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 Johan August Strindberg ]

요약 스웨덴의 극작가이자 소설가로 《하녀의 아들》, 《아버지》 등의 소설과 희곡을 발표하여 철저한 무신론과 자연주의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고 후기에는 신앙심을 회복하여 《다마쿠스까지》 등의 걸작을 발표하였다. 실험극장인 ‘친화극장(親和劇場)’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도시

도시

출생-사망 1849.1.22 ~ 1912.5.14
국적 스웨덴
활동분야 문학
주요작품 《다마스쿠스로 Till Damaskus》(1898∼1904)

스톡홀름의 몰락해 버린 상인과 그 집의 하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불우하게 성장하였다. 항상 결핍된 사랑에 고뇌하면서 미와 고귀한 것을 동경하는 한편, 반항과 조소만을 지닌 이상성격으로 일생을 방황하였다. 그는 이미 9세 때 첫사랑을 경험하고, 15세 때는 30세의 여인을 사랑하였으며, 세 번의 결혼에 실패하고는 59세 때 19세의 아가씨에게 구애하였다고 한다. “여인 속에서 천사를 구하다가 결국은 지옥을 발견하였다”고 그 자신이 표현했듯이 그는 상대를 절대적인 높이로 끌어올리고 자신은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성모숭배의 인물이었다. 그는 웁살라대학에 입학했으나 학비 조달의 어려움과 사상적인 동요로 결국 퇴학하였고, 한때 의사 ·화가 ·배우를 지망하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자포자기적인 생활을 하다가, 그 뒤 1874년에 왕립도서관의 직원이 되어 생활이 다소 안정되자 문화사와 중국학(中國學) 등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듬해인 1875년 후에 《천치의 고백 Die Beichte eines Thoren》(1888)의 여주인공 모델이 되는 남작부인과 알게 되었고, 그녀와 결혼하는 것을 계기로 다시 창작에 전념하였다. 그 후 1879년에 격렬한 자연주의 소설인 《빨간 방 Röda Rummet》을 발표하면서부터 신문학의 기수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아직 작가로서의 지위도 안정되지 못했고 부인과의 사이가 벌어지자 1883년 부인과 함께 고국을 떠나 6년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지를 전전하였다. 그는 이 사이에 결혼생활의 이모저모를 묘사한 단편집 《결혼 Giftas》(1884∼1885)을 발표하여 당시의 여성해방운동을 냉소하였으며, 이 글 속에 신을 모독하는 말이 있다 하여 고발되었으나 무죄가 되었다.

이어 자서전적인 소설 《하녀의 아들 T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본문 이미지 1önstekvinnans son》(1886) 《대해(大海)에서 I hafsbandet》(1890) 등의 소설과 《아버지 Fadren》(1887) 《율리에 아가씨 Fröken Juliöé》(1888) 등의 희곡을 계속 발표하여 철저한 무신론과 자연주의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인생을 생존경쟁에 있어서의 격렬한 전투로 보았던 그는 부인과의 사이도 결렬되고, 마침내 그 자신도 반광인이 되어 1894∼1897년경에는 ‘지옥 시대’라고 그 자신이 주장했듯이 광기에 찬 불모의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와 E.스웨덴보리의 영향으로 다시 신앙심을 회복하고 전기(前期)보다 두드러진 창착활동을 재개하였다. 이 후기의 대표작으로는 희곡 《다마스쿠스까지 Till Damaskus》(1898∼1904) 《강림절 Advent》(1899) 《죽음의 무도 Dödsdansen》(1903) 《백조 아가씨 Svanevit》(1902) 《비텐베르크의 휘파람새 Näktergaleni Wittenberg》(1903) 《뇌우 Oväder》(1907) 《유령 소나타 Spöksonaten》(1907), 그리고 소설로는 《고독 Ensomk》(1903) 《역사의 축도 Historiskaminiatyrer》(1905) 《검은 기 Svarta fanor》(1907) 등이 있다. 위의 작품들을 발표한 때인 1901년에 그는 젊은 여배우 H.보세와 결혼하였으나, 3년 만에 파경에 이르렀다. 1907년부터는 자력으로 자작 상연을 주로 하는 실험극장인 ‘친화극장(親和劇場)’을 설립하여 3년간이나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이 극장의 젊은 여배우 파르크넬을 열렬히 사랑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