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도움이 될까하여 아래의 글을 올려 드립니다. ^^
<성경이 말하는 죄, 악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린 아기도 죄인인가요?"
원죄라는 말이 있으니 그것이 궁금하셨던 것입니다. 도무지 아기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답을 드렸습니다.
죄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악"이라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죄란 "본질적으로 안 좋게 하는 원인"이며 악이란 "본질적으로 안 좋은 것"을 뜻합니다.
가령, 아버지께서 한국에 계신다고 합시다. 그리고 아버진 "한국말"밖에 모르신다고 합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당신이 동일한 한국 사람이어서 당신도 일본말을 모른다고 합시다. 아버지께 가야 하고, 또 아버지와 교통도 해야 하는데 한국말을 쓸 수 있는 키보드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교통할 수 없는 일본말만 쓸 수 있는 키보드가 바로 "죄"입니다. 에덴 밖에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교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준법적 제사"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받으시니까요. 하지만 가인의 "비준법적 제사"는 "일본어 키보드"와 같습니다. 그것으로는 아버지와 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 있는 자식이 원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키보드를 이용한 채팅이며 의사소통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가 없는 것이 곧 "죄"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불법 안에 있다는 것, 죄 중에 있다는 것은 "나쁜 곳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소통 불가능한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그 자식에게 "좋음"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식은 아버지께서 그 "좋음"을 주실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한국말이 써지는 키보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죄란 그렇게 "소통할 수 없음"입니다. 그것이 "안 좋음"이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안 좋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은 본질적으로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안 좋음"임을 알고 "본질적 좋음"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선만 행하시는 분입니다. 인생이 좋아서 그저 인생만 사는 사람들은 아버지와 소통할 수 없는 "죄" 중에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안 좋음"의 상태는 아닙니다. 나름의 "좋음"에 취해 있기 때문에 일단은 "안 좋음"처럼 보이는 자기부인의 길과 자기십자가를 지는 길을 가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에 대하여 싫음을 나타내는 것은 그들이 "나름의 좋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해 사는 것이 "좋은" 그들이 곧 "죄인"이지만 그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위에 살면서 "나름의 좋음"을 느끼며 살기 때문에 여전히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인들에게도 "좋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이 "본질적으로 좋을 수 없는 상태"임을 느낀 자가 본질적 좋음을 찾아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찾아진 하나님이 옳다 하심, 곧 "하나님의 의"에 자기를 스스로 묶고 본질적으로 좋은 좋음을 향하여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하나님과의 소통법인 한글 키보드를 가지고 아버지와 소통을 합니다. 그 소통하는 자가 곧 의인입니다. 물론 그 의인의 길은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그 힘든 길을 가는 자는 "본질적 좋음"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있기에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역시 "좋음"을 채우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다가 그 의인이 "악"을 행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악을 행한 악인은 "안 좋음"을 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악인도 자신의 "좋음"을 따라 악을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한 본질적으로 보자면 "안 좋음"이지만 악을 행한 그에게 있어서 "안 좋음"이 아닙니다. "좋음"입니다. 안 좋음을 스스로 택하는 인생은 아예 없습니다. 물론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새디즘을 가진 자도 "좋자고" 새디즘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그 역시 "좋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죄나 악이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 위에 인생들을 놓으시고 악인이나 선인이나 의인이나 죄인이나 모두 "좋음"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죄나 악은 "본질적 나쁨"이며 의와 선은 "본질적 좋음"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한 "죄" 중에서 "악"을 행하는 자는 본질은 어디로 갔든지 "당장의 좋음"만 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의’ 중에서 선을 행하는 자는 본질적 좋음을 추구하며 ‘당장의 괴로움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그것이 "안 좋음"이라는 생각, 혹은 "나쁨"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에서의 법 앞에서는 죄나 악이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죄나 악은 모두 "본질적 안 좋음"이나 당장 그것을 행하는 이들에게는 "좋음"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 좋음을 아는 자들은 일본에서는 필요를 못 느끼는 한국말 키보드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본질적 좋음을 모르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한국에 계신 아버지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키보드를 가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나쁨"이 아닙니다. 그저 "다른 것"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각각 다른 것을 가지고 각각의 "좋음"을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생들이 만들어 낸 "원죄"라는 용어는 죄나 악을 "나쁨"으로 상징되게 하였고, "아기에게도 죄가 있나?" 하는 의문을 만들어 내게 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은 그것이 성경의 내용이라도 이렇게 본질적으로는 "안 좋음"을 양산할 뿐입니다. "부정하다" 혹은 "거룩하다"는 말도 나쁘다, 좋다가 아니라, 부정하다는 것은 "본질적 좋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할 수 없는 상태다"이고, 거룩하다는 것은 "본질적 좋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상태다" 입니다. 모두 사람이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이루셨습니다. 그 세상 위에서 인생들이 어리석어 "안 좋음"을 만들어 냈을 뿐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의인은 이렇게 썩을 면류관 곧, 당장의 좋음에 대하여 절제를 하며 길을 가야 합니다.
