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광복군

[ 光復軍 ]

요약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조직된 항일군대.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 기록사진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 기록사진

구분 군대
설립일 1940년 09월 17일
설립목적 항일운동
주요활동/업무 군사활동과 외교활동

1932년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규모는 축소되었고 재정상 운영 내용도 부실했다. 더욱이 1937년 중 ·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각지에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단체들은 충칭에 이전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된 군사활동과 외교활동이 필요했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광복군이 조직되었다. 광복군 편성문제는 치장[綦江]에 있을 때부터 추진되어 오던 일이었다.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이 시안[西安]에 파견되었고, 광복군은 많은 경비가 필요해 중국정부의 양해를 얻는 교섭을 벌였다.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광복군의 조직을 찬성했지만, 한편으로 임시정부와 분열 상태에 있는 김원봉(金元鳳)계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와 이미 합동하여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이에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의 성립전례를 가지고 우선적으로 광복군을 발족시켰다. 발족일을 전후하여 광복군 조직의 포고문, 선전 전단 등이 배포되었고,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는 관계법규를 정비하였다. 총사령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이 취임했다.

광복군의 편성은 임시정부에서 제정한 군사법규인 육군임시군제(陸軍臨時軍制) ·육군임시군구제(陸軍臨時軍區制) ·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臨時陸軍武官學校條例) ·군사경위근무조례(軍事警衛勤務條例) ·경위근무세칙(警衛勤務細則) ·군무부임시편집위원부규정(軍務部臨時編輯委員部規定) 등 군사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는 규정에 따랐다.

광복군은 3개의 지대(支隊)로 편성되었다. 제1지대장에 이준식(李俊植), 제2지대장 공진원(公震遠),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가 취임했다. 또 1941년 1월에는 제5지대가 편성되어 나월환(羅月煥)이 통솔했다. 제5지대는 원래 전지(戰地) 공작원들이 많아 편성 후에도 주로 전후방 공작업무를 수행했다.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 ·사단 등의 6단으로 기본 편성이 이루어졌다. 또한 《광복(光復)》이라는 간행물을 발행했고, 방송과 선전지를 전후방에 살포해 애국 청년은 물론 일본군에 징병되어 온 한국청년을 유치하는 데 힘썼다.

1941년 11월 중국정부 군사위원회에서 광복군이 항일작전 기간 중 중국 군사위원회에 직속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9개 항의 조건을 내세워 지원을 제의해 왔으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가, 1941년 12윌 1일 수락선언문을 발표하여 군수물자의 충당을 일단 해결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9일 대일선전(對日宣戰)을 정식으로 포고했다. 이를 계기로 분열상태에 있던 공산진영과 협업하는 작업이 추진되어 1942년 7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했다.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던 광복군은 1944년 8월에 임시정부로 이관되어 임시정부 통수부(統帥府)가 통할하기 시작했다. 광복 직전에는 한미합동작전으로 국내 정진대(挺進隊)를 편성하여 진격하려다가 출동 시기가 임박해 일제가 항복하면서 실현하지 못했으며, 해방 후 일부는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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