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빛낸 사람(위인) 누가있나요??

부산을 빛낸 사람(위인) 누가있나요??

작성일 2008.05.18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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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빛낸 사람(위인) 좀 가르쳐 주세요~~

조금 급해서요~~빨리 부탁드려요~~

그림도 같이 부탁해여~~ㅈㅅ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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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장영실

조선 세종조의 과학자로 본관은 아산, 봉건신분제도가 철저한 당시 사회에서 동래현 기녀 소생의 관노 출신으로 뛰어난 과학기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정3품인 상호군 (上護軍)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최고 과학자중의 한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과학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제 련, 축성과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다. 이에 세종대왕은 여러 신하들의 강력한 반 대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을 발탁해 세종 5년(1423) 정5품 벼슬인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올 라 노예의 신분을 벗었으며, 세종14년(1432) 중추원사 이천(李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 수하고 천문의를 제작 감독하였다. 세종 15년(1433)에 호군에 올랐으며, 이 해에 혼천의 제 작에 착수하여 1년만에 완성하였다. 이듬 해 동활자인 경자자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에 힘썼다.

한편, 김빈(金빈)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제작 완성했다. 세 종 19년(1437)에 제작 착수 5년만에 천체 관측용 대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해시계인 앙부일구, 주야 겸용의 일성정시의,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다음해에는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의 옥루를 제작 완료하고 경상도 채방결감이 되 어 동(銅), 철(鐵)의 채광, 제련을 감독했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에 특진되었으나 세종 24년(1442)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의금부에 투옥, 장형을 받은 뒤에 파면당했다. 장영실의 이러한 과학적 결실은 그의 뛰어난 탐구정신에 기초한 것이지만, 또 하나의 역사적 배경으로 고려 이래 이어온 과학적 결실과 함께 조선왕조 개창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음 도 사실이다. 특히 천문역산학의 발전은 조선왕조의 개창이 천명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 을 표명하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2.문시환

부산시 연제구 연산동에서 1899년에 태어났다. 일찍이 동래의 동명학교에서 수학하던 그 는 교사 김병규의 교육에 크게 감화를 받고, 일제강점의 민족적 의분으로 3학년 때 무단가출하여 만주 안동현으로 갔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전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을 돕고 활약하다가 귀국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백산상회의 안희재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기미육영회의 외국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20년 동경정칙영어학교에 유학하 여 2학년과정을 수료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대학에 입학하였다.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 의에 경남기성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후 의열단에 가입하며 단장 김원봉 등과 협의한 끝에 구여순, 강홍렬, 김정현, 오세덕, 배치문과 같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의 파괴와 총독 등 요 로대관 암살의 임무를 띠고(이미 1,2차 계획은 실패) 문시환은 3차 계획으로 파견되었다. 1923년 10월 문시열, 강홍렬, 배치문 등은 일본과 신의주, 황해를 건너 국내에 잠입하였다. 김정현이 신의주를 지나는 열차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이어 구여순, 오세득이 체포 되었다. 문시환 역시 동년 12월 29일 경성 종로경찰서에 의해 체포되어 징역 3년구형에 징역 2년의 언도를 받고 2년간 갖은 고초를 겪고 출옥하여 광복 때까지 일경의 요시찰 대상자로서 행동에 자유를 잃은 생활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이 되고 정부수립 후 경상 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1973년 별세하였다.

 

3.박재혁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서 1895년에 태어났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전기회사의 전 차종업원이 되었다가 경부선 관역전의 어떤 무역상인의 점원으로 일을 보았다. 1917년 6월 주인에게 7백여원을 얻어 상해에 가서 무역업을 하다가 1918년 6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상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에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다짐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재차 상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서 무역업을 하는 등 독립투사 들과 사귀었다. 1920년 7월에는 의열단장 김원봉이 의열단에 입단하여 독립투쟁에 적극 나 서기를 권유하였으나, 가정형편상 주저하다가 8월에 김원봉이 재차 부르니 상해로 갔다.

의사는 김원봉으로부터 군자금 3백원을 받아 수많은 애국동지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기로 하고, 동년 9월 상순에 중국고서로 짐을 꾸리고 그 밑바닥에 폭탄을 감추어 상해를 떠나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9월 13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부산에서 동지인 최천택을 만나서 하룻밤을 환담하고 용두산에서 기념촬영을 한후 노모를 생각하여 망설이다가 큰 의(義)을 위해 의사는 나라를 위한 큰뜻을 이루기로 했다.

 

의사는 14일 하오 2시 부산경찰서로 가서 서장(橋本秀平)에게 면회를 청하니 전부터 안면이 있던 터라 면회 가 허락되었다. 박의사는 2층 서장실에서 서장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몇마디 인사와 환담을 나누다가 진기한 고서를 구경시켜 준다고 이책 저책을 꺼내 들고 보여주는 동 안에 마침내 맨밑바닥에 감추었던 전단을 집어 서장앞으로 던지고 "나는 상해에서 왔다.

 

네가 우리 동포를 잡아 우리의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나는 오늘 너를 죽이는 것이다"라고 꾸짖고 폭탄을 들어 마주 앉았던 탁자 한가운데 메어다 붙였다. 굉장한 폭음과 함께 다같이 쓰러지니 서장은 오른쪽다리에 중상을 입고 혼절했으며 의사도 다리에 중상을 당하여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으나 우선 일경이 병원으로 보내서 응급치료를 받게한 후,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채 재판정에 끌어냈다. 부산지방법원에서 사형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고, 다시 상고하니 경성고등법원 에서 사형언도로 형이 확정 됐다.

 

대구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그는 그동안의 혹독한 고문과 폭탄 상처로 폐병까지 발병한지라 하도 고통이 심하므로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손으로 죽겠다"고 결심하고 단식하다가 형집행전인 1921년 5월 11일(27세)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최근에는 의사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업회에서는 어린이대공원 내에 동상을 건립하여 의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4.박차정

박차정 의사는 일제시기의 항일독립운동 전선에 참여한 맹렬히 활약한 이었다. 1910년 5월에 동래 복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 후 민족의 비참상을 보다 못해 1918년에 한통의 비장한 유서를 남긴채 자결하고 그후 오빠인 박문희는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항일독립전쟁에서 활약하였다.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한 박차정은 어느 학생보다도 민족의식이 투철하여 항일학생운동의 선봉에 서서 활약하였다.

 

1929년 3월 동래일신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약 2년동안 동래청년연맹의 부녀부장 일을 맡아 보다가 21세때 서울 근우회 선전부장이 되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 때 항일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체포, 투옥(서대문 형무소)으로 모진 고문을 받아, 출옥 후 꼬박 누워 한달 동안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중국으로 망명한 둘째 오빠 박문호가 밀파한 사람이 전하는 지시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 홍성하의 집에 숨어 망명의 기회를 엿보았다.

 

드디어 상해 인육시장으로 팔려가는 여인들 속에 끼어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 하는데 성공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유지들의 도움으로 북경 화북대학에 입학, 졸업 하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하여 독립전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때 큰 오빠 박문회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녀는 여자 의용군을 모집하여 대장이 되어 곤륜산전투에 서 일군과 격전끝에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중국의 이숭인 장군과 임 시정부의 조소앙 선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각각 중국 신문에 추도문을 실었다. 그녀는 실로 조국독립애의 뜨거운 혼을 갖고 살다간 한국이 낳은 위대한 애국 여성이었다. 최근에 박차정의사의 이러한 항일운동을 앙양하고 기념하고자 박차정의사 숭모회를 중심으로 추 모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5.안희제

1885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출생한 백산은 부산 최초의 무역회사 였던 백산상 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상인, 기업가가 아니라 민족자본의 육성자였고, 민족교육의 선구자였으며, 민족사상의 고취자로서 항일독립투사였다. 1905년 보성전문에 입 학하였다가, 1906년 양정의숙에 전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다.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고향인 의령에 의신학교,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설립하고 윤상은이 설립한 구포의 구명학교에서 2년간 교편을 잡았다.

 

1911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 정착하여 최병찬과 『독립순보』를 간행 하였다. 1913년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1917년 구포의 윤현태와 자본금 100만원으로 백산무역주식 회사로 개창하였다. 백산은 국내지주들이 기부, 기탁한 자금의 어음을 경남은행 본점에서 할인하여 상해로 송금하는 책임을 도맡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백산상회는 표면상으로는 순전히 상업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리기관인 것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해외독립운동의 국내 연락과 그 자금공급을 목적으로 설립된 민족운동의 국내후원기관이었다.

 

1927년 경영난과 일제의 탄압 및 방해로 해산될 때까지 독립운동의 자금조달과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락 등 국내에서 지원하는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백산상회를 중심 으로 1919년 11월경 부산부에 거주한 한국자본가들이 기미육영회를 조직하고 한국청년들 중 수재를 선발하여 일본 기타 외국에 유학시켜 학비 등 장학금을 지급했다.

 

1927년경 그 는 백산상회가 해산된 후 서울에서 『중외일보』를 경영했으며, 1933년에는 만주 동경성 에서 튼튼한 독립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제의 토지 강탈로 농토를 잃고 아사지경을 헤매고 있던 국내의 실농민을 이주시켜 이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발해농장을 경영했다.

 

아울러 농민들이 거주할 주택을 건설하며 민족교육의 보급과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발 해학교를 설립하고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 1931년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많은 활동을 하던중 1942년 10월 일제가 대종교 본부를 습격하여 윤세복 등 간부 20여명을 검거한 대종 교사건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43년 7월 31일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으나 동년 8월 3일 59세를 일기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아울러 부산시에서는 그의 독립정신을 그리기 위하여 원래 백산상회가 있던 곳에 기념관을 만들어 선생의 유품과 관련 기록들을 전시하고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여러 학술활동도 개최하고 있다.

 

6.윤현진

경남 양산군 소토리에서 1892년에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고는 15세에 구포 구명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고, 일본 명치대학에서 많은 동지들과 사귀고 신문학을 배웠다. 그러나 숨가쁘게 돌아가는 조국의 현실을 바라볼 때 자신의 사명감을 더한층 느끼지 않을 수 없어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의춘양행을 설립했다. 의춘양행을 통해 소비조합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상품을 배척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이것이 최초의 소비자운동이었다. 또한 안희제와 손을 잡고 백산상회를 설립, 독립운동의 국내외 연락과 독립운동 자금조달에도 크게 활약했다. 그리고 26세때 일시 구포 경남은행의 총책임을 맡기도 하고 또 동아일보 창립때에는 양산의 일가친지들을 설득, 6명을 발기인으로 참여시켰다.

 

그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구국항쟁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그해 4월에 애국지사들과 같이 상해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가장 어려운 자리였던 재무 차관 임무를 맡아 공채를 발행하고 또 그의 명의로 독립군의 자금이 백산상회의 비밀루트 를 통해 입금되었다. 그는 여순, 상해간을 자주 왕래하면서 돌아올 때에는 한약 원료를 싣고오고 갈 때에는 빈 배로 가는 것이었다.

 

그의 재무차관으로서의 눈부신 활약은 오늘날 많은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이같이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하고 활약하던 그의 몸에는 피로가 겹치지 않을 수 없었다. 병마에 시달리던 그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21년 불과 30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상해의 애국동지들은 조국독립의 새로 운 각오를 비통의 눈물로 다지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는 우리 고장이 낳은 위대한 애국자였으며, 1962년 국민훈장을 추서하였다.

 

7.장건상

장건상(張建相)은 경상북도 칠곡에서 1882년 12월에 태어나 1883년 부산 좌천동으로 이주하여왔다. 선생은 좌천기(佐川奇)라는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다 신학문을 가르치던 육영제에서 12년간 수학하였다. 이후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 법학과를 졸업 했다. 1919년 4월 22일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고 외무부 위원이 되었으며, 동년 7월 1일 대한적십자회가 상해에서 창립되어 상의원이 되었다. 1919년 의열단의 기밀부 요직을 맡아 활약하였으며, 1921년 4월 19일 3.1운동이 발발했을 때 미국에 있던 이승만 등이 미국정부에 우리 나라를 위임 통치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 알려지자 임정은 이를 크게 성토하였다.

 

1921년 5월 임정을 전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소위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길립, 원세훈, 신숙 등과 조선공화정부를 북경에서 조직하고 외무총 장으로 선임되었다. 1921년 8월 고려공산당에 입당, 1924년 상해임정 외교총장으로 있으면 서 의열단인 이종암 등의 입국 활동시 필요한 혁명선언서 신임장과 위엄장을 교부하였다.

 

1926년 10월 28일 북경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의 취지문을 발표하고 7인 집행위원중 1인이 되었으며 대표 조성환의 명을 받아 남지나에 특파되어 선전에 주력하였다. 1927년 의열단 제3기 간부훈련을 마치고 민족혁명 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다시 조선민족혁명당 원으로 상해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1942년 2월 임시의정원의 개헌에 따라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이 선출되고 국무위원에는 이시영을 비롯 14명중 1인으로 선출되어 학무부 장이 되었다.