사람을 불로 튀기는 지옥의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런 곳을 만들어 낸 인생들이 사는 세상이 곧 지옥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신 대로 그저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의 말을 잘 들으면 죽어서 천국에, 안 들으면 지옥에 보내시는 분이라고 배워 알고 계셨습니다.
매너가 아주 좋은 어떤 남자가 집을 한 층에 두 채를 가지고 있는데 당신을 그 둘 중에 한 채로 들여 보냈습니다. 들어가 보니 거기는 하얀 레이스 장식이 된 침대와 온갖 아름다운 색들로 치장된 집이었습니다. 먹을 것도 많고 장난감도 많아 나가고 싶지 않은 집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하며 지냈습니다.
그 방에서 지내던 어느 날, 가끔 주인 남자가 앞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앞집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앞집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집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묶여 있었고 그들을 고문하는 사람들과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 집 주인은 두 얼굴을 가진, ‘신사복을 입은 뱀’으로 불리는 ‘사이코패스’였던 것입니다. 사이코패스의 정신병질을 사이코 패시(psychopathy)라고 합니다.
당신이 작위적으로 만들어 믿던 하나님이 사이코 패시를 가진 사이코패스는 아니었을까요?
사람도 그런 사람을 보면 소름이 돋아 그 집에서 도망을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당신의 형제와 친구와 부모와 사랑하는 이들이 당신이 살고 있는 좋은 집 맞은편 집에 갇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죽기 전에, 천국에 가기 전에 당신도, 또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도 천국을 갈지 지옥을 갈지는 모른다고 배웠습니다. 아무런 증명 자료도 없는 자들이 ‘예천 불지’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근거 없는 공갈이며 협박입니다. 그 근거 없는 사이코적 공갈을 듣고 두려움을 느껴 모인 자들에게 돈을 요구하여 받아 내는 것은 명백한 ‘사기’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 - 보혈>
우리는 보통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보혈'이라고 말합니다. 보배로운 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피가 왜 보혈이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위의 율법이 왜 폐하였고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왜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알아야 그 피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을 '선치 못한 율례'와 '능히 살지 못할 규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또, 로마서의 바울의 말처럼 행위의 율법은 사람에게 '죄 있게' 하는 수단은 될 수 있었어도 '죄 없게' 하는 수단으로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세율법을 '죄 없게' 하는 수단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죄 있게' 하는 수단으로 주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 꾀를 내어 죄 있게 하는 수단으로 바꾼 것일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행위의 율법을 죄 있게 하는 수단으로 쓴 이유는 꾀를 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행위의 율법이 "선하지 못하다"는 말씀은 그것이 부정한 세상에 속한 상태에서 행하는 율례이기 때문에 선하지 못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지, 법 자체가 선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을 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구약시대에는 구원 받은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단지 사람이 선하지 못하게 쓴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율례를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바른 마음의 유지 수단으로 그 율례를 주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음이 포함된 속죄의 행위를 했어야 하는데, 사람이 행위를 하면서 마음을 넣지 않아 그 행위가 위선이 되어버려서 오히려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더 짓는 것이 된 것입니다.
차가 다니는 길에 횡단보도와 신호등을 설치했습니다. 빨간불에는 건너지 말고 파란불에 건너야 하는데 그렇게 정한 것이 행위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길을 보니 차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때 사람은 법을 무시합니다.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지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건 아니지!" 하고는 건너갑니다.
