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김기형

[ 金基瀅 ]

요약 일제 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 운동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안악 일대의 만세시위운동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한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황해도경무사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금활동에 주력했다. 한국 독립당 조직에 참여, 중앙 집행위원을 비롯해 문화부장 · 재무부장 · 감사 등을 역임했다.
출생-사망 1887 ~ 1943
해악
별칭 현구
국적 한국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황해 안악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8)

호는 해악(海岳)이고, 이명(異名)은 현구(玄九·鉉九)이다.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출생하였다. 1914년 만주로 이주하여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김창환(金昌煥) 등의 지도를 받으며 문화사업에 힘쓰다가 귀국, 문신소학교(文新小學校)를 설립하고 육영사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안악 일대의 만세시위운동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한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황해도경무사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금활동에 주력하였다.

1922년 7월 국민대표회의 문제로 임시정부에서 의견대립이 생기자,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의 회원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황해도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 등이 조직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비서부장 및 총무부장에 선임되었다. 또 1923년 6월에는 국민대표회의파의 황해도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924년 인성학교(仁成學校) 이사를 맡아 교육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한국노병회 회계검사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3월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 탄핵심판위원에 선임되었고, 1926년 한인 유학생을 위하여 최창식(崔昌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상하이에 삼일공학(三一公學)을 설립하였으며, 또한 문일민(文一民) 등과 같이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9년 3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조직에 참여, 중앙집행위원을 비롯하여 문화부장·재무부장·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35년 난징[南京]에서 한국광복동지회·한국독립당·한국혁명당·조선혁명당· 의열단 등 5개 단체의 통합운동에 참여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조직에 전념하였다. 1940년 충칭[重慶]에서 임시의정원의원으로 한국광복군 창립을 위해 노력하는 등 독립을 위해 활동하다 1943년 병사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