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연합의진

남한산성연합의진

[ 南漢山城聯合義陣 ]

요약 1896년 경기도 광주·이천·여주 지역의 의병들이 남한산성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연합하여 결성한 의병부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기폭제가 되어 전국 곳곳에서 항일의병이 봉기하였는데, 경기도에서는 1896년 2월 이천의진(利川義陣)이 백현전투(栢峴戰鬪)에서 일본군에게 패퇴하면서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다. 이에 의진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남한산성연합의진이 형성되었는데, 김하락(金河洛)·구연영(具然英)·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김하락은 여주의진(驪州義陣)의 심상희(沈相禧)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구연영·신용희·김태원·전귀석(全貴錫) 등을 불러들여 약 2000명의 의병을 재모집하였으며, 1896년 2월 23일 광주의진(廣州義陣)의 심진원(沈鎭元) 등이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였다. 2월 25일에는 김태원·구연영 등이 광주군수 박기인(朴基仁)을 처단하고 심상희가 이끄는 여주의진과 연합하였고, 26일에는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띄워 병력을 강화하였으며, 28일에는 이천의진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점거하였다.

연합의진은 춘천·분원·공주·청주·수원 등지의 의진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에 주둔한 관군과 일본군을 격파하고 서울로 진격하는 작전을 추진하였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거센 저항에 부닥쳐 남한산성을 두고 대치하였다. 3월 5일 연합의진은 적의 침공을 격퇴하고 대포 1문을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병력이 열세인데다 보급로가 차단됨으로써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항복 권유를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3월 20일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당시 의병 500여 명과 관군 300여 명이 전사한 치열한 전투로서 항일의병 전기의 대표적 격전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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