지금 이 위법하는 사람의 생각에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실은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의 급한 사정은 자기만의 '허상적'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법을 주신 것은 말씀을 드린 대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지, 규범을 만들어 제재를 가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그 법은 인생들이 당장 눈앞에서 급해 하는 것보다 더 큰 것, 즉 영이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지, 세상에서의 치리의 법으로써의 목적으로 그 법을 주신 것이 아니므로, 그 법에 대하여는 철두철미한 믿음을 가지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영이 살아야 한다는 애절한 필요를 사람이 가지고 있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들은 눈앞의 허상에 더 비중을 두면서 궁극적으로 영을 위하여 주신 법이 아니라, 자신의 육을 위한 법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바꾸어 자기를 합리화하는 논리를 펼쳤고, 그 위법을 합법화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즉, 인생들이 영이 사는 쪽으로 연구하고 논리적이 되었어야 하는데, 반대로 육이 살고 그 육적 배부름을 위하여 영적인 법을 육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연구를 했고 논리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장로의 유전인 '고르반'과 같은 나름의 법을 만들었고, 그 자체적인 규례는 하나님의 율법보다 우선이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거룩함에 나아가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신 잠언의 말씀을 세상에 속한 것과 관련된 윤리나 부 등에 관한 말씀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잠언을 거룩한 길로 가게 하는 말씀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고르반'은 치리자, 즉 공의 관장자가 자기 배부름의 유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빙자하여 사람들에게 종용한 규례입니다. 오늘날로 하자면 성전에서 그 관장자가 실제로는 '경영'이라는 장사를 하는 마음이면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전도를 명령하셨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모아 오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빌미로 세력을 확장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축소시키는 수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도란 본래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의 몫이며, 우리에게 전도를 명령하신 이유는 핍박을 받아 연단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잠언의 말씀에 "네가 만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전하는 것을 잘한다면, 그것은 나 하나님이 해야 할 일을 네가 대신해 준 것이므로 내가 더 많은 것으로 갚아 주겠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따라 핍박을 받으면서 전한 사람은 더 많은 지혜를 받고, 그 받은 지혜로 내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결과가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전도를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보고 "합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예수님은 형제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며, 나는 구원을 받아 영원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합쳐져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전도인 것입니다.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인생들이 행위의 율법을 변형을 시켜 도무지 그 행위의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길이 없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그 율법이 선치 못하고 또 능히 살지 못하게 하는 율법이라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율법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 '솔로몬의 행각'이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물론 복음서에도 언급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생들에게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 솔로몬이 받아 적은 성령의 법은 어떤 원리를 구심점으로 하여 그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원리가 바로 '공평'이라는 것과 '공의'라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어떤 원리에서 그리 되는 것인지 이유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시고 세상에 죄가 있게 된 책임, 그 죄의 근본에 있는 죄가 있게 한 원인 제공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객관적 논리상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고 선악과도 뱀도 사람도 모두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결자'는 하나님이고, '해지'하실 분도 하나님이신 것이 '공의', 즉 '하나님의 섭리의 이치상 바른 것'입니다.
또한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그것을 취소하고 다시 살게 하시려면 그 법을 낸 자신이 먼저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공평'입니다.
이번에는 이야기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왕이 법을 냈습니다. "간음하면 두 눈을 뽑아 버리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범법을 한 사람이 왕자였습니다. 왕이 난감해진 것입니다. 법을 내기는 했는데 범법을 한 것이 자기 아들이니 그 눈을 다 뽑아 버릴 수는 없고 해서 왕의 한 눈과 왕자의 한 눈을 뺏습니다. 그러면 결국 두 눈을 뺀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 법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래야 그 법을 낸 왕의 권위가 살아 있게 되는 것이고, 왕과 백성 사이에 공평한 것이 되어 왕의 법은 여전히 절대적인 권위가 살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평이고 공의입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만드시고 "먹으면 죽는다" 하셨는데 그 자식이 먹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죽일 수 없어서 자신의 한 눈, 즉 "죽으리라" 한 것을 취소하고 자신의 한 눈을 빼신 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며, 나머지 한 눈, 즉 법을 주시고 사람에게 그 법을 지키게 하는 고통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자식의 눈을 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죽으리라." 한 법이 취소된 상태에 들게 되어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 한 눈을 빼는 것이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눈이란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두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 살고 싶다는 마음과 구원 받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그 두 마음, 두 눈 중에서 세상에 속한 행사를 악하다고 하면서, 한 눈을 빼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에서도 잘 살고 천국도 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에게 핍박을 받으면서 길을 갑니다. 그것이 자기가 져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들이 법을 변개하고 구원을 받을 생각은 않고 그 자기의 한 눈을 빼는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주의 보혈"입니다. 자기의 피를 흘릴 생각은 안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신 것은 구원의 길이 없어졌을 때 그 구원의 길이 없어질 것을 미리 아시고 준비해 두었던 것을 이제 자신의 한 눈을 빼내는 고통을 감수하고 길을 여셨다는 뜻입니다.
그 길을 여시고 완성된, 예수님이 다 이루시고 완성하신 새 법이 사람이 변개가 불가능한 '마음의 법'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성령의 법'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솔로몬이 받아 적은 잠언의 '어미의 법'입니다. 성령은 낳음의 근본이 되시는 분이므로 '어미'라고 잠언은 표현한 것입니다. 쉽게 생각을 해도 인생의 어머니가 낸 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가 무슨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는 법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두신 법입니다.