 

1942년 8월 4일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선임, 1942년 11월 17일 임시국무위원회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43년 10월 30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인도공작원으로 파견되도록 중국 국민당에 신분보장을 요청했으며, 1944년 4월 임시의정 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공적들을 기리어 1986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8.최상훈, 변봉금

최상훈은 동구 좌천동에서 1868년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고 26세 때 관내 부주사가 되었다. 이어 한성일어학교를 졸업하였다. 중국어, 러시아어에도 익숙하였다. 한때 일본군의 통역관으로 선발되어 만주 심양에 파견되었으며, 안중근의사의 거사에 부부는 무한한 감격에 몸둘바를 몰랐으며 이때부터 최상훈의 본격적인 항일독립투쟁을 시작되었다. 일본군 사령부의 기밀 지도를 가지고 독립운동의 동지들과 접촉 합류하였다. 당시 북간도의 군사 단체인 의군부 헌병대장에 임명되고(1919), 북로군정서(총사령관 김좌진)에서 이범석과 같이 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다가, 그후 약 10년간 만주에서 항일전선에서 분투하다가 시베리아 치타지방에 여행중 일본밀정에 의해 암살되었다. 변봉금은 1880년 동구 좌천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9세 때 최상훈과 부산진에서 결혼하였다.

 

만주에서 소식이 끊어진 남편을 두고 귀국할 때 변봉금은 집 한채를 사서 하숙업을 시작하였다. 이 하숙집에는 당시 독립운동에 뜻을 둔 젊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는데 그중 강홍렬 (3.1운동 당시 휘문고보 학생대표, 의열단, 광복후 경상남도 반민특위위원장), 김법린(독 립지사, 광복후, 문교부장관), 김효석(임정요인 광복후 내무부장관, 납북) 등이 자주 출입 하여 어머니와 같이 모셨다. 출옥한 동지들을 보살피고, 3.1운동이 일어나자 감옥에 수감 된 이들의 뒷바라지와 연락책 역할로 마다하지 않았다.

 

한편, 독립지사들에게 숙식을 제공 , 숨겨주기도 하여 여러모로 지사들의 활동을 도왔다. 자녀로는 1남1녀를 두었는데 1남을 먼저 잃고 1녀와 함께 있었으나 1녀마저 잃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1920년 고향 부산에 옮겨와서 수영구 수영동에서 애국지사 박희창과 함께 살았다. 과거부터 접하였던 강홍일, 최천택, 김범부, 이기주 등도 자주 찾았으며, 특히 영남의 애국지사중 그와 교분이 없는 이 가 없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였었다. 1958년 별세하였다.

 

9.한흥교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1885년 11월에 태어났다. 1910년 일제에 강점 당하자 일본 강산 의학전문학교 졸업후인 1911년 10월에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혁명군 구호의장으로서 소주, 진강 등 전선에서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1912년에는 북벌혁명군 홍십자회 대장으로 피 명되어 활동하였으며 항주 및 북경 의학전문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재직하였다. 1912년 상해에서 동제사 조직에 참여하고, 의료를 전담하였으며, 1914년 상해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이후 일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신채호와 함께 중외통신사, 전광신보사 창립에 참여하고 노령, 미주, 중국 각지에 신문을 발송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25년 6월에는 북경에서 원세훈, 송호 등 동지들과 선두자사를 조직하고 기관지 "앞잡이"를 발행하는 등 중국국민과 연합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 한, 중연 합으로 "타도일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5년에는 북경, 천진 등을 돌아 다니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산서성 대원에 정착하여 대동병원을 개업한 뒤 항일운동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 하였다.

 

10.고구마 전래자 조엄

조엄의 호는 영호(永湖), 풍양조씨로 영조 14년(1738) 20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 음보(陰補)로 내시교관 세자익위사시직을 지내다가 영조 28년(175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간원 정언에 올랐다. 이어 사서, 홍문관 수찬(修撰),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등 을 역임하였다. 영조 33년(1757) 7월 외직인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가, 영조 35년(1759) 정 월 퇴임해 갈 때까지 많은 치적을 쌓았다.

특히, 동래부사 재임시 임진왜란 때 다대첨사로 순절한 윤흥신이 충렬사에 배향돼 있지 못함을 보고 유성룡의 『징비록』과 신경의 『재 조번방지』를 참조, 윤공의 사적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어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1759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했다. 부임하자 곧 윤흥신공의 사적을 채방하여 그를 표창할 것을 장청(狀請), 윤공을 증직키 위해 노력하였다.

경상도관찰사 당시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임기를 마치고 내직으로 돌아와서는 대사헌 부 제학 예조참의를 지내 영조 39년(1763) 7월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갔다. 통신사의 여정에 따라 대마도에 들렀을 때 고구마를 보고 그 종자를 얻어 바로 수행원을 통해 부산진으로 보내고 그 보관, 저장재배법을 알렸다. 이듬해인 1764년 7월에 돌아올 때 재배저장법을 익 히고 그 종자를 갖고와서 동래와 제주도지방에 시험삼아 심게 한 것이 우리나라 고구마의 기원이다. 그 재배법을 알리기 위한 저서인 『감저보』또한 당시 동래부사였던 강필리에 의해 완성되었다.

 

귀국 후 공조판서, 동지성균관사, 지의 금부사, 이조판서, 홍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43(1766)에는 팔곡 구사맹의 『조망록』에서 윤흥신공의 사적을 더 욱 자세히 조사, 다대첨사 윤공(尹公) 전망사적서(戰亡思蹟敍)를 지어 윤흥신공의 충절이 인멸되지 않게 하였다. 저서로는 『해차록』 『해행총재』가 있으며, 시호는 문익공이다.

 

11.고구마 재배자 강필리

강필리의 자는 석여(錫女), 진주강씨로 숙종 39년(1713) 전라도 강진에서 태어나, 영조 23년(174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그는 영조 40년(1764) 8월에 동래부사에 부임하여 영조 42년(1766) 11월까지 재임하였다. 그는 동래부사재임시 고구마재배 외에도 동래온천에 새로운 온천을 파서 2개의 목욕탕을 만들었다. 또한 다대포 윤공단의 설단(設壇)에 즈음하여 『윤공사절기 (尹公死節記)』기술, 윤흥신 등의 충렬사 배향을 주장하는 등 임진 선열의 추모작업에도 남다른 정성을 보였다. 수령 칠사(七事)를 밝게 처리하여 고을의 부흥에 애썼다. 고구마가 우리 나라에 전재된 것은 영조 39년(1763), 일본에 통신사로 간 조엄이 그 종자를 얻어 부산진에 보낸 것이 효시이다.

영조 40년(1764) 8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강필리공은 조엄이 보낸 고구마종자를 받아 이 의 재배에 성공을 보았는데 이것이 또한 우리나라 고구마재배의 효시가 된다. 거의 이와 같은 시기에 이광려, 강계현 등도 씨고구마를 얻어 재배를 시도하였으나 성공치 못하고 오 직 부사가 동래에서 심은 고구마만 성공을 보았던 것이다. 강부사는 곧 동래부민들에게 심기를 장려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저술을 통해 그 재배법을 일반인들에게 까지도 지도 보급 하였다.

 

부사의 저서인 『감저보=일명 강씨 감저보』는 고구마재배법과 저장법에 관한 실 험적기록으로 훌륭한 육종서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고구마재배의 길을 열었다는데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감저보는 후일 순조 13년(1813) 김장순에 의해 『감저신보 =세칭 김씨 감저보』로 이어지고 순조 24년(1824)에는 당시 호남순찰사였던 대실학자 서 유구에 의해 『종저보』가 편찬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12.국방을 튼튼히 한 정언섭

정인섭의 자는 공리(公理), 동래정씨로 숙종 12년(1686)에 태어났다. 숙종 43년(1717) 사마 시(司馬試)를 거쳐 영조 1년(1725) 증광문과에 장원급제,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727년 사 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김일경 등을 처벌할 것을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다. 그러나 영조 4년(1728) 김일경의 여당인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영조는 사헌부 지평으로 발탁, 그후 동래부사, 충청도관찰사, 동부승지, 광주부윤, 도승지, 한성부우윤,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호조, 예조의 참판을 지냈다. 영조 17년(1741 동지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 나아가 많은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영조 24년(1748)에 별세하였다.

정언섭은 영조 6년(1730) 11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동래는 임진왜란 때 성이 함락된 후 1백 4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성터는 허물어져서 동래가 나라의 관문임을 중시하고 성을 수축할 것을 계획하고 정부에 건의하였다.

 

1731년 정월 축성의 재가가 내려지자 축성 공사를 시작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 현재 망월산 부근에 남아 있는 동래읍성 은 바로 동래부사 정언섭이 축성한 것이다. 공사가 시작된지 1백일이 좀 지나 4월에 길이 8리, 높이가 수십척이 되는 큰 성을 쌓았으며, 5월에 성문을 준공한 뒤 7월에는 문루를 완 성해 역사(役事)를 시작한 지 2백여일만에 견고한 성이 완비되었다. 성을 완공 뒤 수성청 (守城廳)과 수성창(守城倉)을 설치해 군비에 만전을 꾀하였다.

 

또한 공사 때 옛성의 남문터에서 부러진 창, 화살촉 등과 함께 출토된 유해들을 거두어 삼 성대 부근에 6개의 봉분을 만들어 이들을 안정시켜 주었다. 이 무덤들은 임진왜란 당시 장 렬히 싸우다 전사한 동래성민들의 무덤이며 이를 『6총묘』라 하고 뒤에 기를 추가하여 『 7총묘』라 하고, "임진전망유해지총" 동래의총이라고 불린다.

 

정언섭 부사는 군비를 완비 한 뒤 문교(文敎)쪽으로 방향을 돌려 시술제라는 제실을 짓고 고을 유생들이 학업을 익히 게 하였다. 이 밖에도 정언섭 부사는 관사인 연심당 건립과 청사인 교방, 구휼, 창고인 사 창, 고마청 주사 등을 중건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치적을 남기고 영조 9년(1733) 1월 만 2년 6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해갔다.

 

13.군비를 정비한 박사창

박사창의 자는 겸숙(兼叔), 반남박씨로 숙종 13년(1687)에 태어났다. 경종 1년(1721) 진사에 합격하였고, 영조 6년(1730)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영조 7년(1731) 지평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丞旨)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15년(1739) 8월 동래부사로 부임한 박사창은 임진왜란 후에도 여러번 왜인들의 작폐가 심한 것을 알고 먼 저 왜인들보다 우수한 군비를 갖춰야 한다고 판단, 동래부의 군사시설을 정비하였다. 군기 (軍器)로 흑각궁 7백 50장, 화약 1천 5백근, 화살줄 1백 2조 등 많은 무기를 새로 만들고 보완, 보수는 물론 군관청, 수첩청, 무사청, 이노작대(吏奴作隊) 등의 조직을 완비케 했다.

 

또한 왜인들이 작폐를 제어하기 위해 연향대청, 초량객사, 동래부객사 등의 시설 일체도 갖추었다. 그리고 조정에 글을 올려 왜관내 왜인들이 함부로 관내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용두산 외곽 은산에 복병막 등 동서남북에 각 2개소씩 설치, 복병막을 세운 산을 지금도 복병산 이라 불리고 있다. 그리고 박사창 부사는 1740년에 『동래부지』도 편찬하였다. 부산지방의 향 토사연구에 가장 풍부하고 정확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서문에서 부사는 산천의 험이(險吏)와 군량, 과갑(戈甲), 기치(旗幟) 등까지 상세히 기재,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다고 하였다. 영조 17년(1741 정월에 퇴임해 갈 때까지 1년 6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치적을 남겼던 것이다.

 

14.동래부사 고경명

고경명의 자는 이순(耳順)이고 호는 제봉(霽峯) 또는 태헌(苔軒)이라 하며 본관은 장흥이 다. 중종 28년(1533) 11월 30일 광주에서 태어났다. 시문에 능하여 명종 7년(1522)에 20세 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1등으로 급제, 진사가 되었고 명종 13(1588)에는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준재였다. 이후 바로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예문관의 전적(典籍),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다음 해에 외직 영암, 서산, 한산 등의 군수직을 역임하였다. 한편,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辯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고 승 무원판교를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던 것이다.

 

선조 23년(1590) 12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고경명은 이듬해 정월에 당시 일본에 통신사로 간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부산포로 돌아왔을 때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 난이 터지면 순국 할 각오를 이때부터 준비하였던 것이다. 동래부사 시절 조정에서 서인들이 제거될 때 사직 하고 광주 향제에 은거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29일 담양 향리에서 사서들 과 희맹하여 많은 의병을 모았다.

 

종사관 사제 안영, 유팽로와 더불어 50의 노구를 이끌고 선조의 행궁이 있던 평안도로 가고자 북상하는 중 금산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7월 9일 장렬히 순사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예조판서를 추증하였고 뒤에 좌찬성에 가증되고 시호 를 충렬이라 하여 광주의 표충사, 금산의 성곡서원과 칠백의총의 종용사 및 순창의 화산서 원에서 제향이 받들어지고 있다. 시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나 이름을 떨쳤는데 저서로는 『제봉집』 『유서석록』등이 있다.

