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도움이 될까하여 아래의 글을 올려 드립니다. ^^
<이스라엘아 들으라>
[마가복음 12장]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두 계명의 뜻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그 바탕이 무엇이냐 입니다.
두 계명을 지키되, 그 바탕은 반드시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주”이기 이전에, 먼저 이 말씀을 듣는 자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곧 허상을 버리고 야곱의 길을 가서, 아버지의 아들이 될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께 매달려 끝내 “하나님이 상대해 주신 자”곧, 이스라엘이 된 자가 들어야하는 계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이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유대교인이든, 천주교인이든, 개신교인이든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야곱도 아닌 상태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야곱처럼 마음에서 허상을 버리는 일이 먼저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버리고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하였습니다. 후에 제자가 된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이전의 자기를 돌이켜 봄이 없이,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고,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되는 방법이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는 첫걸음입니다.
그리고 그 걸음을 뗀 후로 야곱은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씨름이란 상대를 넘어뜨리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너는 조건이 안 된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조건이 안 되는 것은 나도 알고, 또 나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는 것이 곧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부족한 자기를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때 하나님은 ‘장자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자’인 야곱을 ‘하나님이 상대해 주신 자’, 곧 장자인 이스라엘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장자란 ‘맏이’이며, ‘맏이’란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된 내가 가장 처음 맺는 열매는 바로 ‘자기’입니다.
“처음 익은 것은 다 내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위하여 제자들과 야곱은 일단 자기가 버릴 수 있는 허상을 모두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허상을 버렸다고 해서, 중이 되기 위해, 신부가 되기 위해 출가를 했다고 해서 그 마음에 허상을 향한 마음도 지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 성령의 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가 되게 하는 방법인 성령의 법은, 여전히 인생의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는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하여, 즉 유한한 것에 마음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내용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법에 잠언이라는, 찌르는 말씀이라는 제목을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깨끗함입니다. 아주 작은 흠이라도 바늘로 찍어내, 온전히 거룩한 존재, 영원한 존재가 되게 하는 가르침이 잠언인 것입니다.
이 잠언을 모르면 야곱이 되었더라도 이스라엘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되었다고 다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면 중도 신부도 수녀도 다 이스라엘이 될 수 있어야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양 상, 허상을 모두 버린 야곱이나 제자의 모습은 갖추었어도 이스라엘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고 따라갈, 인생적 사고로는 납득이 안 되는 믿음의 법, 마음의 법, 성령의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누구도 믿음으로, 누구도 믿음으로...하는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성령의 법을 말하면서 그것을 믿음의 법이라고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갖는 마음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믿음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을 살리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므로 영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게 되는 것인지, 어떻게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에 대하여 ‘믿음’ 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그 ‘방법’이 있어야 믿음을 가진 ‘따라감’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믿음을 강조하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에 대한 믿음인지는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은 막연히 ‘성경’의 글귀에 대한 믿음이었고, 그 성경의 글귀가 가지고 있는 뜻에 대해서는 전하는 자도 듣는 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만일 알고 있었다면 당신은 여기에 와서 이런 글을 읽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분명한 것이 있다면 어찌 다른 것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어찌 다른 말이 들렸겠습니까,
흔히 목자라는 자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하여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신이 아닌데 어떻게 성경을 완전하게 알 수가 있나?” 만일 성경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완전한 방법이 있다고 적혀있지 않다면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라는 약속도 없는데 어찌 그것에 대하여 믿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 믿어봐” 라는 말은 그 말하는 자가 그 믿음이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할 뭔가가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분명한 것이 없으면서 믿음을 강요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명백한 사기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 법을 완성하실 것이고,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성령의 법을 토대로 한 가르침이었으므로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한 바울은 모세율법에 대하여 “죄를 없게 하는 법이 아니라 죄 있게 하는 법” 이라는 말도 했던 것입니다.
‘주’란 나의 전부를 좌우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 가 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생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라도 좇아갈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고야 어찌 듣는 자가 그 전하는 자를 ‘주’로 삼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로, 또 ‘유일한’ 주로 여기려면, 유한한 존재인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 곧 영원한 존재가 되는 일에 있어서 그 방법을 가지고 계신 분이 유일하게 하나님 한 분 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의 대상이 될 방법을 가지고 계셨고, 자신이 그 방법을 완성하실 것이었으므로 “유일한 주‘로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공의 실현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닫힌 구원의 길을 열었다는 주장으로, 그리스도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핵심인 것입니다.