마음의 법은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것을 행위로 증명해야만 실제로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인정을 해주는 규칙이 마음의 법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길을 직접 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세상에 속한 것이 악하다고 믿고 있다면 그 길로 가는 실천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는 실천을 행하면 그 길이 싫은, 세상에 속한 자기의 한 눈을 빼고 싶지 않은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단 것과 같이 나를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법은 마음과 그 마음으로 인한 실천이 뒤따를 때에만, 그 법을 지킨 것이 되는 규칙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자신의 한 눈을 빼는 '실천'을 하시고, "너희가 살고 싶다면 너희도 이렇게 해라." 하고 예수님이 본을 보이시고 죽는,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눈을 빼는 길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내가 간 길로 와라." 하신 것입니다. 그 눈을 빼는 과정에서 흘리신 희생이 바로 '피'입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나의 원'대로 그 피를 흘리지 않으셨더라면, 즉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라는 말에서 나의 원대로 잔이 예수님을 비켜 갔다면 구원의 법은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길로 가신 표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이기 때문에, 그 피가 우리에게 '보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아버지의 원대로'를 '실천'하심으로 공평의 원리에 입각한 성령의 법을 인생에게 주시는 업적을 완수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이 그 길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것은 나의 피다. 마셔라." 하신 것의 피는 "내가 피를 흘려 이룬 법이다. 지켜라!" 하시는 것이고, 잠언에서 "나 지혜"는 말하기를 "내가 포도주를 준비했으니 와서 마시라!" 하는 것입니다. 본래는 영을 살게 하지 못하던 미리 준비해 놓았던 '물'인 잠언을 구원의 법인 성령의 법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이 여섯 개의 항아리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의 대언의 영으로 된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요한계시록]입니다.
하나님의 한 눈을 빼는 과정에서 정말로 뺐다는 '증거'가 바로 피이므로, 우리도 우리의 한 눈, 영이 살고자 하는 '한 마음'과 육이 잘 살고자 하는 또 '한 마음' 중에서, 육이 잘 살고자 하는 한 눈을 빼는 과정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같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흘리는 피, 곧 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것이 우리가 나의 눈을 빼고 흘리는 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산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행하는 것은 나의 피 흘림을 하나님 앞에 증거로 보여 드리는 행위입니다.
"제가 이렇게 세상에 속한 것을 가지고자 하는 제 마음, 제 눈을 빼려고 예수님처럼 세상의 행사가 다 악한 것이라고 증거 하면서 고통을 당하고, 예수님처럼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았으니 저도 구원해 주십시오." 하고 증거를 보여 드리면, 하나님이 그 증거를 보시고 거룩함에, 즉 세상에 속하려는 나의 마음, 내가 세상에서 고민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마음이 생기는 근원을 제거해 주시려고 '지혜'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보혈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피 흘리신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고 표현한 말씀이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사람의 어린 양"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린 양이란 제물입니다. 하나님이 내신 법을 취소하는 제물로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삼아진 것이지, 사람의 죄를 제거하는 용도로 어린 양으로 삼아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자'인 하나님의 법, 즉 '죽으리라' 하고 법을 내신 것에 대한 '해지'의 수단이며, 사람을 위한 것은 그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길만 연 것이 아니라 내 죄에 대한 부분까지도 다 해결을 보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내가 간 길로 오라!"고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또 핍박을 받으면 기뻐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예수 믿으면 구원 된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나를 위해 흘리신 것이다." 하는 말 속에는 "나는 피를 안 흘려도 된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나는 안 따라가도 그 길로 갔다는 사실만 믿고 있으면, 내 죄는 다 사해진다." 하는 뜻이 들어 있고, 또한 그 뜻으로 '보혈'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는 보배로운 피라고 말하며 "오, 주의 보혈!"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보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이제는 나의 피가 나에게 보혈이 되도록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길에서 흘리는 나의 피가 곧 '나의 보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자, 힘써 알자>
제가 어떤 분께 그분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저는 우리 엄마를 잘 압니다, 절대 그럴 분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더군요.
무엇을 근거로 자기가 엄마를 안다고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지금까지 살면서 보고, 듣고 겪어 본 것을 근거로 안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얼마나 아십니까?
엄마를 알듯이 하나님을 알 수도 있기에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호세아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힘을 쓰면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힘을 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은 ‘성경’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들어 있습니다.