 

15.동래부사 정현덕

정현덕의 자는 백순(伯純), 호는 우전(雨田)으로, 본관이 동래(東來) 라는 견해와 초계(草溪)라는 견해가 있다 . 철종 1년(1850)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리로 출발하였다. 철종 13년(1862)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 라에 다녀왔고 대원군이 집권하자 그의 심복으로서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원래 동래부 사는 대일외교의 실무의 책임을 갖고 있기에 정현덕은 평소의 소신인 위정척사의 정책을 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조선에 대한 유신을 통고하기로 결정하고, 1858년 12월 관인을 파견 서계를 전달하였다.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새로운 국교를 열기 위해 수 차례의 교섭을 펼쳤으나 단호히 거부하였다. 조선정부와 동래부의 강경한 태도에 일본에 서 정한론이 대두케 하였다. 부사는 일본의 침입을 염려하여 동래읍성을 수축케하여 군의 강화를 기하였다. 이어 이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대원군이 실각하자 그도 따라 파면되었 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형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대원군이 실각 함으로써 파면되고 유배된 뒤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16.민정중

민정중의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峰), 본관은 여흥이며, 많은 명사와 교류하며 많은 사람이 따랐다. 22세에 진사에 오르고 효종 즉위년에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세자시강원 사 서,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교리를 역임하였다. 호남어사에 임명되었다. 상서하여 소현세 자의 빈의 원을 풀어줄 것을 청하였다.

 

국인이 모두 애통해마지 않았으나 감히 진언하는자 없었는데 정중히 홀로 논하니 군인 모두 놀랐다. 현종 때에는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대사헌 을 거쳐 이, 공조, 호조, 형조의 4판서에 오르고 참찬(參贊), 의정부에 오르고 숙종 즉위의 다음해 숭정대부에 가해졌다. 후에 노론, 남인과의 대립에서 여러번 화를 입고 배소에서 졸하였다. 인현왕후는 정중의 제(第) 유중의 딸이다.

 

정중은 효종 9년(1658) 8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익년 3월 21일에 예조참의로 전직기까 지 약 7개월의 짧은 기간 동래부사에 취임하였으나 부사는 이때 임진왜란이 이미 60, 70년 경과하였지만 부산지역의 임진사적의 민몰(民沒)을 걱정하여 고로를 통하여 사료수집 정 리하여 『임진유문』을 남겼다.

 

그 이전의 우리측의 기록은 단편적이 잘 알수 없는 차에 이 기록은 사료적 가치가 높아 동래, 부산, 다대포 전쟁의 항쟁사를 구체적으로 알수 있으 며 또한 공신, 멸사, 민의 실태를 알 수 있다. 시호는 문충이라고 한다.

 

17.절조의 인물 이춘원

이춘원의 초명은 신원(信元), 초자는 입지(立之) 뒤에 춘원(春元), 함평이씨로 선조 4년 (1571에 태어나 인조 2년(1632)에 죽었으며 문신으로 절개가 남달리 뛰어났다. 선조 23년 (1590) 20세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26세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 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직되고 이듬해 정유재란때 광양 현감으로 남원싸움에서 왜적 과 싸워 위기에 빠진 우리군사들을 구원하기도 했다.

 

그후 여러 벼슬을 거쳐 광해군 5년 (1613)에 좌승지에 이르렀을 때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반대, 항론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 해 복직되어 병조참의에 올랐다. 광해군 9년(1617) 충청도관찰사로 재직중 대북파들이 인 목대비를 성궁에 유폐시키려 들자 이를 극렬히 반대하다가 파직당했다.

 

광해군 12년(1620) 지돈령부사로 등용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1623년 인조가 반정 하여 구신들을 등용할 때 그에게 한직을 맡게 하려 했으나 사양하고 은퇴했다. 동래부사 재임시는 목민의 일에 힘쓰는 한편 관내의 해운대, 태종대, 몰운대, 겸호대, 동대, 온정, 정 과정 등 여러 명승과 고적이 흐트러졌음으로 살펴 가꾸었다. 이 명승에 제목을 붙여 시를 지어 널리 알렸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동래지방은 15년 동안에 17인의 수령과 2인의 판 관이 교체되어 평균 재임기간이 1년도 못되는 형편이었으며, 임진왜란의 피해로 도탄에 빠 져 있었다

 

이러했던 동래가 대체로 평정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이춘원부사 시절부터였다. 선조 40년(1607) 7월 동래 부산의 곳곳을 답사하여 백성들을 위무하고, 그가 본 것을 시로 적어 문풍을 일으켰다. 그의 시는 인빈헌의 내주신영(萊州新詠)으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18.종두법의 지석영

지석영의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본관은 충주로 1882년에 식년문과 을과에 급 제했다. 전적과 지평을 역임하고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設)』을 저술했다. 1886년 장령 으로 시폐를 논하다가 1887년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892년에 석방 된 후 형조참의, 승지를 거쳐 1895년 동래부사 및 부산재판서 판사가 되었다. 동래의 동래 부사 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그뒤 그는 경성의학교 교장과 학부내의 국문연구소가 설치 되자 그 연구원이 되었으며, 1906년에는 『자전석요』를 집필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이 컸다. 그가 서울에서 1935년 2월 1일 별세하자 사회장으로 장의가 집행되었으며 그의 공덕 비가 1988년에 동래 금강공원 안에 동래부사 송촌 지석영선생 공덕비란 이름으로 세워졌 다. 그의 개화의지를 높이 산 것이다.

 

그는 1876년 수신사의 수행으로 일본에 갔던 그의 스 승 박영선으로부터 일본인의 「종두귀감」을 전해 받고 천연두 예방접종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종두를 얻는 방법과 접종하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는 1879년 부산에 있는 일본인 병원인 제생병원으로 와서 종두접종 방법을 배워 그해 겨울 충 주 덕산면의 그의 처가 가족들에게 종두를 최초로 실시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종두 시술이었다.

 

19.청백리 이안눌

이안눌의 자는 자민(子敏)이며, 호는 동악(東岳)이다. 덕수이씨로 선조 4년(1571에 태어나 선조 32년(1599)에 정사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형조, 호조, 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601년 예조정랑으로 진하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후 성균관 직강(直講 )으로 명나라 사신이 오면 이를 맞아들이는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기도 했다. 선조 41년 (1608) 2월 동래부사로 부임, 선조 42년(1609) 7월에 퇴임해갈 때까지 동래지방에 많은 업 적을 남겼다. 1601년 담양부사, 1613년 경주부윤을 거쳐 1615년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 調), 동부승지를 지내고 문신정시에 급제한 후 1671년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강화 부윤으로 나아갔다. 이 해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 사직하고 은퇴생활을 하다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등용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특진관으로 왕을 모실 때 조정의 시비가 밝지 못하고 상벌이 공평하지 못함을 극간하여 대신들을 공박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관직운은 그의 바른 말을 싫어하는 조정 대 신들에 의하여 배척됨으로써 점점 소외되어 갔다. 그러나 항상 고결한 심지를 지녀 그 뜻 이 광명정대하였다.

 

정묘화란 때는 인조가 피난처인 강화도에서 그곳 주민들이 강화부윤 의 치적을 칭송하는 소리를 듣고 그를 불러 강화유수직을 맡게 하였으며, 이어 형조참판을 거쳐 인조 9년(1631에는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다음해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 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추존(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제왕의 칭호를 내림)을 허 락받아 원종의 시호를 받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예조판서가 되어 예문관제학을 겸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청렴 근면한 관리 5명을 뽑는데 들어 숭록대부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 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다녀와서 죽으니,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죽은 후에 그의 검소한 생활로 청백리 에 녹선되었다. 선조 41년(1608) 2월에 동래부사로 그는 이곳 임진왜란 때 의사적을 조사 하며, 당시 정경을 담담하게 읊은 『행하유감』시가 전한다. 한편, 송상현공을 모신 사당 인 송공사에 휘진제를 올려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을 애도하였던 것인데 이때 지낸 휘진 제(諱辰祭=忌祭)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 바로 오늘날의 송공단을 남기고 단제가 끊이지 않 게 한 초석이 된 것이다.

 

20.안용복

독도를 둘러싼 일본과의 분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양국 간의 현안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일본은 영해의 직선기선을 주장하면서 우리와의 어업 협정을 파기하고 새 로운 협정을 맺을 것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영토확장을 기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 재의 상황에서 울릉도 영역이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한 안용복은 일찍이 영토문제의 중요 성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역사적 인물로 남게 될 것이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때 사람으로 동래의 수군이란 기록만 전할 뿐 그의 약력은 전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리측 사료인 『숙종실록』, 『비변사등록』등에 약간 언급되어 있을 뿐 오히려 일본측의 사료에 상세히 남아 전한다. 수군에 들어가 능로군 (能櫓軍)으로 근무 하였다. 숙종 19년(1693) 봄 안용복은 동래어민 40여 명과 울릉도 부근에 고기잡이를 나갔 다가 같은 해역에서 고기를 잡던 일본어부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중과부적으로 일본에 잡혀가게 된 안용복은 호오끼태수를 만났을때 "울릉도는 우리 영토다. 너희들이 함부로 고기 잡이 하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또 에도막부로 이송되어 갔을 때도 같은 항의를 하여 막부로 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승인하는 서계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귀환길에 대마도주에게 서계(書契)를 뺏기고 50여일을 갇혔다가 부산 왜관으로 옮겨져 또 40일을 구금됐으며 동래부사에게 인도된 뒤에도 공치사는 커녕 승인없이 월경하 였다하여 도리어 형벌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여름 사(赦)를 받아 출옥한 안용복 은 울릉도에서 돌아온 어부들로 부터 일본인 행패로 도저히 작업을 할 수 없다나는 고충을 듣고 추격하다 옥기도(玉岐島)로 들어간 그는 옥기도주를 만나 울릉도, 독도의 감세관이라 속이고 "다시 왜인들이 울릉도 근처에서 고기잡이를 하면 가차없이 죽이겠다"고 경고했다.

 

그는 대마도주의 야심과 죄상을 추궁하여 서약서를 받아 의기양양하게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강원감사 심평은 상은 고사하고 도리어 그들을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 조정에서는 월경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하려고 했으니, 이때 남구만, 윤지완 등 원로대신의 변호로 사형은 면하고 귀양을 가게되어 일생을 마쳤다.

 

이는 당시 조선조정과 대마도주간에 피차의 비합리적인 월경을 금지한 탓도 있었지만 조정의 외국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용복의 월경은 헛되지 않았다. 일 본 막부에서는 안용복의 항의로 다께시마는 이나바에 속했다고 하나 아직 일본인이 거주한 일이 없고 또 거리로 볼 것 같으면 이나바로부터 1백 60여명리, 조선으로 부터 40여 리이니 조선 땅인 것이 명백하다고 밝히고 일본인이 울릉도에 나가는 것을 금했으며 그 뜻을 조선 정부에 통고하도록 대마도주에게 명했다. 대마도주는 내심 불쾌했으나 막부의 명(命 )인지라 숙종 22년(1696) 10월 우리나라에 그 뜻을 전하고 숙종 23년 2월 정식으로 동래부사 이세재에게 서계를 보냈다. 안용복의 국가수호의 의지를 기념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수영공원에는 그의 충혼탑이 세워져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21.녹도만호 정운

정운의 자는 창원(昌原), 하동인, 영암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 웅천 현감, 제주 판관을 거쳤다. 1592년 임진난이 일어날 때는 녹도만호였다. 임란 초기에 경상우수사 원균은 도망하여 곤양부근에 이르렀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때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은 관할론과 부원론으로 대립되었다. 이때 정운은 어영담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경상도는 우리의 국토가 아닌가하고, 부원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이순신의 경상도 출병이 이루어졌다. 그는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 적진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해전에 참가 분전하였다. 8월 24일 전라좌수영군은 경상좌수영군과 합동하여 부산포를 공격할 것을 결정하였다. 9월 1일 이른 아침 부산포에 향하고 8시경 몰운대를 지나자 돌풍이 갑자기 일어나고 파도가 넘돌아 함대를 정비하고 화준구미(花樽龜 尾)에 이르렀다. 여기서 왜선 5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선 8척, 서대포 앞바다에서는 왜선 9척, 절영도에서 왜선 2척을 만나 모두 격파하였다.

 

이어 부산포내에 돌선하였다. 이때 적선 400여척이 선창 동쪽의 산기슭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때 정운은 우부장(右部將)이었다. 이에 우장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분전하였다. 이때 100여척을 격파, 많은 적군의 군기를 노획하는 한편 많은 적군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정운은 회군할 때 적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장의 시호가 내렸으며, 영암의 충절사와 이곳 동래충렬사에 봉안되어 있다.

