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와리지파

카와리지파

[ Kharijites ]

요약 이슬람 초기 역사에서 있었던 A.D. 657년(이슬람력 36년)의 시핀(Siffin) 전투 이후 무슬림들간의 분쟁을 해결하려는 중재 회의 중에 전쟁의 양 당사자인 알리(Ali)와 무아위야(Mu‘awiyah) 양측 모두에 반대하여 일어난 이슬람 교파의 하나이다.

일부에서는 카와리지파가 이슬람의 시아파와 마친가지로 정통 순니 칼리파제의 전통과 이론에 대해 상이한 견해를 가진 최초의 '정치분파'라고 보기도 한다. 카와리지파는 본래 알리 진영에 속했던 이들이지만, 칼리파제도의 계승 문제가 협상에 의해서 해결되는 것을 반대하여 진영을 이탈한 자들로서, ‘카와리지’라는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나간 사람들’ 이었고, 이것이 이 종파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시핀전투

카와리지파의 발생 계기가 되었던 시핀 전투는 이슬람 역사 초기에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전투이다. 예언자 가 A.D. 632년에 사망하면서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슬람 공동체 (Umma)를 이끌어 갈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Medinah) 시의 무슬림 회의 기구인 싸끼파(saqufa) 회의는 예언자의 대리인인 칼리파(Khalifah)를 선거로 뽑을 것을 결정한다. 당시 싸끼파 회의는 예언자의 사촌인 동시에 사위였던 알리(Ali)와 진보적인 그의 추종자들을 의식하고 그가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원로인 (Abu Bakr)를 칼리파로 선출했다.

아부 바크르는 사망 시 우마르(Umar)를 자신의 후임으로 지목했으며, 우마르 사후 알리에게 칼리파 위가 제안되었다. 그러나 알리는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가 만들어 놓은 전례를 따라야 한다는 조건으로 인해 자신의 권한이 제한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결국 칼리파위는 우마이야 가문의 우스만(Uthman)에게로 넘어갔다. 우스만은 12년 간의 통치 후 메디나시에서 일어난 폭동 중에 피살되었는데, 당시는 이슬람 제국 내부에서 우마이야 가문의 족벌 세도정치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알리가 제 4대 칼리파로 선출되었으나 우스만 살해의 배후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칼리파로 추대된 알리에게는 반대세력이 많았다.

특히 우스만의 친척이자 다마스쿠스 총독이었던 무아위야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고, 이 때문에 시핀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결말이 나지 않고 장기화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양 진영에 피해만 늘어가자 양측은 중재 회의를 통해 칼리파 계승 문제를 논의하게 되는데, 이 때 알리 진영의 일부가 칼리파 계승 문제는 타협에 의해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 신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는 문제임을 주장하고 협상 자체를 반대하며 진영을 이탈했다.

카와리지파의 성립

카와리지들의 이탈 초기에 알리는 무아위야와의 협상에 집중하느라 이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결국에는 A.D. 658년에 이르라 나흐라완(Nahrawan) 전투에서 카와리지파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대부분의 카와리즈들이 살해되었고 소수만이 도망쳐 나와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했다. 그 후 알리는 쿠파(Kuffa)의 사원에서 카와리지인 이븐 물잠(Ibn Muljam)에 의해서 살해되었는데, 이는 알리에게 원한을 지닌 자에 의한 사주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와리지들은 알리가 칼리파위를 두고 협상을 한 뒤로 그를 칼리파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제 3대 칼리파였던 우스만의 칼리파위도 전체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불신자이자 이슬람의 반역자라고 여겼으므로 다른 종파의 무슬림들에 대해서 단호한 입장을 취해왔다.  

카와리지파의 특징

카와리지파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는 (Imam)이다. 알리의 후손만이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이맘이 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시아파와 달리, 카와리지파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맘이 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죄를 범한 이맘에 대해서는 반기를 들 의무가 무슬림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카와리지들은 대죄(大罪)를 지은 사람은 구원을 받을 길이 없다는 죄악에 대한 절대적 교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피상적인 믿음을 비난하며 내적인 마음의 변화와 실천을 중요시여겼다. 이러한 엄격한 교리는 카와리지파가 다른 종파들을 상대로 투쟁을 벌일 때 이념적 무장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또한 일부 과격한 카와리지파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지나치게 과신한 나머지 그들보다 덜 금욕적이거나 악을 보고도 행동하지 않는 자를 비신자, 혹은 배교자로 몰아세웠고, 이러한 배교자는 살해되어도 마땅하다는 식의 과격한 논리를 따르기도 했다.  

카와리지파가 일으킨 무슬림 세계 내부의 반정운동과 군사적 요소는 우마이야조 초기 이슬람의 외부 팽창에 큰 저해 요인이 되었다. 이후 수백년 동안 카와리지파는 집권 칼리파 체제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반란의 근원지였으며, 오늘날에는 다소 온건해진 이바디야(al-'Ibadiyyah)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바디야파는 오늘날 오만 이슬람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탄자니아 등에 일부가 존재한다. 이 외에도 카와리지 분파 중에는 알 아자리까(al-'Azariqa), 안 나즈다트(an-Nazdat), 앗 쑤프리야(as-Sufriyyah) 등의 파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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