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 Stele for Royal Preceptor Hyedeok at Geumsansa Temple, Gimje , 金堤 金山寺 慧德王師塔碑 ]

요약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고려시대 탑비.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지정종목 보물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시대 고려시대
종류/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크기 높이 2.7m, 너비 1.5m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사 있는 고려시대의 승려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의 탑비(塔碑)이다. 탑비(부도비)는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 등을 기록한 비석으로, 고승(高僧)이 입적한 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 세워졌다.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의 비문 기록을 통해 이 탑비의 주인공이 소현이며, 소현이 입적한 1096년(고려 숙종 1)으로부터 15년 후인 1111년(고려 예종 6) 경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혜덕왕사 소현

혜덕(慧德)은 1038년(고려 정종 4)에 태어나 1096년에 59세의 나이로 입적한 승려이다. 11살에 해안사(海安寺)의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解麟)의 제자가 되었으며, 1050년 복흥사(福興寺)의 궁단(宮壇)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1061년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대덕(大德)이 되었고, 1079년(고려 문종 33)에는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하여 사찰을 중창하고 교구를 확장했다. 또한 금산사의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법화현찬(法華玄贊)》 《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의 불교 경전을 간행하였다. 1084년(고려 선종 1) 승통(僧統)에 올라 현화사(玄化寺)에 머물렀으며, 이후로는 금산사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였다. 1096년 소현이 입적하자, 숙종은 소현을 왕사(王師)로 추증(追贈)하고 '혜덕(慧德)'이라는 시호(諡號)와 ‘진응(眞應)’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탑비의 구조와 양식

귀부·비신으로 구성된 탑비로, 비석의 머릿돌인 이수는 현재 유실되었다. 귀부는 화강암으로 비신은 흑대리석으로 제작되었으며, 비석의 전체 높이는 약 2.7m, 비신의 너비는 약 1.5m이다.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본문 이미지 1

귀부(龜趺)는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로 비신과 이수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거대한 단일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귀부의 얼굴은 목이 짧은 용의 형상으로 묘사되었다.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을 새겨져 있고, 귀갑문 안에는 꽃무늬를 새겼다. 비좌(碑座: 비신을 세우기 위해 홈을 판 자리)의 4면에는 복련(覆蓮: 엎어놓은 연꽃무늬)을 새겨 장식하였고, 귀부 아래의 지대석에는 물결무늬를 조각하였다.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본문 이미지 2

비신(碑身)은 탑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소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비신의 글자가 닳아 있어 비문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은 알 수 없으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등의 문헌기록을 통해 이오(李檉)가 글을 짓고, 정윤(鄭允)이 글씨를 썼으며, 채유탄(蔡惟誕)이 글자를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글자의 크기는 약 2cm이고, 서체는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 

가치 및 의의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는 고려시대 국사로 추대되었던 혜덕왕사 소현의 탑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또한 비석에 새겨진 비문에 소현의 행적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제도, 불교문화 등에 대한 정보도 포함하고 있어 역사학·불교학에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비석에 쓰인 서체는 금석학, 서예사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이러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참조항목

금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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