 

22.다대첨사 윤흥신

윤흥신은 파평인으로서 인종 때의 권세가인 윤임의 아들이라고 하며, 진천현감을 거쳐 1592년 임진난 때 다대포첨사로 부임하여 역전 끝에 순사하였다고 한다. 임진난 당시의 기 록인 『징비록』에 『다대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 죽었다』고 하였고 『재조번방지(再 造蕃邦志)』"왜적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와 다대포를 함락시키니 다대 첨사 윤흥신이 힘 써 싸우다가 피살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임진란이 끝난 선조 37년(1604) 6월 25일에 공표된 선무공신록권에도 원종 1등공신에 올라 있다.

 

그런데 윤흥신의 사적과 다대포의 사적이 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영조 때 동래부사 조 엄의 『윤공유사(尹公遺事)』, 동래부사 강필리의 『윤공사절기 (尹公死節記)』에 비롯된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다대포진에서는 선조 25년(1592) 4월 14일 적의 내습이 있었으나 첨사 윤흥신공을 비롯한 군, 관, 민은 성을 굳게 지켰으며, 15일 적군이 동래성을 공격할 때 한편으로는 적군의 공격을 다시 받고 첨사와 군, 관, 민은 끝까지 항전하여 첨사이하 많은 희생을 내고 성은 함락되었다. 윤흥신은 때마침 진에 와 있던 동생 흥제와 함께 순사하였다고 한다. 윤흥신공은 동래 충렬사에 영조 48년(1772년)에 배향되어 그의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 있다.

 

23.동래교수 노개방

노개방의 자는 유한(維翰)이요, 본관은 풍천이며 밀양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문재가 있었음은 그의 동학인 배대유의 제문과 조존성 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충분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던 것도 아울러 알 수 있다. 피나는 가난속에서 뛰어 난 재주를 가지고 열심히 학문에 정진한 끝에 과거에 급제 하였으나, 뒷바라지 해주는 사람이 없어 늙은 어머님을 봉양하려는 뜻에서 자원하여 동래향교의 교수직을 맡았던 것이 다. 그가 죽은 뒤 174년이 되는 해에 동래부사 엄린이 적은 『동래교수 증도 승지 노공유사 기』에는 노개방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참작하여 가장 완비된 전기를 쓰고 있다.

 

『노공유사기』에 의하면, 노개방의 선대사적은 확실하지않고 다만 "국조과방록에서 아버 지는 노일이라 하고, 밀양유림에서 기록한 것에서는 부인이 여흥이씨로 학생 경옥의 딸이며 그 증조부는 한림(翰林)태(跆)"라고 하였다. 그는 가정계해(嘉靖癸亥) 즉 명종 18년(1563년)에 나서 2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래교수로 부임하여 30세에 동래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상이 노개방에 대한 간략한 인적사항이다. 충과 효와 예는 선비들의 기본교양임에 이 선비정신을 다 실천하려고 노력한 이가 바로 노교수인 것이다. 미관말직에 있는 그가 살아 남았다 하더라도 아무도 탓할 이가 없는 당시 상황에서 굳이 죽음의 직장으로 다시 돌아와 선성(先聖)의 위패를 봉안하고 대의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은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이러 한 그의 충절로 뒤에 그의 사적이 알려지자 도승지에 증직되고 동래 충렬사와 송공단에 배향되었으며, 향리인 밀양의 중봉서원(中峯書院) 에 봉안되어 그의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 있다.

 

24.동래부사 송상현

송상현은 자는 덕구(德求)요, 호는 천곡(泉谷)으로 본관은 여산이다.

 

선조 3년(1570), 20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정원정자로 보임되었다. 선조 11년(1578)에 저작랑이 되고 이듬해에 박사에 서임되었다가 나아가서 경성판관이 되었다. 선조 16년에 사헌부지평으로 돌아와 예조, 호조, 공조의 정랑(正郞)이 되 었다. 이듬해인 1548년 종계변무사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 20년에 다시 들어와 지평(持平)이 되고, 동 21년에 백천군수로 나아가 3년만에 전직되어 들어와서 충훈부경력, 사헌부집의, 사간원사간, 사재군자감정이 되었다. 선조 24년(1591)에 집의 (執義)로서 통정대부에 올라 동래부사가 되니 곧 임진왜란 바로 전년이었다.

 

송상현은 동래로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집무를 수행함에 있어 오직 성의와 신의로써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그들 따르기를 마치 부모와 같이 하였다. 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였으며, 임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1592년 4월 14일 오전 왜군에 의해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전투가 끝나자 적군의 일부 병력은 동래성으로 진출하였다. 부산과 동래는 가까운 거리이고 또 부산의 행정관할은 동래부에 있었기 때문에 적군의 동태는 곧 동래에 알려졌다. 이 때에 경상좌병사 이각이 울산병영에서 동래부에 왔으나 적의 대군이 밀어닥친 것을 알고 도망하였다.

 

한편, 양산군수 조영규의 구원이 있었다. 동래성에 적군이 침입한 것은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14일로 그들은 여세를 몰아 내침하여 포위하고 15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전투가 전개되었다고 한다. 송부사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비하고 있었다. 적은 취병장(聚兵場, 현 동 래경찰서)에서 진출하여 백여명의 군사로 하여금 한 목패를 남문밖에 세웠다. 송부사는 군 관 등에 명하여 나가보게 하니 글에는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고 쓰여 있었다.

 

송부사는 또한 목패에다 "싸워서 죽은 것은 쉬어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고 글을 써서 적 중에 던졌다. 막중한 대군을 앞에 두고 송부사는 결사의 굳은 뜻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적군은 15일 아침 적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아군의 주력은 남문루를 중심으로 집결되었다. 남문에서 피아 양군이 사력을 다해 격전을 치렀으나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민, 관, 군이 죽을 힘을 다하여 결사항전 하였으나, 워낙 막강한 적군의 무차별 살육이 감행되는 가운데 성민들의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내를 이루었다.

 

송부사는 문인답게 죽을 각오를 표시하였던 것이다. 호상에 걸터앉아 사람을 시켜 빨리 조복을 가져오게 하여 갑옷 위에 입고 의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히 호상에서 내려 북향사배하고는 붓을 잡아 부채에 "외로운 성에는 달이흐려지고 다른 성진에는 지척이 없다. 군신의 의가 무거우니 부자의 은정 그 어찌 가벼우리까라고 글을 써서 부모님께 하직의 인사를 사람을 시켜 보냈다"고 한다.

 

송부사의 주위에는 군관 송봉수, 김희수 등 4 ∼ 5명, 향리 대송백, 부리, 소송백, 관노 철수, 매동 등이 좌우에 열입하고 있었는데 적병들이 앞으로 핍박함에 송부사, 김희수, 대송백 등은 격투 끝에 전사하였다. 이 동래부의 전투에서 이름을 전하는 자는 송부사의 측근에는 종행인 신여로, 금섬이 있으며, 이밖에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교생 문덕겸 등이며, 부민으로는 다만 김상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이촌녀 등이 전한다. 순사한 후 선조 27년(1594)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였으며, 충렬공의 시호를 내리고 숙종 7년에는 좌찬성을 가증하였다. 동래의 충렬사, 송공단, 고부의 선충사, 청주의 신항서원, 송경의 숭렬사, 경성의 화곡서원에서도 모시고 있다.

 

25.부산첨사 정발

정발의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무과를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해남현감을 거쳐 북변 종성에 여진족의 침구 가 있어 원수의 막하로 부임하여 구란을 평정하였다. 그뒤 거제현령을 지내고 들어와 비변 사의 낭요(郎僚)가 되어 팔사의 낭관을 겸하고 있다가 위원군수로 제수되기도 했다. 강섬 의 천거로 훈련원 부정(副正)이 되고 다시 사복시로 옮겼다. 이때부터 왜인이 침략할 기미 가 보였는지 조정에서는 드디어 그를 절충장군으로 품계를 올려 부산진첨사로 삼았으니 이 해가 바로 임진왜란 발발해인 1592년이었다.

 

부산으로 부임할 때 아들과 동행하였다. 왜인의 침입이 예상되어 아들을 억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자 하였다. 아들은 남아있기를 간청하니 "너는 돌아가서 내 어머니와 할머니를 봉양하라"면서 종자를 시켜 떠나도록 하였다. 한편, 남행하고 있던 조방장 이정헌을 막빈 으로 초빙하여 부산진성의 방위를 함께 의논하였다.

 

임진 4월 13일 저녁 왜적의 제1군 18,700명이 부산앞바다에 쇄도하였다. 13일 당일에는 적 군은 절영도 전방에서 가박하고 공격은 개시하지 않았다. 다만 왜군의 장인 소서행장(小西 行長)의 막료인 대마도 주(主)인 종의지(宗義智)가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부산 진성의 경비상황을 정탐하고는 휘하 장수인 평조신(平調信)을 시켜, 군의 내침의 사유를 말하고는 길을 빌리는 가도를 요구하는 글을 목판에 쓴 것을 성밖에 세웠다고 한다. 이때 정발은 가도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그리고 일전을 불사한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전투태 세를 공고히 하였다.

 

이튿날 14일 적은 예측한대로 부산포 우암에서 삼분하여 결진하고는 배를 포안에 붙여 차 례로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적군은 성을 첩첩으로 포위하였다. 절대다수의 병력을 가 진 적군은 신무기인 조총을 마구 발사하여 천지를 진동시키며 성을 넘어오려고 하였다. 이 에 아군은 이를 제지하기 위해 4면에서 혈전을 벌였다. 총탄이 터지는 소리 화살이 나는 소 리 순식간에 처절한 공반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정발은 휘하의 장사를 거느리고 성내를 순시하며 독전하였다.

 

군, 성민은 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모두 죽게된다는 마음으로 분전을 계속하였다. 정발은 이미 예측한 일이나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무인답게 죽을 각오를 하고 더욱 사졸을 격려하며 자신도 분전하였다. 그러나 노도와도 같이 밀어닥쳤던 적군의 일부 군사들 이 북쪽의 허술한 곳을 넘어 쳐들어왔다. 따라서 순식간에 성중(城中)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피아쌍방 육박전이 전개되고 적의 무차별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정발도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파상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의 수는 늘기만 했으며 소수 군민의 필사적인 저항으로는 이를 막을 도리가 없었고 차례로 순사하며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사한 이의 이름을 남기고 있는 자는 적은데 순사한 애향, 용 월은 정공단에 합사하고 있다. 영조 37년(1761 좌수사 박재하가 공의 전망비를 세웠으며, 영조 42년(1766)첨사 이광국이 정공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시호를 내리어 충 장공(忠壯公)이라 하고 좌찬성을 증하였다.

 

26.양산군수 조영규

자는 옥첨(玉瞻)이며, 직산인으로 수의부위 준(準)의 아들로서 중종 30년(1535) 장성부 백 암리에서 출생하여 명종 6년(1551) 무과에 급제하였다. 훈련원 초관을 거쳐 사복시 주부, 판관이 되고 이어 제주판관, 무장현감이 되었다. 그후 부친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 가 다시 영암, 용천, 낙안, 영해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에 양산군수 로 부임하였는데 얼마되지 않아 왜적이 쳐들어왔다. 병사 이각은 성을 버리고 먼저 달아나 고 열군(列郡)은 풍미하여 믿을 바가 없었다. 그는 이미 전세가 기울어졌음을 탄식하였으 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말을 달려가서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말하기를 "국사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공은 장차 어찌하겠소" 하니 송상현은 "마땅히 이 성을 굳게 지킬 따 름"이라 답했다. 이에 그도 "이 환란을 당하여 마땅히 그대와 같이 이 성을 지키다가 나라를 위하여 죽을 따름이라"라고 했다.

 

송상현이 그의 손을 잡고 크게 기뻐하자 그는 "나는 죽음으로 싸우기를 결심했으나 다만 노모가 양산에 계시니 돌아가 하직한 후에 다시 오겠다"하고 곧 양산으로 돌아가 어머님께 작별을 고했다. 말을 달려 동래로 오니 성은 이미 포위되어 위급한 가운데 있었다. 칼을 빼 어들고 거세게 말을 채찍질하니 적이 잠깐 피하는 틈에 성중에서도 그가 다시오는 것을 알 고 급히 성문을 열어 받아들였다. 그후 그는 송부사와 같이 힘써 싸우다가 순사하였다. 숙 종 때에 호조참판을 추증하였으며, 장성 모암서원, 양산 충렬사, 동래 충렬사에 배향하고 있다.

 

27.제생 문덕검

제생이란 향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문덕겸은 교수 노개방 밑에서 공부 하던 학생으로 임난을 당하여 선생과 같이 순절한 사람이다. 문덕겸은 교수 노개방이 밀양 으로 어머니를 뵈러 간 사이에 적이 밀려 왔으므로, 향교에 봉안했던 선현의 위패를 스스 로 성중의 정원루로 옮겨 모신 뒤 그 곁을 떠나지 않다가 적이 쇄도하매 돌아온 노교수와 함께 그 앞에서 조용히 순사하였다. 그는 남평문씨로서 동래에 옮겨와서 살았는데 당시의 집은 여고리(현 사직동)였던 모양인 듯 적병이 북으로 올라간 뒤에 종 검산이 몰래 덕겸의 시체를 여고리로 옮겨다 묻었다.

