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문학

가정문학

[ 嘉靖文學 ]

요약 중국 명(明)나라 가정연간(1522~66)의 문학.

그 이전의 홍치연간(弘治年間:1488~1505)에는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 등, 이른바 전칠자(前七子)가 나와 문학의 복고를 주창하면서 “문(文)은 반드시 진한(秦漢)이라야 하며 시(詩)는 반드시 성당(盛唐)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의복고(模擬復古) 주장은 일세를 풍미하여 홍치 ·정덕(正德)의 30여 년간에 미쳤으나, 가정 초년에 이르러 점차 그 폐단이 나타나 왕신중(王愼中) ·당순지(唐順之) ·모곤(茅坤) 및 귀유광(歸有光) 등은 진 ·한의 문을 멀리하여 구양 수(歐陽修) ·증공(曾鞏)을 주로 삼고, 시는 초당(初唐)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모곤은 당송(唐宋)의 팔가문초(八家文鈔) 164권을 편찬하여 배울 바를 명시하였고, 귀유광은 당송 제가(諸家)의 유집(遺集)을 취택하여 문하생들에게 강의함으로써 진 ·한을 조종(祖宗)으로 삼는 풍조에 대항하기를 20년이나 계속하였다.

그들의 설은 한때 세상에서 환영을 받았으나 가정 말년에 다시 의고파(擬古派)가 대두하면서 빛을 잃었고, 이어서 후칠자(後七子)인 이반룡(李攀龍) ·왕세정(王世貞) ·사진(謝榛) ·종신(宗臣) ·양유예(梁有譽) ·서중행(徐中行) ·오국륜(吳國倫) 등이 활약하였다. 그 세력은 전칠자를 능가하는 바가 있었다.

역참조항목

이몽양, 칠재자, 왕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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