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이

선거이

[ 宣居怡 ]

요약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대첩과 행주대첩 등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가 왜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출생-사망 1550 ~ 1598
본관 보성(寶城)
사신(思愼)
친친재(親親齋)
주요수상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본관(本貫)은 보성(寶城)이고, 자(字)는 사신(思愼)이며, 호(號)는 친친재(親親齋)이다. 1550년(명종 5) 전라도 보성 용문에서 종5품 도사(都事)를 지낸 선상(宣祥)과 진원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의리가 돈독하여 친하여야 할 관계에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고 하여 ‘친친(親親)’이라 불렸으며, 이를 호로 삼았다. 지략이 뛰어났으며 병법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20세 때인 1569년(선조 2)에 선전관(宣傳官)으로 관직에 올랐고, 이듬해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37세 때인 1586년(선조 19)에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의 지위에 올랐으며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이 특별히 임금에게 요청을 하여 부호군으로 이일의 군관이 되었다. 그리고 1587년 녹둔도(鹿屯島)에서 함경도 경흥도호부의 조산보(造山堡) 만호(萬戶)로 있던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여진족의 공격을 막아내는 공을 세웠다. 1588년에는 거제(巨濟)의 현령(縣令)이 되었으며, 성주(星州) 목사(牧使)를 거쳐 1591년에는 진도(珍島) 군수(郡守)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도군수로 있으면서 당시 전라 좌수영(左水營)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과 함께 한산도대첩에 참여하여 왜군을 크게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1592년 12월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593년 1월에는 전라도 순찰사 권율과 함께 오산의 독산산성(禿山山城, 禿旺山城이라고도 함)에서 왜군을 공격해 경기도 일대를 탈환하였다. 이 때 선거이는 왜군에 큰 부상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1593년 2월에는 권율과 군대를 나누어 금주산과 행주산에 진을 쌓고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행주대첩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93년 5월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영남 지방으로 내려가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6월에 왜군이 집결하여 진주(晉州)를 공격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진주성으로 갔다. 진주성에 입성한 선거이와 홍계남은 우세한 왜군의 병력에 농성(籠城)으로 맞서는 것이 옳지 못하다 보고 운봉(雲峯)으로 나가 진을 쳤다. 그러나 결국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과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은 성을 비우고 내륙 지대에서 적과 맞설 것을 주장한 선거이의 뜻에 따르지 않고 농성을 결의하여 10만에 이르는 왜군에 맞서다가 전멸하였다.

이 일로 선거이는 군율(軍律)을 어기고 진주성의 군민(軍民)을 달려와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로 사헌부와 비변사의 탄핵을 받았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김천일의 충절이 높이 평가될수록 선거이는 반대파의 비판을 받아 군공(軍功)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선거이를 대신할 만한 장수가 없다는 이유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593년 9월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선거이는 창원(昌原)과 함안(咸安) 일대에서 노략질을 하던 왜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적군의 탄환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1594년에는 체찰사(體察使) 윤두수(尹斗壽)의 명령으로 김덕령(金德齡), 곽재우 등의 부대와 함께 거제도(巨濟島) 장문포(長門逋)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패전하였다.

그 뒤 선거이는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충청 수사가 되었다. 1595년 10월에는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는데,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이순신이 선거이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증별선수사거이(贈別宣水使居怡)’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선거이는 이 무렵 병이 들어 눕게 되는 바람에 황해 병사로 부임하지는 못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1596년 8월 4일(선조 29년 7월 11일)자에는 황해 병사 선거이가 현재 전라도 보성(寶城) 땅에 있으면서 부임할 기약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대신해 보내야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596년 12월 25일(선조 29년 11월 7일)자에는 선조가 장수들을 임명하는 문제를 놓고 선거이가 병을 앓고 있는지를 묻자 이산해(李山海)가 그는 중풍을 앓은 지 오래 되어 일을 시킬 수 없다고 대답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거이가 다시 관직에 올랐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그가 이 무렵에 병으로 죽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하지만 <오충사지(五忠祠誌)>에는 그가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난 뒤 진도군수로 있던 조카 선의경(宣義卿) 등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남해(南海)와 상주(尙州) 등지에서 왜군에 맞섰으며, 파직되어 감옥에 갇혀 있던 이순신을 위로하기 위해 군관 송희립(宋希立)을 통해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598년 경주(慶州)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거이는 임진왜란의 3대 대첩 가운데 한산도대첩과 행주대첩에 모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문신들의 견제를 받았으며, 진주성 전투에서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반대파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선무공신(宣武功臣)이 되지 못하고, 1605년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으로 추봉되는 데 그쳤다. 그리고 1801년(순조 1)에야 충신(忠臣)으로서 그 공훈이 인정되었으며, 뒤에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되었다. 그의 위패는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안치되어 있다.

참조항목

울산싸움

역참조항목

행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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