 

자식으로는 아들 건중(建中)이 있었으나 일찍 죽고 부인 민씨가 자부 정씨와 9살 먹은 손 녀를 데리고 덕겸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고부가 함께 길가에서 죽었다. 종 검산이 여주인 을 찾아 헤매다 성의 서문에서 찾아내었는데 9살짜리 손녀가 두 시체 밑에 깔려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검산은 손녀를 금강골의 바윗굴(金岡谷 岩窟)에 숨겨두고 두시체를 업고가서 묻었다. 문덕겸 부부는 한묘에 묻혔으며 손녀는 자라서 동래인 김천상(金天祥)에게 시집갔 다. 김천상의 후손은 동래 유생 이동형에게서 비문을 받아 덕겸의 묘에 비석을 세웠다. 검 산은 또 주인집 토지문서를 우물돌 밑에 묻었다가 뒤에 찾아내니 이로인해 문씨의 전답과 토지가 모두 김씨에게로 돌아갔다. 문덕겸은 뒤에 동래충렬사에 배향되고 영조 13년에는 호조좌랑에 증직 되었다.

 

28.제생 양조한

문덕겸과 함께 향교의 제생으로 노개방교수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던 양조한은 임진란때 순절하였음에도 그 사적이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사적을 밝혀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한 이유이며, 또한 잘못되어 그 동생되는 양통한(梁通漢)의 사적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양조한 사시말에 의거해 살펴 보면 본래 가매실에 살던 양조한은 임진란이 일어나매 문덕겸과 의논하여 향교의 위판들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땅에 가려묻고 오직 선성(先聖)과 오현(五賢)의 위패만을 모시고 성내 정원루로 옮겼는데 적탄에 맞아 노 개방, 문덕겸 등과 같이 전사하였다.

 

아들 양홍도 전사하였으며, 당시 13세 손자 부하(敷河)는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가 31세때 고국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양통한은 그가 형 양조한의 손자임을 확인하고 재산과 노비를 돌려주고 장가를 보내서 살게 하였다. 부하는 두아들과 세딸 모두를 한울타 리 안에서 함께 살았다. 일년에 2번씩 소를 잡고 일문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등 베풀었고 ,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송시열이 남문비기를 쓴 것은 임진란 후 77년 되는 해이고 그 비를 세운 것은 경술 즉 1670년인데 부하가 91세때의 일이다. 그 비문에 양조한의 이름 대신 양통한의 이름을 썼기 때문에 이것이 불씨가 되어 양조한의 후손과 양통한의 후손사 이에 소송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으로는 송시열이 쓴 비문을 감히 고치지 못했다. 그 결과 양조한은 사절한 사람이 안되고 대신 살아있었던 동생 양통한이 사절공신이 되었던 것이다.

 

뒤에 양통한은 난후의 호적에 보이고 또 『화왕수성록』에도 이름이 보임으로 사절한 사람은 형인 양조한 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미 양통한은 비문에 실리고 공신녹권에 실려있고 또 의병에 가담하여 창녕 화왕성에서 곽재우장군과 같이 나라를 지킨 공이 있으므로 결국 두 사람은 다 증직하고 표창하도록 결론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양조한은 향교에서 훈도를 하였기 때문에 호조정랑을 증직하고 양통한은 호조좌랑을 증직하였다.

 

29.김병규

김병규의 호는 정산(井山)으로, 1887년 동래읍에서 출생하여 1962년 타개하기까지 한국 초창기 교육계에 투신하였고 다시 은행가로, 또 광복 후에는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하는 등 다채로운 생애를 보냈다. 그는 당시 동래지방에서 대학자로 알려진 외숙 지전 이광욱의 밑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한편 와세다대학 강의록을 읽어 근대학문을 습득하여 개화사상을 가졌다. 근대교육에 관심을 가진 그는 개양 학교에 입학하여 근대문화를 익혔으며, 1906년 개양학교를 마치고 동래의 삼락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이 삼락학교는 1905년 동래 기영회가 설립한 것으로 뒤에 개양학교를 흡수, 합병 하여 동명학교(동래고전신)로 교명을 바꾸었다. 이곳에서 그는 학문에 정열을 쏟고 학생에게는 근대사상을 주입하는 한편 민족사상을 주입시켰다.

 

그후 학교를 떠나 동래지방의 유력자 윤병준, 박인표, 오태환 등이 동래은행을 설립하고, 1918년 8월 동래은행 본점 지배인으로 취임하여 거창 등지에 저점을 설치하였다. 1927년 감사역이 되고 1931년 상무역에 취임하여 1933년 7월 호남은행으로 합병될 때까지 은행가로서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933년 동래산업조합이 창업됨에 따라 초대 조합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일제시기 지방유지들의 권유로 동래군의 초대 민선 도의원이 되었다. 관선 도의원 때는 일부에서는 친일파라는 비난도 있었으나 그는 도의회에서 도예산심의를 거부하여 파문을 일으켜서 그의 진면목을 다시금 인식시켰다. 광복이 되자 미군정청에서는 그를 경남내무국장에 임명하고 다시 경남지사로 추대하였다. 민족발전이란 신념을 갖고 부산지방 민립대학기성회 발족에도 힘썼으며 부산대학의 발족에도 공이 컸다.

 

30.박기종

1839년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초량왜관의 일본상인과 교역할 수 있는 특권상인인 동래상고(東萊商賈)가 되어 상업에 종사하며, 한편 일본어를 익혔다. 그는 어장(영도 한진중공업앞 해역)과 김해지역의 토지를 매입하는 등 부산의 부호가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그해 제1차 김기수 수신사 일행이 도일 할 때 동행하여 일본의 근대적 시설, 문물을 접하였고, 그후 또 한차례 일본으로 건너기 일본의 제철소, 조선소, 철도를 견학하고 해운업을 살폈다. 1895년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신교육기관인 부산개성학교를 세웠다.

 

1886년 10월 부산항 경무관에 임명되어 1898년 8월까지 근무하였고, 한편 고장의 상업발전을 위해 영주동에 상무소를 설립하였다. 또 1897년 9월에는 부하철도(부산 ∼ 하단)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901년 일제의 방해로 인해 부하철도는 개설상 큰 어려움을 겪고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1896년 8월 외부 참사관으로 승진, 1899년에는 동지를 구하여 대한철도회사를 발기했으나, 그 뜻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1902년 6월 자기의 전재산을 투입하여 영남지선 철도회사를 설립 기공했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의 강압으로 그의 이권을 빼앗기고 재산도 잃었다. 1905년 6월 그는 변리공사라는 한직을 받기는 했으나 그는 계획했던 일이 좌절된채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속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부산에 있어 개화의 선각자였다.

 

출처 : http://www.busa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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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을 튼튼히 한 정언섭

정인섭의 자는 공리(公理), 동래정씨로 숙종 12년(1686)에 태어났다. 숙종 43년(1717) 사마 시(司馬試)를 거쳐 영조 1년(1725) 증광문과에 장원급제,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727년 사 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김일경 등을 처벌할 것을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다. 그러나 영조 4년(1728) 김일경의 여당인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영조는 사헌부 지평으로 발탁, 그후 동래부사, 충청도관찰사, 동부승지, 광주부윤, 도승지, 한성부우윤,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호조, 예조의 참판을 지냈다. 영조 17년(1741 동지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 나아가 많은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영조 24년(1748)에 별세하였다.

정언섭은 영조 6년(1730) 11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동래는 임진왜란 때 성이 함락된 후 1백 4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성터는 허물어져서 동래가 나라의 관문임을 중시하고 성을 수축할 것을 계획하고 정부에 건의하였다.

 

1731년 정월 축성의 재가가 내려지자 축성 공사를 시작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 현재 망월산 부근에 남아 있는 동래읍성 은 바로 동래부사 정언섭이 축성한 것이다. 공사가 시작된지 1백일이 좀 지나 4월에 길이 8리, 높이가 수십척이 되는 큰 성을 쌓았으며, 5월에 성문을 준공한 뒤 7월에는 문루를 완 성해 역사(役事)를 시작한 지 2백여일만에 견고한 성이 완비되었다. 성을 완공 뒤 수성청 (守城廳)과 수성창(守城倉)을 설치해 군비에 만전을 꾀하였다.

 

또한 공사 때 옛성의 남문터에서 부러진 창, 화살촉 등과 함께 출토된 유해들을 거두어 삼 성대 부근에 6개의 봉분을 만들어 이들을 안정시켜 주었다. 이 무덤들은 임진왜란 당시 장 렬히 싸우다 전사한 동래성민들의 무덤이며 이를 『6총묘』라 하고 뒤에 기를 추가하여 『 7총묘』라 하고, "임진전망유해지총" 동래의총이라고 불린다.

 

정언섭 부사는 군비를 완비 한 뒤 문교(文敎)쪽으로 방향을 돌려 시술제라는 제실을 짓고 고을 유생들이 학업을 익히 게 하였다. 이 밖에도 정언섭 부사는 관사인 연심당 건립과 청사인 교방, 구휼, 창고인 사 창, 고마청 주사 등을 중건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치적을 남기고 영조 9년(1733) 1월 만 2년 6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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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영실

2.안창호

3.유관순

4.윤봉길

5.전봉준

이거밖에모릅니다.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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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영실

조선 세종조의 과학자로 본관은 아산, 봉건신분제도가 철저한 당시 사회에서 동래현 기녀 소생의 관노 출신으로 뛰어난 과학기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정3품인 상호군 (上護軍)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최고 과학자중의 한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과학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제 련, 축성과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다. 이에 세종대왕은 여러 신하들의 강력한 반 대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을 발탁해 세종 5년(1423) 정5품 벼슬인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올 라 노예의 신분을 벗었으며, 세종14년(1432) 중추원사 이천(李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 수하고 천문의를 제작 감독하였다. 세종 15년(1433)에 호군에 올랐으며, 이 해에 혼천의 제 작에 착수하여 1년만에 완성하였다. 이듬 해 동활자인 경자자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에 힘썼다.

한편, 김빈(金빈)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제작 완성했다. 세 종 19년(1437)에 제작 착수 5년만에 천체 관측용 대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해시계인 앙부일구, 주야 겸용의 일성정시의,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다음해에는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의 옥루를 제작 완료하고 경상도 채방결감이 되 어 동(銅), 철(鐵)의 채광, 제련을 감독했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에 특진되었으나 세종 24년(1442)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의금부에 투옥, 장형을 받은 뒤에 파면당했다. 장영실의 이러한 과학적 결실은 그의 뛰어난 탐구정신에 기초한 것이지만, 또 하나의 역사적 배경으로 고려 이래 이어온 과학적 결실과 함께 조선왕조 개창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음 도 사실이다. 특히 천문역산학의 발전은 조선왕조의 개창이 천명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 을 표명하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2.문시환

부산시 연제구 연산동에서 1899년에 태어났다. 일찍이 동래의 동명학교에서 수학하던 그 는 교사 김병규의 교육에 크게 감화를 받고, 일제강점의 민족적 의분으로 3학년 때 무단가출하여 만주 안동현으로 갔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전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을 돕고 활약하다가 귀국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백산상회의 안희재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기미육영회의 외국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20년 동경정칙영어학교에 유학하 여 2학년과정을 수료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대학에 입학하였다.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 의에 경남기성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후 의열단에 가입하며 단장 김원봉 등과 협의한 끝에 구여순, 강홍렬, 김정현, 오세덕, 배치문과 같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조선은행, 종로경찰서 등의 파괴와 총독 등 요 로대관 암살의 임무를 띠고(이미 1,2차 계획은 실패) 문시환은 3차 계획으로 파견되었다. 1923년 10월 문시열, 강홍렬, 배치문 등은 일본과 신의주, 황해를 건너 국내에 잠입하였다. 김정현이 신의주를 지나는 열차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이어 구여순, 오세득이 체포 되었다. 문시환 역시 동년 12월 29일 경성 종로경찰서에 의해 체포되어 징역 3년구형에 징역 2년의 언도를 받고 2년간 갖은 고초를 겪고 출옥하여 광복 때까지 일경의 요시찰 대상자로서 행동에 자유를 잃은 생활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이 되고 정부수립 후 경상 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1973년 별세하였다.

 

3.박재혁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서 1895년에 태어났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전기회사의 전 차종업원이 되었다가 경부선 관역전의 어떤 무역상인의 점원으로 일을 보았다. 1917년 6월 주인에게 7백여원을 얻어 상해에 가서 무역업을 하다가 1918년 6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상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에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다짐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재차 상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서 무역업을 하는 등 독립투사 들과 사귀었다. 1920년 7월에는 의열단장 김원봉이 의열단에 입단하여 독립투쟁에 적극 나 서기를 권유하였으나, 가정형편상 주저하다가 8월에 김원봉이 재차 부르니 상해로 갔다.