이 설명은 성경 전체 구조를 설명하는 것과도 같으므로 최대한 축약하겠습니다.
1. '공의'란 창조자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생 사이'의 '일'에 대하여 '공평'하게 처리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2. 하나님이 만물과 사람을 창조한 것은 '자기가 좋기 위해서'가 먼저입니다. 그 일환으로 '자식을 얻기 위해서' 만물과 사람을 창조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었고, 또 하나님과 같은 '심성'의 상태로 만들었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사람이 본능적으로 '자식을 원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신'으로 '완전체'인데 사람은 흙으로 만든 피조물로 '불완전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피조물인 '사람'이 '신'이 되는 결과를 도출해야 합니다.
4. '천사'는 선의 코드만 가지고 있고 사탄은 악의 코드만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과 사람은 선과 악의 코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라는 피조물이 '자유 의지'가 없으면 '인형'에 불과하므로 '자유 의지'를 발현시킬 수 있도록 마음에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하였고, 그 선과 악에 대한 분별 기능을 발현시키기 위하여 '선악과'라는 금기 사항을 부여했습니다. (공의 실천의 일환입니다.)
선이나 악은 '상대성'을 가진 구분이므로 선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으로 악이 존재해야 합니다. '신'이라는 조건은 하나님처럼 선악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악을 행하지 않고 선만 행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5. 그래서 선악을 모두 부여하고 부여한 것을 가동시키기 위해서 선악과라는 상대적 악을 부여한 것입니다.
6. 그런데 사람이 '불완전체'이므로 '필연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고 역시 당연한 귀결에 따라 신이 아니면 거할 수 없는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신이 되는 훈련장으로 '입소'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7. 세상에는 선의 코드를 가진 천사와 악의 코드를 가진 사탄이 활동하게 하고 뱀은 사람을 그 근원인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임무'를 띠게 되었고, 천사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신으로 복귀하는 것을 돕는 임무를 띠고 파견이 된 것입니다.
8. 그래서 이제 선악을 모두 마음에 가진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서 악을 온전히 이기고 신의 상태가 될 것인가?'를 선택하는 '한 판의 권투 경기'를 하기 위해 '링 위에'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9. 그런데 '사람이 나면서부터 악한 것만 계획한다'는 성경의 기록처럼 악에게 패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로 일단 노아만 남겨 놓고 인류를 흙으로 '원 위치'시킵니다.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것입니다.
10. 그후에 하나님이 '이김'의 결과를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악을 이기는 방법인 '낮아짐과 비움'을 행하는 방법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모세율법입니다.
11. 하지만 사람들은 그 율법을 오히려 자기 배를 채우는 악의 수단으로 사용을 하면서 악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한 '행위의 율법'인 모세율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습니다.
12. 이제 다시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관장자들을 힐책한 것입니다.
13.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준비한 '히든 카드', 곧 '예비된 작은 광명'으로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마음의 율법'을 부여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신이 되게 하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율법을 부여하는 것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따라서 살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기는 한데 이것을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은 '공의'라는 규칙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라는 규칙으로써의 대전제를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 맘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는 하나님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14.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낸 '공의'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와서 이제 부여할 '마음의 법'을 따라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본'을 보이고 공의를 하나님 자신이 먼저 지키는 순서를 따릅니다. 그것이 육신으로 와서 '마음의 법'을 따라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악을 이기고 영이 사는 '시범'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그 법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로 따라가면 영이 살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공의 실현'이 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철회'와, 살 수 있는 길의 '부여'라는 두 가지를 충족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결자해지'는 공의라는 하나님의 뜻을 수호하고, '정녕 죽으리라' 한 법을 철회하고 살 수 있는 방법인 '마음의 법'을 부여하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그말은 "하나님의 공의도 지키면서 사람에게 신이 되는 방법도 부여하게 되었다."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공의 실현의 결과인 '부여'된 마음의 법의 실체가 있으면 되는데 문제는 기독교 안에 그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학 안에는 구원론이 없는 상태입니다.
# '공의 실현의 결과'로써의 구원론의 실체, 솔로몬의 잠언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32
*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누가복음 24:44
*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신약 성경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부여될 '완전한 법'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 기록입니다.)
이 새로 부여된 '마음의 법'이 바로 솔로몬의 잠언입니다.
