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극단

[ 劇團 ]

요약 연극 상연을 목적으로 결성된 집단.

연극은 여러 예술적 요소를 포함하는 일종의 종합예술이기 때문에 이것을 창조하는 데는 각 예술분야를 담당하는 여러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럴 경우 이들 협력자가 연극에 대하여 같은 의견을 가지고, 일정한 방침에 따라 지속적으로 집단활동을 하기 위하여 결집한다면 그 조직이 곧 극단이다.

서양의 극단
극단형태의 발생은 역사가 길어 유럽에서는 로마시대에 노예를 배우로 사용한 극단이 있었고, 그 후 16세기경 이탈리아의 콤메디아 델 라르테에서는 여우(女優)의 출현과 함께 직업적인 극단조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각지를 떠돌아 다니는 이동극단이었다. 그러한 극단들이 상설극장과 결부되어 일정한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엘리자베스 왕조의 셰익스피어 연극, 황금세기(黃金世紀)의 에스파냐 연극 등을 거친 17세기 고전주의 연극에 이르러서였다.

그 후 연극의 양상이 점차 복잡해짐에 따라 각국에는 막강한 극단이 차례로 결성되었다. 특히, 근대극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는 예술상의 주의 ·주장을 뚜렷하게 내거는 극단이 속속 출현하여 극단은 급격히 예술협동체로서의 성격을 띠는 한편, 연극 개혁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극단을 활동 내용면에서 분류하면 직업적 ·전문적인 극단과 아마추어 극단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아마추어 극단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문화활동 단체로서 존재의의를 가지며, 극단원이 생활수단을 별도로 가지고 있는 데 반하여, 전문극단에서는 연극이 바로 직업이기 때문에 극단은 예술상의 목적 외에 경제활동도 동시에 행하여 극단원의 생활을 뒷받침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적으로 극단의 추세는 다양하였는데, 유럽에서는 극장이 전속극단을 소유하는가 하면 거꾸로 극단이 극장을 경영하여 극장이 곧 극단인 경우가 많았다. 또한 국립 ·공공단체가 운영하는 극단이 많아진 것도 특색의 하나이다. 미국에서는 종래의 극단이라는 조직이 사라지고 프로듀서시스템이 대세를 좌우한다.

한국이나 일본은 아직 극장을 가지지 못한 극단이 많다. 어쨌든 극단이 국립이나 흥행회사 등에 전속되어 직업적 극단이 되면 경제적인 면이 보장되는 반면에 자신의 예술활동에서 충분한 자주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향도 있다. 극단의 내부구성은 대체로 문예 ·연출 ·연기 ·무대예술 등의 예술부문과 경영 ·선전 등 사무부문으로 이루어지며, 위원제(委員制) 또는 전체합의제(全體合議制) 등에 의하여 운영된다. 그러나 극단이 내포하는 예술과 생활이라는 이중성격이 빚는 모순은 특히 직업극단의 경우 더욱 심하여, 그것이 원인이 되어 극단의 분열이나, 붕괴를 가져오는 예도 적지 않다.  

한국의 극단
한국에서 최초로 극단의 형식을 갖추어 극장에서 연극을 상연한 것은 1908년 이인직(李人稙)의 작품 《은세계》를 원각사(圓覺社)에서 공연한 것이 효시가 된다. 이보다 앞서 1902년 황실극장격인 협률사(協律社)가 창설되어 창우(倡優)와 무동(舞童) 등의 연예를 구경시키는 한편, 기생과 창우의 관리기관 구실을 하고 있었으며, 1904년 이인직이 당시 이채연(李采淵)의 후원으로 협률사 자리에 그리스식 원형극장인 원각사를 짓고 첫 공연으로 신재효(申在孝)가 작사 작곡한 《춘향전》을 가극화하여 상연하였다. 그 후 전술한 《은세계》의 상연에 이어 《설중매(雪中梅)》를 각색하여 공연함으로써 이 일련의 공연이 한국 근대극의 시작이 되었으나 1914년 원각사는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러한 원각사의 활동에 고무되어 서울에 몇 개의 극장과 극단이 생겼으며, 그 대표적인 것으로 혁신단과 문수성일좌(文秀星一座) 및 유일단(唯一團) 등을 꼽을 수 있다. 혁신단은 1911년 임성구(林聖九) 등이 조직하여 《법지법(法之法)》 《육혈포 강도》 《실자살해(實子殺害)》 등을 공연하였다. 문수성일좌는 혁신단의 공연에 불만을 품고 윤백남(尹白南)과 조일재(趙一齋)를 주축으로 조직된 극단이며, 유일단은 이기세(李基世)가 조직하여 연흥사(演興社)를 주무대로 활약하였다.

그 후 한국연극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토월회(土月會)가1929년 창단되어 1932년 명칭을 태양극장으로 바꾸어 활동을 계속하였다. 토월회의 주요작품으로 《즐거운 인생》 《초생달》 《목신의 장난》 《간난이의 설움》 《희생》 《아리랑 고개》 《운명》 《라이스카레 통역생》 《남경의 거리》 《월요일》 《카추샤》 등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의 작풍은 대부분 신파적(新派的) 연극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이러한 토월회의 신극운동을 이어받아 활동한 극단으로 극예술연구회가 있다. 극예술연구회는 1931년 조선에 진정한 극문화를 수립하자는 취지 아래 설립된 극단으로, 창립동인은 김진섭(金晋燮) ·유치진(柳致眞) ·이헌구(李軒求) ·서항석(徐恒錫) ·윤백남 ·이하윤(異河潤) ·장기제(張起悌) ·정인섭(鄭寅燮) ·조희순(曺喜淳) ·최정우(崔珽宇) ·함대훈(咸大勳) ·홍해성(洪海星) 등 12인이다.

극예술연구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으나 1936년 극연좌(劇硏座)로 개편되어 창립정신에 맞는 연극활동을 계속하였다. 신협(新協)과 극협(劇協)이 있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극단에도 새로운 연극운동의 하나로 소극장운동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소극장운동은 낡은 연극을 배척하고 아카데믹한 연극을 지향함으로써 침체된 한국연극을 부흥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

대표적인 극단으로 1957년 창단된 제작극회(製作劇會)를 들 수 있으며, 그 동인은 차범석(車凡錫) ·김경옥(金京鈺) ·오상원(吳尙源) ·박현숙(朴賢淑) 등이었다. 그 후 1962년 국립극단이 창설되어 《원술랑》 등을 공연하였고 같은 해 드라마센터가 건립되었다. 63년 이근삼(李根三) ·김정옥(金正鈺) ·양광남(梁廣南) 등이 주축이 되어 민중극장을 창단하였고, 같은해 차범석 등을 중심으로 극단 산하(山河)가 창립되었다.

그 후 창단된 주요극단으로 사계(四季) ·성좌(星座) ·실험극장(實驗劇場) ·자유(自由) ·광장(廣場) ·가교(架橋) ·현대극장(現代劇場) ·민예(民藝) ·미추(美醜) ·신시(神市) ·로얄시어터 등이 있다. 한편, 공연 무대도 차츰 넓어졌는데, 1978년 4월 세종문화회관의 대강당 ·소강당 ·별관이 문을 열었으며, 별관은 1992년 서울시에 넘겨졌다. 또한, 예술의 전당 축제극장이 93년 개관했는데, 오페라하우스(음악극) ·연극극장 ·실험극장의 3개 공연장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