의사는 김원봉으로부터 군자금 3백원을 받아 수많은 애국동지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기로 하고, 동년 9월 상순에 중국고서로 짐을 꾸리고 그 밑바닥에 폭탄을 감추어 상해를 떠나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9월 13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부산에서 동지인 최천택을 만나서 하룻밤을 환담하고 용두산에서 기념촬영을 한후 노모를 생각하여 망설이다가 큰 의(義)을 위해 의사는 나라를 위한 큰뜻을 이루기로 했다.

 

의사는 14일 하오 2시 부산경찰서로 가서 서장(橋本秀平)에게 면회를 청하니 전부터 안면이 있던 터라 면회 가 허락되었다. 박의사는 2층 서장실에서 서장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몇마디 인사와 환담을 나누다가 진기한 고서를 구경시켜 준다고 이책 저책을 꺼내 들고 보여주는 동 안에 마침내 맨밑바닥에 감추었던 전단을 집어 서장앞으로 던지고 "나는 상해에서 왔다.

 

네가 우리 동포를 잡아 우리의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나는 오늘 너를 죽이는 것이다"라고 꾸짖고 폭탄을 들어 마주 앉았던 탁자 한가운데 메어다 붙였다. 굉장한 폭음과 함께 다같이 쓰러지니 서장은 오른쪽다리에 중상을 입고 혼절했으며 의사도 다리에 중상을 당하여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으나 우선 일경이 병원으로 보내서 응급치료를 받게한 후,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채 재판정에 끌어냈다. 부산지방법원에서 사형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고, 다시 상고하니 경성고등법원 에서 사형언도로 형이 확정 됐다.

 

대구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그는 그동안의 혹독한 고문과 폭탄 상처로 폐병까지 발병한지라 하도 고통이 심하므로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손으로 죽겠다"고 결심하고 단식하다가 형집행전인 1921년 5월 11일(27세)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최근에는 의사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업회에서는 어린이대공원 내에 동상을 건립하여 의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4.박차정

박차정 의사는 일제시기의 항일독립운동 전선에 참여한 맹렬히 활약한 이었다. 1910년 5월에 동래 복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 후 민족의 비참상을 보다 못해 1918년에 한통의 비장한 유서를 남긴채 자결하고 그후 오빠인 박문희는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항일독립전쟁에서 활약하였다.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한 박차정은 어느 학생보다도 민족의식이 투철하여 항일학생운동의 선봉에 서서 활약하였다.

 

1929년 3월 동래일신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약 2년동안 동래청년연맹의 부녀부장 일을 맡아 보다가 21세때 서울 근우회 선전부장이 되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 때 항일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체포, 투옥(서대문 형무소)으로 모진 고문을 받아, 출옥 후 꼬박 누워 한달 동안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중국으로 망명한 둘째 오빠 박문호가 밀파한 사람이 전하는 지시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 홍성하의 집에 숨어 망명의 기회를 엿보았다.

 

드디어 상해 인육시장으로 팔려가는 여인들 속에 끼어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 하는데 성공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유지들의 도움으로 북경 화북대학에 입학, 졸업 하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하여 독립전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때 큰 오빠 박문회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녀는 여자 의용군을 모집하여 대장이 되어 곤륜산전투에 서 일군과 격전끝에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중국의 이숭인 장군과 임 시정부의 조소앙 선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각각 중국 신문에 추도문을 실었다. 그녀는 실로 조국독립애의 뜨거운 혼을 갖고 살다간 한국이 낳은 위대한 애국 여성이었다. 최근에 박차정의사의 이러한 항일운동을 앙양하고 기념하고자 박차정의사 숭모회를 중심으로 추 모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5.안희제

1885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출생한 백산은 부산 최초의 무역회사 였던 백산상 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상인, 기업가가 아니라 민족자본의 육성자였고, 민족교육의 선구자였으며, 민족사상의 고취자로서 항일독립투사였다. 1905년 보성전문에 입 학하였다가, 1906년 양정의숙에 전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다.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고향인 의령에 의신학교,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설립하고 윤상은이 설립한 구포의 구명학교에서 2년간 교편을 잡았다.

 

1911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 정착하여 최병찬과 『독립순보』를 간행 하였다. 1913년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1917년 구포의 윤현태와 자본금 100만원으로 백산무역주식 회사로 개창하였다. 백산은 국내지주들이 기부, 기탁한 자금의 어음을 경남은행 본점에서 할인하여 상해로 송금하는 책임을 도맡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백산상회는 표면상으로는 순전히 상업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리기관인 것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해외독립운동의 국내 연락과 그 자금공급을 목적으로 설립된 민족운동의 국내후원기관이었다.

 

1927년 경영난과 일제의 탄압 및 방해로 해산될 때까지 독립운동의 자금조달과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락 등 국내에서 지원하는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백산상회를 중심 으로 1919년 11월경 부산부에 거주한 한국자본가들이 기미육영회를 조직하고 한국청년들 중 수재를 선발하여 일본 기타 외국에 유학시켜 학비 등 장학금을 지급했다.

 

1927년경 그 는 백산상회가 해산된 후 서울에서 『중외일보』를 경영했으며, 1933년에는 만주 동경성 에서 튼튼한 독립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일제의 토지 강탈로 농토를 잃고 아사지경을 헤매고 있던 국내의 실농민을 이주시켜 이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발해농장을 경영했다.

 

아울러 농민들이 거주할 주택을 건설하며 민족교육의 보급과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발 해학교를 설립하고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 1931년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많은 활동을 하던중 1942년 10월 일제가 대종교 본부를 습격하여 윤세복 등 간부 20여명을 검거한 대종 교사건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43년 7월 31일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으나 동년 8월 3일 59세를 일기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아울러 부산시에서는 그의 독립정신을 그리기 위하여 원래 백산상회가 있던 곳에 기념관을 만들어 선생의 유품과 관련 기록들을 전시하고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여러 학술활동도 개최하고 있다.

 

6.윤현진

경남 양산군 소토리에서 1892년에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고는 15세에 구포 구명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고, 일본 명치대학에서 많은 동지들과 사귀고 신문학을 배웠다. 그러나 숨가쁘게 돌아가는 조국의 현실을 바라볼 때 자신의 사명감을 더한층 느끼지 않을 수 없어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의춘양행을 설립했다. 의춘양행을 통해 소비조합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상품을 배척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이것이 최초의 소비자운동이었다. 또한 안희제와 손을 잡고 백산상회를 설립, 독립운동의 국내외 연락과 독립운동 자금조달에도 크게 활약했다. 그리고 26세때 일시 구포 경남은행의 총책임을 맡기도 하고 또 동아일보 창립때에는 양산의 일가친지들을 설득, 6명을 발기인으로 참여시켰다.

 

그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구국항쟁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그해 4월에 애국지사들과 같이 상해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가장 어려운 자리였던 재무 차관 임무를 맡아 공채를 발행하고 또 그의 명의로 독립군의 자금이 백산상회의 비밀루트 를 통해 입금되었다. 그는 여순, 상해간을 자주 왕래하면서 돌아올 때에는 한약 원료를 싣고오고 갈 때에는 빈 배로 가는 것이었다.

 

그의 재무차관으로서의 눈부신 활약은 오늘날 많은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이같이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하고 활약하던 그의 몸에는 피로가 겹치지 않을 수 없었다. 병마에 시달리던 그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21년 불과 30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상해의 애국동지들은 조국독립의 새로 운 각오를 비통의 눈물로 다지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는 우리 고장이 낳은 위대한 애국자였으며, 1962년 국민훈장을 추서하였다.

 

7.장건상

장건상(張建相)은 경상북도 칠곡에서 1882년 12월에 태어나 1883년 부산 좌천동으로 이주하여왔다. 선생은 좌천기(佐川奇)라는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다 신학문을 가르치던 육영제에서 12년간 수학하였다. 이후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 법학과를 졸업 했다. 1919년 4월 22일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고 외무부 위원이 되었으며, 동년 7월 1일 대한적십자회가 상해에서 창립되어 상의원이 되었다. 1919년 의열단의 기밀부 요직을 맡아 활약하였으며, 1921년 4월 19일 3.1운동이 발발했을 때 미국에 있던 이승만 등이 미국정부에 우리 나라를 위임 통치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 알려지자 임정은 이를 크게 성토하였다.

 

1921년 5월 임정을 전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소위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길립, 원세훈, 신숙 등과 조선공화정부를 북경에서 조직하고 외무총 장으로 선임되었다. 1921년 8월 고려공산당에 입당, 1924년 상해임정 외교총장으로 있으면 서 의열단인 이종암 등의 입국 활동시 필요한 혁명선언서 신임장과 위엄장을 교부하였다.

 

1926년 10월 28일 북경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의 취지문을 발표하고 7인 집행위원중 1인이 되었으며 대표 조성환의 명을 받아 남지나에 특파되어 선전에 주력하였다. 1927년 의열단 제3기 간부훈련을 마치고 민족혁명 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다시 조선민족혁명당 원으로 상해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1942년 2월 임시의정원의 개헌에 따라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이 선출되고 국무위원에는 이시영을 비롯 14명중 1인으로 선출되어 학무부 장이 되었다.

 

1942년 8월 4일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선임, 1942년 11월 17일 임시국무위원회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43년 10월 30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인도공작원으로 파견되도록 중국 국민당에 신분보장을 요청했으며, 1944년 4월 임시의정 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공적들을 기리어 1986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8.최상훈, 변봉금

최상훈은 동구 좌천동에서 1868년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고 26세 때 관내 부주사가 되었다. 이어 한성일어학교를 졸업하였다. 중국어, 러시아어에도 익숙하였다. 한때 일본군의 통역관으로 선발되어 만주 심양에 파견되었으며, 안중근의사의 거사에 부부는 무한한 감격에 몸둘바를 몰랐으며 이때부터 최상훈의 본격적인 항일독립투쟁을 시작되었다. 일본군 사령부의 기밀 지도를 가지고 독립운동의 동지들과 접촉 합류하였다. 당시 북간도의 군사 단체인 의군부 헌병대장에 임명되고(1919), 북로군정서(총사령관 김좌진)에서 이범석과 같이 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다가, 그후 약 10년간 만주에서 항일전선에서 분투하다가 시베리아 치타지방에 여행중 일본밀정에 의해 암살되었다. 변봉금은 1880년 동구 좌천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9세 때 최상훈과 부산진에서 결혼하였다.

 

만주에서 소식이 끊어진 남편을 두고 귀국할 때 변봉금은 집 한채를 사서 하숙업을 시작하였다. 이 하숙집에는 당시 독립운동에 뜻을 둔 젊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는데 그중 강홍렬 (3.1운동 당시 휘문고보 학생대표, 의열단, 광복후 경상남도 반민특위위원장), 김법린(독 립지사, 광복후, 문교부장관), 김효석(임정요인 광복후 내무부장관, 납북) 등이 자주 출입 하여 어머니와 같이 모셨다. 출옥한 동지들을 보살피고, 3.1운동이 일어나자 감옥에 수감 된 이들의 뒷바라지와 연락책 역할로 마다하지 않았다.

 

한편, 독립지사들에게 숙식을 제공 , 숨겨주기도 하여 여러모로 지사들의 활동을 도왔다. 자녀로는 1남1녀를 두었는데 1남을 먼저 잃고 1녀와 함께 있었으나 1녀마저 잃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1920년 고향 부산에 옮겨와서 수영구 수영동에서 애국지사 박희창과 함께 살았다. 과거부터 접하였던 강홍일, 최천택, 김범부, 이기주 등도 자주 찾았으며, 특히 영남의 애국지사중 그와 교분이 없는 이 가 없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였었다. 1958년 별세하였다.

 

9.한흥교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1885년 11월에 태어났다. 1910년 일제에 강점 당하자 일본 강산 의학전문학교 졸업후인 1911년 10월에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혁명군 구호의장으로서 소주, 진강 등 전선에서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1912년에는 북벌혁명군 홍십자회 대장으로 피 명되어 활동하였으며 항주 및 북경 의학전문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재직하였다. 1912년 상해에서 동제사 조직에 참여하고, 의료를 전담하였으며, 1914년 상해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이후 일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신채호와 함께 중외통신사, 전광신보사 창립에 참여하고 노령, 미주, 중국 각지에 신문을 발송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25년 6월에는 북경에서 원세훈, 송호 등 동지들과 선두자사를 조직하고 기관지 "앞잡이"를 발행하는 등 중국국민과 연합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 한, 중연 합으로 "타도일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5년에는 북경, 천진 등을 돌아 다니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산서성 대원에 정착하여 대동병원을 개업한 뒤 항일운동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 하였다.