마음의 법인 솔로몬의 잠언은 유태인들의 손을 통하여 미리 준비된 것이었으나 그 안에 있는 가르침의 논리가 하나님의 결자해지라는 공의 실현이 빠진 상태에서는 '마음의 법'이 될 수 없는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전체를 알 수 없으므로 낱개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잠언은 총 3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9장까지는 서론이고 10장부터가 본론입니다. 그런데 이 본론이 '한 구절'이 '한 법'으로 되어 있고 전체를 알아야만 한 구절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내용이 마치 '형이하학적' 처세술을 논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형이상학적 '마음의 법'을 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정작 지혜서라고 말은 하지만 그리스도의 공의 실현엔 관심 없는 유태인도 그 내용을 모르고, 공의 실현을 아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마음이 젯밥에만 향해 있으니 그것을 읽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지혜의 왕인지에 관하여는 오늘날 아무도 아는 바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역으로 잠언의 구원 논리는 신약의 십자가 사건의 기록만으로는 '결자해지'를 논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은 구약 안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신약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어서 객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 문학의 꽃이라고 불리는 '욥기'에는 바로 그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증거 기록이 있습니다. 이전 제사장인 '레위'에서 그리스도로 제사장직이 이월되었다는 증거 기록이 '하나님의 판결'로 명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책 역시 복음서의 비유와 같은 방식으로 '비유'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사용된 용어의 본래 의미를 모르면 읽는 것조차 불가능하여 등장인물인 욥과 세 친구와 엘리후와 하나님이 각각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왜 이 같은 말을 각 사람이 하는 것이고, 또 왜 하나님은 그같은 판결을 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도록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역시 유태교도 모르고 기독교도 이 내용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실현과 그리스도의 메시아 증명에 있어서 '욥기와 잠언'은 신약의 구원론의 타당성을 논증하는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 악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린 아기도 죄인인가요?"
원죄라는 말이 있으니 그것이 궁금하셨던 것입니다. 도무지 아기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답을 드렸습니다.
죄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악"이라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죄란 "본질적으로 안 좋게 하는 원인"이며 악이란 "본질적으로 안 좋은 것"을 뜻합니다.
가령, 아버지께서 한국에 계신다고 합시다. 그리고 아버진 "한국말"밖에 모르신다고 합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당신이 동일한 한국 사람이어서 당신도 일본말을 모른다고 합시다. 아버지께 가야 하고, 또 아버지와 교통도 해야 하는데 한국말을 쓸 수 있는 키보드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교통할 수 없는 일본말만 쓸 수 있는 키보드가 바로 "죄"입니다. 에덴 밖에 있는 인생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교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준법적 제사"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받으시니까요. 하지만 가인의 "비준법적 제사"는 "일본어 키보드"와 같습니다. 그것으로는 아버지와 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 있는 자식이 원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키보드를 이용한 채팅이며 의사소통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가 없는 것이 곧 "죄"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불법 안에 있다는 것, 죄 중에 있다는 것은 "나쁜 곳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소통 불가능한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그 자식에게 "좋음"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식은 아버지께서 그 "좋음"을 주실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한국말이 써지는 키보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죄란 그렇게 "소통할 수 없음"입니다. 그것이 "안 좋음"이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안 좋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은 본질적으로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안 좋음"임을 알고 "본질적 좋음"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선만 행하시는 분입니다. 인생이 좋아서 그저 인생만 사는 사람들은 아버지와 소통할 수 없는 "죄" 중에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안 좋음"의 상태는 아닙니다. 나름의 "좋음"에 취해 있기 때문에 일단은 "안 좋음"처럼 보이는 자기부인의 길과 자기십자가를 지는 길을 가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길에 대하여 싫음을 나타내는 것은 그들이 "나름의 좋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해 사는 것이 "좋은" 그들이 곧 "죄인"이지만 그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위에 살면서 "나름의 좋음"을 느끼며 살기 때문에 여전히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인들에게도 "좋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이 "본질적으로 좋을 수 없는 상태"임을 느낀 자가 본질적 좋음을 찾아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찾아진 하나님이 옳다 하심, 곧 "하나님의 의"에 자기를 스스로 묶고 본질적으로 좋은 좋음을 향하여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하나님과의 소통법인 한글 키보드를 가지고 아버지와 소통을 합니다. 