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수
[ 宋麟壽 ]
- 요약
조선 중기 문신. 형조참판 때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성이 되어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했다. 성리학의 대가로 선비들로부터 추앙받았다. 청주 신항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규암집》이 있다.
송인수 묘소
출생-사망 | 1499 ~ 1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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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은진 |
자 | 미수 |
호 | 규암 |
시호 | 문충 |
활동분야 | 정치 |
주요저서 | 《규암집》 |
본관 은진(恩津). 자 미수(眉叟). 호 규암(圭庵). 시호 문충(文忠).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를 지내고 152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26년 수찬(修撰)을 지내고 대간(臺諫) 때 김안로(金安老)의 재집권을 막으려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1534년 신병으로 인해 돌아왔다가 다시 김안로의 미움을 사 사수(泗水)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 등이 몰락하자 승지(承旨)로 재등용되었고, 형조참판 때인 1544년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성이 되어 유생(儒生)들에게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했다. 그 뒤 대사헌 ·이조참판을 역임했으나 윤원형(尹元衡) 등의 미움을 사서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5년 을사사화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서 파직되어 청주에 은거하다가 윤원형 등에 의해 사사(賜死)되었다.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선비들로부터 추앙받았다.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규암집(圭庵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