 

10.고구마 전래자 조엄

조엄의 호는 영호(永湖), 풍양조씨로 영조 14년(1738) 20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 음보(陰補)로 내시교관 세자익위사시직을 지내다가 영조 28년(175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간원 정언에 올랐다. 이어 사서, 홍문관 수찬(修撰),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등 을 역임하였다. 영조 33년(1757) 7월 외직인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가, 영조 35년(1759) 정 월 퇴임해 갈 때까지 많은 치적을 쌓았다.

특히, 동래부사 재임시 임진왜란 때 다대첨사로 순절한 윤흥신이 충렬사에 배향돼 있지 못함을 보고 유성룡의 『징비록』과 신경의 『재 조번방지』를 참조, 윤공의 사적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어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1759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했다. 부임하자 곧 윤흥신공의 사적을 채방하여 그를 표창할 것을 장청(狀請), 윤공을 증직키 위해 노력하였다.

경상도관찰사 당시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임기를 마치고 내직으로 돌아와서는 대사헌 부 제학 예조참의를 지내 영조 39년(1763) 7월 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갔다. 통신사의 여정에 따라 대마도에 들렀을 때 고구마를 보고 그 종자를 얻어 바로 수행원을 통해 부산진으로 보내고 그 보관, 저장재배법을 알렸다. 이듬해인 1764년 7월에 돌아올 때 재배저장법을 익 히고 그 종자를 갖고와서 동래와 제주도지방에 시험삼아 심게 한 것이 우리나라 고구마의 기원이다. 그 재배법을 알리기 위한 저서인 『감저보』또한 당시 동래부사였던 강필리에 의해 완성되었다.

 

귀국 후 공조판서, 동지성균관사, 지의 금부사, 이조판서, 홍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43(1766)에는 팔곡 구사맹의 『조망록』에서 윤흥신공의 사적을 더 욱 자세히 조사, 다대첨사 윤공(尹公) 전망사적서(戰亡思蹟敍)를 지어 윤흥신공의 충절이 인멸되지 않게 하였다. 저서로는 『해차록』 『해행총재』가 있으며, 시호는 문익공이다.

 

11.고구마 재배자 강필리

강필리의 자는 석여(錫女), 진주강씨로 숙종 39년(1713) 전라도 강진에서 태어나, 영조 23년(174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그는 영조 40년(1764) 8월에 동래부사에 부임하여 영조 42년(1766) 11월까지 재임하였다. 그는 동래부사재임시 고구마재배 외에도 동래온천에 새로운 온천을 파서 2개의 목욕탕을 만들었다. 또한 다대포 윤공단의 설단(設壇)에 즈음하여 『윤공사절기 (尹公死節記)』기술, 윤흥신 등의 충렬사 배향을 주장하는 등 임진 선열의 추모작업에도 남다른 정성을 보였다. 수령 칠사(七事)를 밝게 처리하여 고을의 부흥에 애썼다. 고구마가 우리 나라에 전재된 것은 영조 39년(1763), 일본에 통신사로 간 조엄이 그 종자를 얻어 부산진에 보낸 것이 효시이다.

영조 40년(1764) 8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강필리공은 조엄이 보낸 고구마종자를 받아 이 의 재배에 성공을 보았는데 이것이 또한 우리나라 고구마재배의 효시가 된다. 거의 이와 같은 시기에 이광려, 강계현 등도 씨고구마를 얻어 재배를 시도하였으나 성공치 못하고 오 직 부사가 동래에서 심은 고구마만 성공을 보았던 것이다. 강부사는 곧 동래부민들에게 심기를 장려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저술을 통해 그 재배법을 일반인들에게 까지도 지도 보급 하였다.

 

부사의 저서인 『감저보=일명 강씨 감저보』는 고구마재배법과 저장법에 관한 실 험적기록으로 훌륭한 육종서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고구마재배의 길을 열었다는데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감저보는 후일 순조 13년(1813) 김장순에 의해 『감저신보 =세칭 김씨 감저보』로 이어지고 순조 24년(1824)에는 당시 호남순찰사였던 대실학자 서 유구에 의해 『종저보』가 편찬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12.국방을 튼튼히 한 정언섭

정인섭의 자는 공리(公理), 동래정씨로 숙종 12년(1686)에 태어났다. 숙종 43년(1717) 사마 시(司馬試)를 거쳐 영조 1년(1725) 증광문과에 장원급제,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727년 사 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김일경 등을 처벌할 것을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다. 그러나 영조 4년(1728) 김일경의 여당인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영조는 사헌부 지평으로 발탁, 그후 동래부사, 충청도관찰사, 동부승지, 광주부윤, 도승지, 한성부우윤,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호조, 예조의 참판을 지냈다. 영조 17년(1741 동지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 나아가 많은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영조 24년(1748)에 별세하였다.

정언섭은 영조 6년(1730) 11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동래는 임진왜란 때 성이 함락된 후 1백 40여년이 지나는 동안 성터는 허물어져서 동래가 나라의 관문임을 중시하고 성을 수축할 것을 계획하고 정부에 건의하였다.

 

1731년 정월 축성의 재가가 내려지자 축성 공사를 시작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다. 현재 망월산 부근에 남아 있는 동래읍성 은 바로 동래부사 정언섭이 축성한 것이다. 공사가 시작된지 1백일이 좀 지나 4월에 길이 8리, 높이가 수십척이 되는 큰 성을 쌓았으며, 5월에 성문을 준공한 뒤 7월에는 문루를 완 성해 역사(役事)를 시작한 지 2백여일만에 견고한 성이 완비되었다. 성을 완공 뒤 수성청 (守城廳)과 수성창(守城倉)을 설치해 군비에 만전을 꾀하였다.

 

또한 공사 때 옛성의 남문터에서 부러진 창, 화살촉 등과 함께 출토된 유해들을 거두어 삼 성대 부근에 6개의 봉분을 만들어 이들을 안정시켜 주었다. 이 무덤들은 임진왜란 당시 장 렬히 싸우다 전사한 동래성민들의 무덤이며 이를 『6총묘』라 하고 뒤에 기를 추가하여 『 7총묘』라 하고, "임진전망유해지총" 동래의총이라고 불린다.

 

정언섭 부사는 군비를 완비 한 뒤 문교(文敎)쪽으로 방향을 돌려 시술제라는 제실을 짓고 고을 유생들이 학업을 익히 게 하였다. 이 밖에도 정언섭 부사는 관사인 연심당 건립과 청사인 교방, 구휼, 창고인 사 창, 고마청 주사 등을 중건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치적을 남기고 영조 9년(1733) 1월 만 2년 6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해갔다.

 

13.군비를 정비한 박사창

박사창의 자는 겸숙(兼叔), 반남박씨로 숙종 13년(1687)에 태어났다. 경종 1년(1721) 진사에 합격하였고, 영조 6년(1730)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영조 7년(1731) 지평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丞旨)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15년(1739) 8월 동래부사로 부임한 박사창은 임진왜란 후에도 여러번 왜인들의 작폐가 심한 것을 알고 먼 저 왜인들보다 우수한 군비를 갖춰야 한다고 판단, 동래부의 군사시설을 정비하였다. 군기 (軍器)로 흑각궁 7백 50장, 화약 1천 5백근, 화살줄 1백 2조 등 많은 무기를 새로 만들고 보완, 보수는 물론 군관청, 수첩청, 무사청, 이노작대(吏奴作隊) 등의 조직을 완비케 했다.

 

또한 왜인들이 작폐를 제어하기 위해 연향대청, 초량객사, 동래부객사 등의 시설 일체도 갖추었다. 그리고 조정에 글을 올려 왜관내 왜인들이 함부로 관내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용두산 외곽 은산에 복병막 등 동서남북에 각 2개소씩 설치, 복병막을 세운 산을 지금도 복병산 이라 불리고 있다. 그리고 박사창 부사는 1740년에 『동래부지』도 편찬하였다. 부산지방의 향 토사연구에 가장 풍부하고 정확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서문에서 부사는 산천의 험이(險吏)와 군량, 과갑(戈甲), 기치(旗幟) 등까지 상세히 기재,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다고 하였다. 영조 17년(1741 정월에 퇴임해 갈 때까지 1년 6개월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치적을 남겼던 것이다.

 

14.동래부사 고경명

고경명의 자는 이순(耳順)이고 호는 제봉(霽峯) 또는 태헌(苔軒)이라 하며 본관은 장흥이 다. 중종 28년(1533) 11월 30일 광주에서 태어났다. 시문에 능하여 명종 7년(1522)에 20세 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1등으로 급제, 진사가 되었고 명종 13(1588)에는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준재였다. 이후 바로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예문관의 전적(典籍),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다음 해에 외직 영암, 서산, 한산 등의 군수직을 역임하였다. 한편,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辯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고 승 무원판교를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던 것이다.

 

선조 23년(1590) 12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고경명은 이듬해 정월에 당시 일본에 통신사로 간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부산포로 돌아왔을 때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 난이 터지면 순국 할 각오를 이때부터 준비하였던 것이다. 동래부사 시절 조정에서 서인들이 제거될 때 사직 하고 광주 향제에 은거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29일 담양 향리에서 사서들 과 희맹하여 많은 의병을 모았다.

 

종사관 사제 안영, 유팽로와 더불어 50의 노구를 이끌고 선조의 행궁이 있던 평안도로 가고자 북상하는 중 금산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7월 9일 장렬히 순사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예조판서를 추증하였고 뒤에 좌찬성에 가증되고 시호 를 충렬이라 하여 광주의 표충사, 금산의 성곡서원과 칠백의총의 종용사 및 순창의 화산서 원에서 제향이 받들어지고 있다. 시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나 이름을 떨쳤는데 저서로는 『제봉집』 『유서석록』등이 있다.

 

15.동래부사 정현덕

정현덕의 자는 백순(伯純), 호는 우전(雨田)으로, 본관이 동래(東來) 라는 견해와 초계(草溪)라는 견해가 있다 . 철종 1년(1850)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리로 출발하였다. 철종 13년(1862)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 라에 다녀왔고 대원군이 집권하자 그의 심복으로서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원래 동래부 사는 대일외교의 실무의 책임을 갖고 있기에 정현덕은 평소의 소신인 위정척사의 정책을 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조선에 대한 유신을 통고하기로 결정하고, 1858년 12월 관인을 파견 서계를 전달하였다.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새로운 국교를 열기 위해 수 차례의 교섭을 펼쳤으나 단호히 거부하였다. 조선정부와 동래부의 강경한 태도에 일본에 서 정한론이 대두케 하였다. 부사는 일본의 침입을 염려하여 동래읍성을 수축케하여 군의 강화를 기하였다. 이어 이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대원군이 실각하자 그도 따라 파면되었 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형조참판으로 기용되었으나 대원군이 실각 함으로써 파면되고 유배된 뒤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16.민정중

민정중의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峰), 본관은 여흥이며, 많은 명사와 교류하며 많은 사람이 따랐다. 22세에 진사에 오르고 효종 즉위년에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세자시강원 사 서,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교리를 역임하였다. 호남어사에 임명되었다. 상서하여 소현세 자의 빈의 원을 풀어줄 것을 청하였다.

 

국인이 모두 애통해마지 않았으나 감히 진언하는자 없었는데 정중히 홀로 논하니 군인 모두 놀랐다. 현종 때에는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대사헌 을 거쳐 이, 공조, 호조, 형조의 4판서에 오르고 참찬(參贊), 의정부에 오르고 숙종 즉위의 다음해 숭정대부에 가해졌다. 후에 노론, 남인과의 대립에서 여러번 화를 입고 배소에서 졸하였다. 인현왕후는 정중의 제(第) 유중의 딸이다.

 

정중은 효종 9년(1658) 8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익년 3월 21일에 예조참의로 전직기까 지 약 7개월의 짧은 기간 동래부사에 취임하였으나 부사는 이때 임진왜란이 이미 60, 70년 경과하였지만 부산지역의 임진사적의 민몰(民沒)을 걱정하여 고로를 통하여 사료수집 정 리하여 『임진유문』을 남겼다.

 

그 이전의 우리측의 기록은 단편적이 잘 알수 없는 차에 이 기록은 사료적 가치가 높아 동래, 부산, 다대포 전쟁의 항쟁사를 구체적으로 알수 있으 며 또한 공신, 멸사, 민의 실태를 알 수 있다. 시호는 문충이라고 한다.

 

17.절조의 인물 이춘원

이춘원의 초명은 신원(信元), 초자는 입지(立之) 뒤에 춘원(春元), 함평이씨로 선조 4년 (1571에 태어나 인조 2년(1632)에 죽었으며 문신으로 절개가 남달리 뛰어났다. 선조 23년 (1590) 20세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26세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 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직되고 이듬해 정유재란때 광양 현감으로 남원싸움에서 왜적 과 싸워 위기에 빠진 우리군사들을 구원하기도 했다.

 

그후 여러 벼슬을 거쳐 광해군 5년 (1613)에 좌승지에 이르렀을 때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반대, 항론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 해 복직되어 병조참의에 올랐다. 광해군 9년(1617) 충청도관찰사로 재직중 대북파들이 인 목대비를 성궁에 유폐시키려 들자 이를 극렬히 반대하다가 파직당했다.