그 소통하는 자가 곧 의인입니다. 물론 그 의인의 길은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그 힘든 길을 가는 자는 "본질적 좋음"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있기에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역시 "좋음"을 채우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다가 그 의인이 "악"을 행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악을 행한 악인은 "안 좋음"을 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악인도 자신의 "좋음"을 따라 악을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한 본질적으로 보자면 "안 좋음"이지만 악을 행한 그에게 있어서 "안 좋음"이 아닙니다. "좋음"입니다. 안 좋음을 스스로 택하는 인생은 아예 없습니다. 물론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새디즘을 가진 자도 "좋자고" 새디즘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그 역시 "좋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죄나 악이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 위에 인생들을 놓으시고 악인이나 선인이나 의인이나 죄인이나 모두 "좋음"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죄나 악은 "본질적 나쁨"이며 의와 선은 "본질적 좋음"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한 "죄" 중에서 "악"을 행하는 자는 본질은 어디로 갔든지 "당장의 좋음"만 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의’ 중에서 선을 행하는 자는 본질적 좋음을 추구하며 ‘당장의 괴로움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그것이 "안 좋음"이라는 생각, 혹은 "나쁨"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에서의 법 앞에서는 죄나 악이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죄나 악은 모두 "본질적 안 좋음"이나 당장 그것을 행하는 이들에게는 "좋음"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 좋음을 아는 자들은 일본에서는 필요를 못 느끼는 한국말 키보드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본질적 좋음을 모르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한국에 계신 아버지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키보드를 가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나쁨"이 아닙니다. 그저 "다른 것"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각각 다른 것을 가지고 각각의 "좋음"을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생들이 만들어 낸 "원죄"라는 용어는 죄나 악을 "나쁨"으로 상징되게 하였고, "아기에게도 죄가 있나?" 하는 의문을 만들어 내게 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은 그것이 성경의 내용이라도 이렇게 본질적으로는 "안 좋음"을 양산할 뿐입니다. "부정하다" 혹은 "거룩하다"는 말도 나쁘다, 좋다가 아니라, 부정하다는 것은 "본질적 좋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할 수 없는 상태다"이고, 거룩하다는 것은 "본질적 좋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상태다" 입니다. 모두 사람이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이루셨습니다. 그 세상 위에서 인생들이 어리석어 "안 좋음"을 만들어 냈을 뿐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의인은 이렇게 썩을 면류관 곧, 당장의 좋음에 대하여 절제를 하며 길을 가야 합니다.
사람을 불로 튀기는 지옥의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런 곳을 만들어 낸 인생들이 사는 세상이 곧 지옥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신 대로 그저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의 말을 잘 들으면 죽어서 천국에, 안 들으면 지옥에 보내시는 분이라고 배워 알고 계셨습니다.
매너가 아주 좋은 어떤 남자가 집을 한 층에 두 채를 가지고 있는데 당신을 그 둘 중에 한 채로 들여 보냈습니다. 들어가 보니 거기는 하얀 레이스 장식이 된 침대와 온갖 아름다운 색들로 치장된 집이었습니다. 먹을 것도 많고 장난감도 많아 나가고 싶지 않은 집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하며 지냈습니다.
그 방에서 지내던 어느 날, 가끔 주인 남자가 앞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앞집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앞집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집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묶여 있었고 그들을 고문하는 사람들과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 집 주인은 두 얼굴을 가진, ‘신사복을 입은 뱀’으로 불리는 ‘사이코패스’였던 것입니다. 사이코패스의 정신병질을 사이코 패시(psychopathy)라고 합니다.
당신이 작위적으로 만들어 믿던 하나님이 사이코 패시를 가진 사이코패스는 아니었을까요?
사람도 그런 사람을 보면 소름이 돋아 그 집에서 도망을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당신의 형제와 친구와 부모와 사랑하는 이들이 당신이 살고 있는 좋은 집 맞은편 집에 갇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죽기 전에, 천국에 가기 전에 당신도, 또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도 천국을 갈지 지옥을 갈지는 모른다고 배웠습니다. 아무런 증명 자료도 없는 자들이 ‘예천 불지’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근거 없는 공갈이며 협박입니다. 그 근거 없는 사이코적 공갈을 듣고 두려움을 느껴 모인 자들에게 돈을 요구하여 받아 내는 것은 명백한 ‘사기’인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사냥꾼의 올무에 잡혀 있던 새같이 도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까페 "갈릴라이아"에 있는 글입니다.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놓은 성경 까페입니다. 님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