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

서일

[ 徐一 ]

요약 한국의 독립운동가. 만주에서 3·1운동의 전주곡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독립운동의 기세를 올렸고 정의단,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출생-사망 1881.2.26 ~ 1921.8.28
본관 이천
백포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함북 경원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2)
주요저서 《오대종지강연》《신화강의》

본관은 이천(利川)이며, 호는 백포(白圃)이다. 함북 경원(慶源)에서 출생했다. 22세 때 함일사범학교(咸一師範學校)를 졸업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11년에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으로 건너가 명동중학(明東中學)을 설립, 육영사업에 힘쓰는 한편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들을 규합,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정신(鄭信)·김동삼(金東三)·유동열(柳東說) 등 39인의 서명으로 3·1운동의 전주곡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독립운동의 기세를 올렸고, 1919년 계화(桂和)·채오(蔡五)·양오(梁吾) 등과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여 신문을 발간,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 해 8월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산재한 대종교도(大倧敎徒)들을 중심으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 총재가 되어 총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연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고 본영을 왕청현에 두고 십리평(十里坪) 산 속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20년 9월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헤이룽장성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하여 각 군단 수령회의를 열고 헤이룽강[黑龍江]을 건너 자유시(自由市)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자는 데 합의하고, 행동통일을 위한 단체로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되었다.

한편, 일찍이 대종교에 입교하여 시교사(施敎師)로서 수년간에 수만 명의 신도를 확보하고 동일도본사(東一道本司) 전리(典理)·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 등을 지냈다.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 《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진리도설(眞理圖說)》 《삼문일답(三問一答)》 《회삼경(會三經)》 등을 저술하여 교리를 천명하였다. 1921년 8월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아 청년사병 다수가 희생되었는데, 다음날 그는 책임을 지고 마을 뒷산에서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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