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둔황

[ Dunhuang , 敦煌(돈황) ]

요약 중국 간쑤성[甘肅省]에 있는 도시.
둔황 동굴지대 석굴

둔황 동굴지대 석굴

위치 중국 간쑤성 서부
면적(㎢) 3.2
인구(명) 112,756(2006년)

중국 간쑤성 서부 주취안지구[酒泉地區] 허시저우랑[河西走廊] 서쪽 끝, 당허강[黨河] 유역 사막지대에 있다. 란저우[蘭州]와의 거리는 1,137km, 둔황석굴[敦煌石窟]과는 25km 거리이다. 연평균기온 9.4℃, 연평균강수량 32.9mm이다.

타림분지 동쪽 변두리를 복쪽으로 흐르는 당허강 하류 사막지대에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로서,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고대의 동서교역·문화교류 및 중국의 서역 경영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BC 1세기 초에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이곳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둔황군[敦煌郡]을 두고 부근에 위먼관[玉門關]·양관[陽關]의 두 관문을 설치하는 한편, 둔전병(屯田兵)과 한인(漢人)의 식민을 투입함으로써 둔황은 그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뒤 타림분지의 한 오아시스는 중국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변경도시로 변모하고, 서방과의 접촉지를 차지하여 한인·페르시아인·투르크인·인도인 등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사는 국제성을 띤 무역도시로 번영하였다.

5호 16국시대의 한족의 국가 서량(西凉:400∼421)이 둔황을 국도(國都)로 삼았던 사실은 그 발전상을 말해준다. 그보다 앞서 4세기 중엽에는 이미 이 지방의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고, 불교도 융성하여 첸포동[千佛洞]으로 불리는 유명한 석굴사원의 조영(造營)이 시작되었다. 366년 전진(前秦)의 승려 낙준(樂尊)에 의하여 시작된 석굴사원의 조영사업은, 그 뒤 북위(北魏)·서위(西魏)·북주(北周)·수(隋)·당(唐)·5대(五代)·송(宋)·원(元)에 이르는 13세기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서량이 멸망한 뒤, 둔황은 북량(北凉)·북위의 지배를 거쳐 수·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실크로드의 두 갈래 통상로, 즉 톈산남로[天山南路]와 톈산북로[天山北路]가 차지하는 교통상의 중요성이 바뀌어, 남로에 대신하여 북로가 중요성을 더해가자, 둔황은 그 번영을 북동쪽의 상락현(常樂縣:지금의 安西縣 부근)에 빼앗기고, 명칭도 과주(瓜州)로 바뀌었다. 그러나, 대(對)서역 방어의 거점으로서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고, 당대(唐代)에는 다시 사주(沙州)로 고쳐 병력을 주둔시킴으로써 방어 및 동서무역의 요지로 삼았다.

8세기 말에는 토번(吐蕃)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9세기 중엽 이후는 당나라의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의 지방정권을 받게 되었다. 한때 독립하여 금산국(金山國)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11세기 초 다시 서하(西夏)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부터 둔황은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그 뒤, 원대(元代)에 사주로(沙州路)의 치소(治所)가 되고, 명대(明代)에 사주위(沙州衛)가 되었으나 그 벽지화(僻地化)는 피할 수 없었으며, 또 과거의 불교 사찰이나 석굴사원도 쇠미해져서 청말(淸末)에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Aurel Stein)이 둔황 모가오굴[敦煌莫高窟]을 찾았을 때는 도사(道士)와 몇 사람의 라마중만이 살았다고 한다. 1987년에 시(市)로 승격하였다.

1900년 석굴사원의 석굴군(石窟群) 중의 하나인 둔황 모가오굴에서 2만 점의 고문헌(古文獻)·회화류(繪畵類)가 발견되어, 그것이 1907년 및 1908년에 스타인 및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등에 의하여 반출됨으로써, 세계의 동양학 및 불교미술 연구에 기여하였다.

간쑤성의 목화산출기지이며, 석유·금·전력·화학·식유(食油)가공 등 소규모의 공업과 주변에서 나는 밀·잡곡·대마(大麻)·유채 등의 농산물을 산출한다. 란신철도[蘭新鐵道:蘭州∼烏魯木齊]가 북쪽으로 지나며, 215·313·112국도는 티베트·칭하이[靑海] 등 성·자치구와 통한다. 교육기관으로는 80개의 소학교와 14개의 중학교가 있다.

오늘날 둔황에는 후이족[回族]의 이슬람교도가 많이 살고 있으며, 지금은 석굴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이 모이는 명소가 되었다. 주요 문화유적으로는 둔황석굴, 웨야천[月牙泉], 위먼관, 양관 등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