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락

김하락

[ 金河洛 ]

요약 한말의 의병장. 이천(利川)에서 의병을 모아 부대를 편성하고 북상하면서 관군과 일본군을 격파했다. 전국 의병의 대부분이 조정의 선유(宣諭)를 받아 자진 해산했으나 그는 계속 항전했다.
출생-사망 1846.12.14 ~ 1896.7.14
본관 의성
계삼
해운당
활동분야 독립운동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82)
주요저서 《김하락진중일기》

본관 의성(義城). 자 계삼(季三). 호 해운당(海雲堂). 젊어서 천문, 지리, 병서, 의학서 등을 널리 탐독하였다. 1895년 11월 이종동생 조성학(趙性學)·구연영(具然英) 등과 함께 이천(利川)에서 의병을 모아 부대를 편성하고, 여주(驪州)의 심상희(沈相禧), 안성(安城)의 민승천(閔承天) 등의 부대와 합류, 북상하면서 관군과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12월 5일 새벽 광주 노루목 장터를 장악하였으나 12월 30일 적 2백여명의 습격을 받아 고전하다가 결국 이현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듬해 1월 흩어진 병사를 모아 대오를 정비하고 의진(義陳)을 재편하여 대장에 박준영(朴準英), 여주대장에 심상희(沈相禧)를 추대하였으며 자신은 군사 겸 지휘가 되었다. 서울 진격의 뜻이 분명했던 김하락은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항전을 계속하였는데, 의병대장 박준영(朴準永)과 좌익장(左翼將) 김귀성(金貴星)이 관군과 내통하고 문을 열어준 탓으로 2월 21일 부득이 항전을 포기, 안동(安東)으로 피신하였다.

이 무렵 전국 의병의 대부분이 조정(朝廷)의 선유(宣諭)를 받아 자진해산하였으나 그는 경상도 동해안에서 계속 항전하였으며 이후 안동의 유시연(柳時淵), 영양(英陽)의 김도현(金道鉉), 의성의 오혁주(吳赫周), 영덕의 신돌석(申乭石) 등과 제휴하여 마지막 기세를 올렸다. 1896년 7월 안동 화촌(花村)으로 들어가는 길에 영덕(盈德)의 강구(江口)에서 흥해진(興海津)을 거쳐 영덕으로 들어가려는 관군과 대치, 대접전을 벌였으나 패하였고 중상한 몸으로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유고에 《김하락진중일기(金河洛陣中日記)》가 있다. 198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조항목

건국훈장,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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