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노태우

[ 盧泰愚 ]

요약 대한민국의 군 출신 정치인으로, 12·12사태에 가담하였다. 이후 내무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거쳐 제13대 대통령(1988~1993)을 역임하였다.
노태우

노태우

출생-사망 1932.12.4 ~ 2021.10.26
본관 교하(交河)
활동분야 군사, 정치
출생지 대구

1932년 12월 4일 대구에서 면서기(面書記)였던 아버지 노병수(盧秉壽)와 어머니 김태향(金泰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 5살이던 1939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었고, 노태우는 숙부 노병상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나갔다. 대구공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48년 경북고등학교에 편입하였다. 6학년이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학도병으로 헌병에 자원 입대하였고, 1952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학하여 1955년 졸업하였다.

1956년 육군 5사단 소대장으로 발령되어 사단장 박정희(朴正熙)와 조우하였다. 1957년 육군보병학교를 거쳐 1958년 육군정보학교에서 복무하였다. 1959년 김옥숙(金玉淑)과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특수전학교에 입학하여 심리전 과정을 수료하였고, 1960년 군사정보대로 발령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ROTC 교관이었던 전두환(全斗煥) 등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생도에게 5·16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게 하였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와 김재춘(金在春)이 부대장으로 있던 육군방첩부대의 업무를 같이 맡아보게 되었다. 1967년 육군대학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였고, 같은 해인 1968년 수도사단(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다. 1969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1971년 8사단 21연대, 1973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를 거쳐 1974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25사단 부사단장, 제9공수특전여단장을 역임하였다. 1978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1979년 9사단장을 역임하였다. 1979년 12·12사태에 가담하였다. 노태우는 본인이 사단장이던 9사단의 병력 일부를 빼내어 서울로 진격시켜 군사반란에 힘을 보탰다. 민주정치세력 진압 등 신군부의 정권 획득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 참여한 것이다. 12·12사태에 따른 군사반란이 성공한 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豫編)한 후 외교안보담당 정무제2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위원, 1982년 초대 체육부 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6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6월 민주항쟁으로 인한 시국 수습을 위하여 ‘6·29민주화선언’을 발표하여 국민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였다. 8월 민정당의 제2대 총재가 되었고, ‘보통 사람’임을 표방하며 제13대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12월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828만 2738표(득표율 36.6%)를 획득하여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제6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열린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여당인 민정당이 전체 299석 중 125석만을 확보하여 의석 과반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이 형성된 것이다. 1988년 9월 서울올림픽을 개최하였고, 서울올림픽 폐막 후 5공비리특별위원회 주도의 청문회가 열렸다. 여기서 전두환 정권 시기의 비자금 조성, 5·18 민주화운동 문제 등이 거론되었고, 전두환은 백담사(百潭寺)로 가 은둔하게 되었다. 정국 주도가 어려워진 노태우 정부는 1990년 1월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과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金鍾泌)과 함께 3당을 합당하여(3당 합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켰다. 이로써 여대야소(與大野小)로 정계를 개편하였다.

1990년 6월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yev)와의 정상회담으로 소련과의 국교회복에 새 전기를 마련하였고, 1992년 중국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북방외교(북방정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1988년 7월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7·7선언)을 발표하여 이전과는 다른 노선을 취하였다.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성사되었고, 같은 해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및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이루어졌다.

1990년 10월 민생치안 확립을 위하여 ‘범죄와의 전쟁(10·13 특별선언)’을 선포하였다. 대중매체 및 예술에 대한 검열이 비교적 완화되었고, 정치인에 대한 풍자도 허용되었다. 또한 1991년 기초 지방의회 및 광역 지방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제한적이나마 지방자치체 선거가 이루어졌다. 1992년 9월 노태우는 민자당을 탈퇴하였고, 같은 해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로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1993년 2월 대통령에서 퇴임하였다.

퇴임 후인 1995년 8월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에 관한 소문이 돌았고, 10월에 이것이 구체화되자 노태우는 비자금 조성을 인정하였다(노태우비자금사건). 결국 포괄적 의미의 뇌물죄가 적용되어 1995년 11월 구속 기소되었다. 아울러 12·12사태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에 따라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이에 대한 재판도 이루어졌다. 1996년 12월 열린 항소심에서 노태우는 반란모의참여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등으로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9,600만원이 선고되었고, 1997년 4월 상고심에서 형량이 확정되었다. 1997년 12월에 특별사면되었으며, 김대중정부 때 복권되었다. 2013년 9월 추징금을 완납하였다. 투병 중인 본인을 대신하여 아들이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하여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사죄하였고, 유서에서도 용서를 구하였다.

이후 투병 생활을 이어나가다가 2021년 10월 26일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러졌고, 파주 동화경묘공원에 안장되었다.

● 한국의 역대 대통령
이 름 재임기간

제1~3대 대통령

이승만

1948.07 ~ 1960.04

제4대 대통령

윤보선

1960.08 ~ 1962.03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1963.12 ~ 1979.10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1979.12 ~ 1980.08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1980.09 ~ 1988.02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1988.02 ~ 1993.02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1993.02 ~ 1998.02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1998.02 ~ 2003.02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2003.02 ~ 2008.02

제17대 대통령

이명박

2008.02 ~ 2013.02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2013.02 ~ 2017.03

제19대 대통령

문재인

2017.05 ~ 2022.05

제20대 대통령

윤석열

202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