그 근거가 곧 “살면서 겪어 본 엄마”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경을 겪어 보아야 하고 성경을 겪어 보려면 당연히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는 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온전히 읽어 내지 못하는 공의 관장자들은 여러 가지 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모르지만 완전하다”, 혹은 “축자영감설은 엉터리다”, 혹은 "완전하기는 한데 히브리어나 헬라어 번역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읽을 수 없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제대로 했으니 이 성경만이 완전한 성경이다.“
급기야 길을 잃은 공의 관장자들은 전혀 알 수 없는 내용들에 대하여 해석들을 내어 놓으면서, 하나같이 등장을 할 때는‘세계 최초’,‘세계 제일’,‘세계 유일’이라는 단서와 함께 해석에 대한 신기술들을 발표하고 자기를 높이며 한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 세대의 행태입니다.
그들이 신기술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세계 최대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책이지만 세계인 누구도 그 뜻을 읽을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신학자, 관장자들뿐 아니라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찾는 자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알 수만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거짓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성경이 진리라면 다음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모두 마음으로 알고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가복음 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누가복음 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한복음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복음 15 :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한복음 15 :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 :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예수님을 자기 마음 안에 거하게 하였고, 예수님도 그의 마음 안에 거하셨으며,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예수님을 믿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섰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 안에 거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아버지 안에 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내 마음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 될까요?
내가 사랑하는 자식이나 부모나 형제는 내 마음 안에 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과연 내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사람들의 마음에 나도 있는 것이 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상대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에 그 마음 안에 자기에게 유익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자기 마음에 두므로 내가 타인을 마음에 두고 있어도 타인은 그 마음에 나를 두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상대적인 사고를 따라서 타인을 마음에 두거나 두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자신 있게 말을 하려면 그 둘 사이에는 반드시 공동의 유익을 줄 수 있는 매개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의 매개원은‘아버지도 자식을 얻어 좋고, 나는 흙이었다가 하나님의 자녀인 신이 되어 좋은’그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매개원의 변수라고 할 수 있는 기준, 즉 누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기에 합당한 것일까에 대한 기준을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앞서서 읽으신“아버지 안에 거하는 목적”을 이루는 방법으로“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이미 잘 알고 계시다시피 공평의 원리에 따라 결자해지를 행하신 십자가로 완성하신 완전한 법, 즉 성령의 법이‘피’이며, 복음서의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의 삶 속에서의 가르침이‘살’입니다.
살이란‘갑이 쓴 글을 뼈대로 하여 살을 조금 붙였다.’라고 말을 할 때의‘살’과 같은 의미입니다. 실제로 복음서는 성령의 법인 잠언의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비유로 설명하신 ‘살’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카페의 [섭리에 관한 이야기]가 선생님의 살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서의 상반과 차이의 필연성을 증명 받아 그 살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성령의 법의 실체를 알아서 피를 마시게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 의인화된‘지혜’는 말하기를“잔치를 차렸으니 와서 먹고 마시라”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외국인과 펜팔로 친구를 사귀기도 하였고, 오늘날에는 메일, 전화로 친구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상대방의 감정을 알 수 있습니다.
잘 아는 사람 혹은 얼굴을 전혀 모르는 사람과 편지나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알 수도 있고, 또 볼 수도 있습니다. 서로 마음을 어느만큼 열고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요.
하나님은 살리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하나님은 영이시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이란 ‘마음’을 뜻합니다. 말씀 안에 가르치시는“하나님을 볼 것이요”라는 말씀은 그렇게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에 서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숨김없이 성경 안에 모두 있으므로 내가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내 마음에 감추는 것 없이, 즉 얼마만큼 마음을 열고 보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5:25]“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들음’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보고, 듣고, 알 수 있는 분입니다.
내가 엄마의 마음을 읽고, 보고 아는 것이 가능한 것과 같이 우리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읽고, 알 수 있는 방법이 바로“성령의 법”입니다.
어느 나라에나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동네든지 나름의 규례를 가지고 있으며, 그 규례와 법을 알면 그 동네의 윤리적, 전통적, 사회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법을 읽으면 하나님 나라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가 있고, 그 법을 만드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도 있으며, 들을 수도 있고, 직접 본 것처럼 알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자, 힘써 알자”라고 하는 선지서의 말씀에는 지금까지 설명 드린 모든 내용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하나님을 어떻게 보나?”하는 막연한 의문을 가지고 계셨다면 이제 분명하게 그 답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막연하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법의 본뜻도 아직은 잘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부르셨고, 보여 주셨고, 길을 가르쳐 주셨으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십자가 앞에 죽기까지, 자기를 부인하는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시된 방법을 따라 제시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까페 "갈릴라이아"에 있는 글입니다.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놓은 성경 까페입니다. 님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