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삼

김동삼

[ 金東三 ]

요약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만주에서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생-사망 1878.6.23 ~ 1937.3.3
일송(一松)
본명 긍식(肯植)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경북 안동(安東)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1878년 경상북도 안동(安東) 임하면 천전리(川前里)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의성이며 본명은 긍식(肯植) 자는 한경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뒤에 자신의 이름을 동삼(東三)이라고 했으며 호 일송(一松)이라고 지었다. 부친은 김계락(金繼洛)이며 대대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는 전통적인 한학자로서 공부를 하였지만 1904~5년부터 신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신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 등과 함께 협동중학을 설립하여 교감이 되었으며 청소년 교육에 앞장섰다. 또한 신민회(新民會) 회원으로 활동하며 민중을 계몽하는 일에도 나섰으며 구국계몽단체인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부에서도 중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1909년 서울의 양기탁(梁起鐸)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와 독립운동의 방향을 협의하였으며, 대한협회를 탈퇴하고 대동청년단에 가담하여 활약하였다. 교육을 통해 장차 국가의 독립과 대사를 이끌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국권피탈 후에는 가족 전체가 만주로 이주하여 1911년 유하현 삼원포에 정착하였다.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교포의 안정책과 교육문제에 대하여 계획을 세웠다. 만주로 이주해온 한인단체인 부민단을 조직하여 한인의 대소사를 해결하는데 노력하였다. 당시 한인들이 세운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는 뒤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였다. 또한 1914년에는 백두산 서쪽에 계곡에 백서농장을 운영하며 수천명의 독립군 양성을 위한 비밀 군영으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백서농장은 열악한 환경으로 농장은 4년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1918년 지린성[吉林省] 왕청현(旺淸縣)에서 서일(徐一)·신팔균(申八均)·김좌진(金佐鎭) 등 38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으로 이주해오는 한인들이 급증하자 한족회를 조직하여 실질적인 운영을 총괄하는 총무를 맡았다. 또한 군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휘하에 들어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되었는데 그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1920년 청산리전투를 지원하였으며 1922년에 조직된 대한통의부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으로 선출되어, 회의를 이끌었으며 독립운동단체를 일원화하는 데 힘썼다. 1925년 지린성 화전현에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참모장 및 행정위원에 취임하였다.

1927년 김좌진·지청천(池靑天) 등과 조국광복운동의 총기관으로 민족유일당촉진회(民族唯一黨促進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고,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만들어 재만동포들의 권익신장에 힘썼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哈爾濱]에서 붙잡혀 본국으로 강제송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1933년 3월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이감되었다.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그의 유해는 화장하여 한강에 뿌려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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