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배치

가람배치

[ 伽藍配置 ]

요약 사찰 건물의 배치.
가람배치

가람배치

탑·금당(金堂)·강당(講堂) 등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를 가리키며, 그 배치는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르다. 한국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이다. 한문으로 승가람마(僧伽藍摩)로 표기되며, 승가란 중(衆)·람마(藍摩)란 원(園)의 뜻으로 중원, 즉 여러 승려들이 한데 모여 불도를 닦는 곳이다. 이것을 후세에 절 가람(伽藍)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구려의 가람배치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불교가 들어와 375년에 초문사(肖門寺)·이불란사(伊弗蘭寺)가 창건되었고, 392년(광개토왕 2)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이 창건되었다. 또한 498년(문자왕 7)에 금강사(金剛寺)가, 영류왕 때는 영탑사(靈塔寺) ·육왕사(育王寺) 등 많은 절이 건립되었다.

1937년 평양 청암동의 금강사지(金剛寺址)를 발굴 조사한 결과 5세기에 창건된 금강사지에는 남향으로 중문(中門) 안에 팔각목탑이 배치되고 동서(東西)에 2개의 건물터가 있으며 북쪽에 3개의 건물터가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또 1975년 평양 왕릉동 정릉사지(定陵寺址)를 발굴한 결과 5세기 창건으로 추정되는 정릉사에는 남향으로 중문 안에 팔각목탑이 배치되고 동서에 2개의 건물터가 있으며 북쪽은 회랑으로 막혔고, 회랑 안에 3개의 건물터가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문에서 팔각탑 경내는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다. 고구려는 팔각의 목탑을 사찰의 중심 건물로 하고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에 북쪽 금당 좌우에 2개의 건물터가 또 있는데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

백제의 가람배치

백제의 한성시대 절터는 아직 한 곳도 발견되지 않았다. 공주에 있는 대통사지(大通寺址)는 527년(성왕 5)에 창건된 절이다. 기록상으로는 왕흥사(王興寺)·칠악사(漆岳寺)·오합사(烏合寺)·천왕사(天王寺)·도양사(道讓寺)·미륵사(彌勒寺)· 보광사(普光寺)·호암사(虎灸寺)·백석사(白石寺)·오금사(五金寺)·사자사(獅子寺)·북부수덕사(北部修德寺) 등이 있었다. 그리고 1936년에 부여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1938년에 부여 동남리사지(東南里寺址), 1966년에 부여 은산면 금강사지(金剛寺址), 1980년에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1982년 익산 미륵사지 등이 있다.

군수리사지는 절이 남향으로 중문·방형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다. 또, 금당과 강당 좌우에는 2개의 건물터가 있다. 동남리사지는 절이 남향으로 중문·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다. 이 동남리사지에는 탑지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금강사지는 동향으로 중문·탑·금당·강당이 동서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다.

정림사지는 남향으로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다. 익산미륵사지는 남향으로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이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가 많은데 익산 미륵사지는 새로운 가람배치로 조사연구가 더 필요하다.

신라의 가람배치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이후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534년에 흥륜사(興輪寺)가 착공되어 544년에 준공되었고, 535년에 영흥사(永興寺), 566년에 기원사(祇園寺), 597년에 삼랑사(三郞寺), 553년에 기공하여 645년에 완공한 황룡사(皇龍寺), 634년에 분황사(芬皇寺), 635년에 영묘사(靈廟寺) 등이 창건되었다. 이 중에 확실한 가람배치를 알 수 있는 것은 황룡사지이다.

황룡사지는 남향으로 남북 일직선상에 남문(南門)·중문(中門)·탑·금당·강당이 서고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는데, 중문과 탑 사이 좌우에 경루(經樓)나 종루(鐘樓) 같은 건물이 대칭으로 배치되었고 금당 좌우에도 2채의 불전이 병렬(竝列)로 배치되어 있다. 황룡사지는 일탑삼금당병렬식(一塔三金堂竝列式)이라 할 수 있다. 고신라의 절은 모두 평지(平地)에 있는 점이 특색이며 절의 중심 건물은 탑이다.
 
통일신라의 가람배치

통일신라 때는 수많은 가람이 있었다. 이 중에 대표적인 것이 1959년에 발굴, 조사된 감은사지(感恩寺址)와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천군리사지(千軍里寺址), 단편적으로 조사된 망덕사지(望德寺址)·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및 1969년에 발굴, 조사된 불국사(佛國寺) 등이다.

감은사지는 남향으로 중문·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금당 앞 좌우에 쌍탑(雙塔)이 있으며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다. 또한 절이 산기슭에 자리잡았다. 천군리사지는 남향으로 중문·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금당 앞 좌우에 쌍탑이 있으며,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불국사지는 남향으로 중문(자하문)·금당·강당(부설전)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금당(대웅전) 앞 좌우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건립되었으며, 중문에서 강당까지 회랑이 둘러져 있다. 통일신라 8세기까지의 가람은 쌍탑일금당식(雙塔一金堂式)으로 절이 산에 건립되었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산지(山地) 가람이 발달하여 가람 배치가 자연의 지세에 따라 건물이 건립되어 쌍탑이 없거나, 일탑일금당식이거나, 경우에 따라 무탑(無塔) 절이 생겼다.

고려·조선의 가람배치

고려는 통일신라의 가람배치를 계승하였다. 초기에는 탑에 대한 배려가 높았으나 후기로 오면서 탑이 없는 절이 많이 생겼다. 고려의 가람은 산지 일탑일금당병렬식(山地一塔一金堂竝列式)과 산지 쌍탑병렬식(山地雙塔竝列式), 산지 무탑식(山地無塔式)이 혼재한다. 조선시대는 고려 가람배치의 계승과 모방에 그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