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예트

라파예트

요약 프랑스의 정치가, 혁명가, 군인. 미국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독립군에 참가했고 삼부회 소집의 주창자가 되었다. 국민의회에 미국의 독립선언과 비슷한 ‘인권선언안’을 제출했고 바스티유 함락 후 입헌왕정을 실현하려 했다.
라파예트 동상

라파예트 동상

원어명 Marie Joseph Paul Yves Roch Gilbert Motier, Marquis de Lafayette
출생-사망 1757.9.6 ~ 1834.5.20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프랑스 오트루아르현(縣) 샤바냐크

오트루아르현(縣) 샤바냐크 출생. 부유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774년 아옌 공작의 딸과 결혼하였다. 미국독립전쟁이 일어나자 1777년 도미하여 독립군에 참가하였으며, 워싱턴의 신임을 얻고 각처에서 분전(奮戰)하여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1782년 귀국한 후에는 루이 16세로부터 부대장에 임명되어 25세의 나이로 저명인사가 되었고, 1787년에는 명사회(名士會)에 칙선(勅選)되었다. 그후에도 프랑스와 미국의 친선에 노력하며 국왕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진보적 귀족으로서의 언동을 서슴지 않았고, 삼부회(三部會) 소집의 주창자가 되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국민의회에 참여하여 미국의 독립선언과 비슷한 ‘인권선언안’을 제출, 1789년 7월 13일 국민의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바스티유 함락 후에는 파리국민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국왕과 혁명세력 간의 화해(和解), 즉 입헌왕정을 실현하려는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89년 협회’를 주재하였다.

같은 정치적 입장을 취한 미라보와 개인적으로 반목하고, 또 혁명이 격화되리라는 예상을 그르침으로써 1790년 가을부터 대중의 인기를 잃었다. 더욱이 1791년 6월 국왕 도주 미수사건 이후 대중에 대해 탄압적 태도를 취하여 뒤이은 헌법 제정과 함께 사령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어서 혁명방위전쟁의 전선사령관이 되었으나, 1792년 8월 자코뱅파(派) 탄압을 꾀하다 실패하자 프랑스의 공화제가 실현되기 직전 오스트리아군(軍)에 투항하여 5년간 투옥되었다.

미국의 노력과 총재정부(總裁政府)의 교섭으로 출옥한 후에는 나폴레옹 1세에 줄곧 반대, 왕정복고기에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함께 정치활동을 하고, 1821년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혁명에 대해 동정을 표시하는 등 반정부적인 태도를 굳혔다. 1830년 7월혁명에는 시민측의 지도자로서 활약하고, 루이필리프의 휘하에서 또다시 국민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입헌왕정(立憲王政)의 성립에 진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