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협

김창협

[ 金昌協 ]

요약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 숙종 때 대사성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수항이 사사(賜死)된 뒤 은거하고 후에 관직도 사양하였다. 그의 학설은 이기설로 이이보다는 이황에 가까웠으며, 문학과 유학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고, 호론을 지지하였다.
김창협 묘

김창협 묘

출생-사망 1651 ~ 1708
본관 안동
중화
농암 ·삼주
시호 문간
주요저서 《농암집》《농암잡지》《주자대전차의문목》《강도충렬록》
주요작품 《문정공이단상비》 《감사이만웅비》 《김숭겸표》

본관 안동. 자 중화(仲和). 호 농암(農巖) ·삼주(三洲). 시호 문간(文簡). 과천(果川) 출생. 영의정 수항(壽恒)의 아들. 1669년(현종 10) 19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의(執義) ·헌납(獻納) ·대사간(大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고, 청풍부사(淸風府使)로 있을 때인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아버지 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자 아버지의 죄가 풀리고 그는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받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대제학(大提學) ·예조판서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 등 여러 차례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는 벼슬보다 문학유학(儒學)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고, 당대의 문장가이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학설은 이기설(理氣說)로 이이(李珥)보다는 이황(李滉)에 가까웠으며,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靈巖)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집에 《농암집》, 저서에《농암잡지(農巖雜識)》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편서에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문곡연보(文谷年譜)》, 작품으로 글씨에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 《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 《김숭겸표(金崇謙表)》 《김명원신도비(金命元神道碑)》의 전액(篆額)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