시 여러 분파로 나뉘며, 그 중에는 꾸란에 언급된 7명의 예언자를 중시하는 7이맘파, 암살교단으로 악명높은 니자리파 등이 있다. 이들 이스마일파 이외에도 10-11세기에 걸쳐 누사이리(Nusayri)파와 드루즈(Druze)파가 생겨나 주로 오늘날의 시리아·레바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