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군

국민군

[ Garde national , 國民軍 ]

요약 프랑스혁명 때 조직된 민병조직.
구분 민병조직
설립일 1789년
설립목적 국가 안정
주요활동/업무 파리 치안유지
소재지 프랑스

1789년 7월 파리에서 조직되어 1871년 8월 파리코뮌의 붕괴 후 법에 의해 해체되었다. 프랑스혁명 전의 프랑스는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다고는 하나 봉건제도의 관습이 남아 귀족이나 사제가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어 농민이나 도시 상인들은 불만이 많았다. 그 당시 정부는 극도의 재정 궁핍으로 특권계급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그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제부·귀족부·평민부로 구성된 삼부회를 구성하였다.

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궁전에서 개회되었다. 그러나 의결방법에 있어 혁신파 자유주의 귀족과 평민의원은 특권층 보수파 의원과 의견을 달리해 서로 대립하였다. 이에 평민의원은 그들만으로 삼부회를 영국식 의회제도로 개조하여 국민공회를 결성하였다. 국왕의 해산명령에도 불복하고 국민공회는 7월 초에 '헌법제정의회'로 명칭을 바꾸고, 마침내 의회정치 개설에 착수하였다. 그때 왕권이 군대를 베르사유 주변에 집결시켜 파리 시민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이에 헌법제정의회는 7월 12일 파리 방어와 치안유지를 위해 국민군 편성을 결의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어를 위해 무기가 필요하자 바스티유 감옥에 무기고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7월 14일 이곳을 습격하였다. 진압차 달려온 군대도 시민의 열기에 위압되어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은 순식간에 지방으로 전해져 7월 15일 마리 라파예트(Marie Rafayette)를 총사령관으로 전국적으로 국민군 60개 대대 조직을 의결하였다. 국민군은 결성 당시에는 유산시민(有産市民)과 지주층 출신자에 한정하였으나 1792년 혁명전쟁(革命戰爭)이 발발함에 따라 일반인도 참여하게 되었고 명칭도 혁명군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1792년 8월 10일의 왕위 전복과 1793년 6월 지롱드당 추방 등 혁명적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나폴레옹 1세 제정하에서 국민군은 개편되어 현역병만 정규군으로 하여 국경수비를 맡았으며 왕정복고하에서는 반정부적 경향을 드러내 1827년 해산되었다. 1830년 7월혁명 때 국민군은 재건되고 7월왕정 초기에는 민중폭동 진압에 동원되었다. 1848년 2월혁명 때 민중편에 서서 혁명의 성공에 기여하였으나 지역적 출신 성분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여 국민군의 기능이 마비되고 혁명 후의 개편으로 노동자들도 대원이 되었다. 6월폭동에 가담한 파리 노동자들은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국민군 체제에 혼란을 일으켰고, 폭동진압 후 일부는 해체되었다. 1870년 국민군은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재편성되어 파리를 방위하였으며, 1871년 파리코뮌에서는 중심세력이 되었는데, 이런 연유로 코뮌이 무너진 후 곧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