 

광해군 12년(1620) 지돈령부사로 등용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1623년 인조가 반정 하여 구신들을 등용할 때 그에게 한직을 맡게 하려 했으나 사양하고 은퇴했다. 동래부사 재임시는 목민의 일에 힘쓰는 한편 관내의 해운대, 태종대, 몰운대, 겸호대, 동대, 온정, 정 과정 등 여러 명승과 고적이 흐트러졌음으로 살펴 가꾸었다. 이 명승에 제목을 붙여 시를 지어 널리 알렸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동래지방은 15년 동안에 17인의 수령과 2인의 판 관이 교체되어 평균 재임기간이 1년도 못되는 형편이었으며, 임진왜란의 피해로 도탄에 빠 져 있었다

 

이러했던 동래가 대체로 평정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이춘원부사 시절부터였다. 선조 40년(1607) 7월 동래 부산의 곳곳을 답사하여 백성들을 위무하고, 그가 본 것을 시로 적어 문풍을 일으켰다. 그의 시는 인빈헌의 내주신영(萊州新詠)으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18.종두법의 지석영

지석영의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본관은 충주로 1882년에 식년문과 을과에 급 제했다. 전적과 지평을 역임하고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設)』을 저술했다. 1886년 장령 으로 시폐를 논하다가 1887년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892년에 석방 된 후 형조참의, 승지를 거쳐 1895년 동래부사 및 부산재판서 판사가 되었다. 동래의 동래 부사 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그뒤 그는 경성의학교 교장과 학부내의 국문연구소가 설치 되자 그 연구원이 되었으며, 1906년에는 『자전석요』를 집필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이 컸다. 그가 서울에서 1935년 2월 1일 별세하자 사회장으로 장의가 집행되었으며 그의 공덕 비가 1988년에 동래 금강공원 안에 동래부사 송촌 지석영선생 공덕비란 이름으로 세워졌 다. 그의 개화의지를 높이 산 것이다.

 

그는 1876년 수신사의 수행으로 일본에 갔던 그의 스 승 박영선으로부터 일본인의 「종두귀감」을 전해 받고 천연두 예방접종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종두를 얻는 방법과 접종하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는 1879년 부산에 있는 일본인 병원인 제생병원으로 와서 종두접종 방법을 배워 그해 겨울 충 주 덕산면의 그의 처가 가족들에게 종두를 최초로 실시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종두 시술이었다.

 

19.청백리 이안눌

이안눌의 자는 자민(子敏)이며, 호는 동악(東岳)이다. 덕수이씨로 선조 4년(1571에 태어나 선조 32년(1599)에 정사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형조, 호조, 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601년 예조정랑으로 진하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후 성균관 직강(直講 )으로 명나라 사신이 오면 이를 맞아들이는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기도 했다. 선조 41년 (1608) 2월 동래부사로 부임, 선조 42년(1609) 7월에 퇴임해갈 때까지 동래지방에 많은 업 적을 남겼다. 1601년 담양부사, 1613년 경주부윤을 거쳐 1615년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 調), 동부승지를 지내고 문신정시에 급제한 후 1671년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강화 부윤으로 나아갔다. 이 해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 사직하고 은퇴생활을 하다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등용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특진관으로 왕을 모실 때 조정의 시비가 밝지 못하고 상벌이 공평하지 못함을 극간하여 대신들을 공박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관직운은 그의 바른 말을 싫어하는 조정 대 신들에 의하여 배척됨으로써 점점 소외되어 갔다. 그러나 항상 고결한 심지를 지녀 그 뜻 이 광명정대하였다.

 

정묘화란 때는 인조가 피난처인 강화도에서 그곳 주민들이 강화부윤 의 치적을 칭송하는 소리를 듣고 그를 불러 강화유수직을 맡게 하였으며, 이어 형조참판을 거쳐 인조 9년(1631에는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다음해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 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추존(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제왕의 칭호를 내림)을 허 락받아 원종의 시호를 받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예조판서가 되어 예문관제학을 겸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청렴 근면한 관리 5명을 뽑는데 들어 숭록대부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 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다녀와서 죽으니,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죽은 후에 그의 검소한 생활로 청백리 에 녹선되었다. 선조 41년(1608) 2월에 동래부사로 그는 이곳 임진왜란 때 의사적을 조사 하며, 당시 정경을 담담하게 읊은 『행하유감』시가 전한다. 한편, 송상현공을 모신 사당 인 송공사에 휘진제를 올려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을 애도하였던 것인데 이때 지낸 휘진 제(諱辰祭=忌祭)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 바로 오늘날의 송공단을 남기고 단제가 끊이지 않 게 한 초석이 된 것이다.

 

20.안용복

독도를 둘러싼 일본과의 분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양국 간의 현안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일본은 영해의 직선기선을 주장하면서 우리와의 어업 협정을 파기하고 새 로운 협정을 맺을 것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영토확장을 기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 재의 상황에서 울릉도 영역이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한 안용복은 일찍이 영토문제의 중요 성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역사적 인물로 남게 될 것이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때 사람으로 동래의 수군이란 기록만 전할 뿐 그의 약력은 전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리측 사료인 『숙종실록』, 『비변사등록』등에 약간 언급되어 있을 뿐 오히려 일본측의 사료에 상세히 남아 전한다. 수군에 들어가 능로군 (能櫓軍)으로 근무 하였다. 숙종 19년(1693) 봄 안용복은 동래어민 40여 명과 울릉도 부근에 고기잡이를 나갔 다가 같은 해역에서 고기를 잡던 일본어부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중과부적으로 일본에 잡혀가게 된 안용복은 호오끼태수를 만났을때 "울릉도는 우리 영토다. 너희들이 함부로 고기 잡이 하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또 에도막부로 이송되어 갔을 때도 같은 항의를 하여 막부로 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승인하는 서계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귀환길에 대마도주에게 서계(書契)를 뺏기고 50여일을 갇혔다가 부산 왜관으로 옮겨져 또 40일을 구금됐으며 동래부사에게 인도된 뒤에도 공치사는 커녕 승인없이 월경하 였다하여 도리어 형벌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여름 사(赦)를 받아 출옥한 안용복 은 울릉도에서 돌아온 어부들로 부터 일본인 행패로 도저히 작업을 할 수 없다나는 고충을 듣고 추격하다 옥기도(玉岐島)로 들어간 그는 옥기도주를 만나 울릉도, 독도의 감세관이라 속이고 "다시 왜인들이 울릉도 근처에서 고기잡이를 하면 가차없이 죽이겠다"고 경고했다.

 

그는 대마도주의 야심과 죄상을 추궁하여 서약서를 받아 의기양양하게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강원감사 심평은 상은 고사하고 도리어 그들을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 조정에서는 월경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하려고 했으니, 이때 남구만, 윤지완 등 원로대신의 변호로 사형은 면하고 귀양을 가게되어 일생을 마쳤다.

 

이는 당시 조선조정과 대마도주간에 피차의 비합리적인 월경을 금지한 탓도 있었지만 조정의 외국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용복의 월경은 헛되지 않았다. 일 본 막부에서는 안용복의 항의로 다께시마는 이나바에 속했다고 하나 아직 일본인이 거주한 일이 없고 또 거리로 볼 것 같으면 이나바로부터 1백 60여명리, 조선으로 부터 40여 리이니 조선 땅인 것이 명백하다고 밝히고 일본인이 울릉도에 나가는 것을 금했으며 그 뜻을 조선 정부에 통고하도록 대마도주에게 명했다. 대마도주는 내심 불쾌했으나 막부의 명(命 )인지라 숙종 22년(1696) 10월 우리나라에 그 뜻을 전하고 숙종 23년 2월 정식으로 동래부사 이세재에게 서계를 보냈다. 안용복의 국가수호의 의지를 기념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수영공원에는 그의 충혼탑이 세워져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21.녹도만호 정운

정운의 자는 창원(昌原), 하동인, 영암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 웅천 현감, 제주 판관을 거쳤다. 1592년 임진난이 일어날 때는 녹도만호였다. 임란 초기에 경상우수사 원균은 도망하여 곤양부근에 이르렀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때 이순신의 휘하 장수들은 관할론과 부원론으로 대립되었다. 이때 정운은 어영담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경상도는 우리의 국토가 아닌가하고, 부원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이순신의 경상도 출병이 이루어졌다. 그는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 적진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해전에 참가 분전하였다. 8월 24일 전라좌수영군은 경상좌수영군과 합동하여 부산포를 공격할 것을 결정하였다. 9월 1일 이른 아침 부산포에 향하고 8시경 몰운대를 지나자 돌풍이 갑자기 일어나고 파도가 넘돌아 함대를 정비하고 화준구미(花樽龜 尾)에 이르렀다. 여기서 왜선 5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왜선 8척, 서대포 앞바다에서는 왜선 9척, 절영도에서 왜선 2척을 만나 모두 격파하였다.

 

이어 부산포내에 돌선하였다. 이때 적선 400여척이 선창 동쪽의 산기슭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때 정운은 우부장(右部將)이었다. 이에 우장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분전하였다. 이때 100여척을 격파, 많은 적군의 군기를 노획하는 한편 많은 적군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정운은 회군할 때 적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장의 시호가 내렸으며, 영암의 충절사와 이곳 동래충렬사에 봉안되어 있다.

 

22.다대첨사 윤흥신

윤흥신은 파평인으로서 인종 때의 권세가인 윤임의 아들이라고 하며, 진천현감을 거쳐 1592년 임진난 때 다대포첨사로 부임하여 역전 끝에 순사하였다고 한다. 임진난 당시의 기 록인 『징비록』에 『다대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 죽었다』고 하였고 『재조번방지(再 造蕃邦志)』"왜적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와 다대포를 함락시키니 다대 첨사 윤흥신이 힘 써 싸우다가 피살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임진란이 끝난 선조 37년(1604) 6월 25일에 공표된 선무공신록권에도 원종 1등공신에 올라 있다.

 

그런데 윤흥신의 사적과 다대포의 사적이 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영조 때 동래부사 조 엄의 『윤공유사(尹公遺事)』, 동래부사 강필리의 『윤공사절기 (尹公死節記)』에 비롯된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다대포진에서는 선조 25년(1592) 4월 14일 적의 내습이 있었으나 첨사 윤흥신공을 비롯한 군, 관, 민은 성을 굳게 지켰으며, 15일 적군이 동래성을 공격할 때 한편으로는 적군의 공격을 다시 받고 첨사와 군, 관, 민은 끝까지 항전하여 첨사이하 많은 희생을 내고 성은 함락되었다. 윤흥신은 때마침 진에 와 있던 동생 흥제와 함께 순사하였다고 한다. 윤흥신공은 동래 충렬사에 영조 48년(1772년)에 배향되어 그의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 있다.

 

23.동래교수 노개방

노개방의 자는 유한(維翰)이요, 본관은 풍천이며 밀양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문재가 있었음은 그의 동학인 배대유의 제문과 조존성 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충분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의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던 것도 아울러 알 수 있다. 피나는 가난속에서 뛰어 난 재주를 가지고 열심히 학문에 정진한 끝에 과거에 급제 하였으나, 뒷바라지 해주는 사람이 없어 늙은 어머님을 봉양하려는 뜻에서 자원하여 동래향교의 교수직을 맡았던 것이 다. 그가 죽은 뒤 174년이 되는 해에 동래부사 엄린이 적은 『동래교수 증도 승지 노공유사 기』에는 노개방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참작하여 가장 완비된 전기를 쓰고 있다.

 

『노공유사기』에 의하면, 노개방의 선대사적은 확실하지않고 다만 "국조과방록에서 아버 지는 노일이라 하고, 밀양유림에서 기록한 것에서는 부인이 여흥이씨로 학생 경옥의 딸이며 그 증조부는 한림(翰林)태(跆)"라고 하였다. 그는 가정계해(嘉靖癸亥) 즉 명종 18년(1563년)에 나서 2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래교수로 부임하여 30세에 동래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상이 노개방에 대한 간략한 인적사항이다. 충과 효와 예는 선비들의 기본교양임에 이 선비정신을 다 실천하려고 노력한 이가 바로 노교수인 것이다. 미관말직에 있는 그가 살아 남았다 하더라도 아무도 탓할 이가 없는 당시 상황에서 굳이 죽음의 직장으로 다시 돌아와 선성(先聖)의 위패를 봉안하고 대의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은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이러 한 그의 충절로 뒤에 그의 사적이 알려지자 도승지에 증직되고 동래 충렬사와 송공단에 배향되었으며, 향리인 밀양의 중봉서원(中峯書院) 에 봉안되어 그의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 있다.

 

24.동래부사 송상현

송상현은 자는 덕구(德求)요, 호는 천곡(泉谷)으로 본관은 여산이다.

 

선조 3년(1570), 20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정원정자로 보임되었다. 선조 11년(1578)에 저작랑이 되고 이듬해에 박사에 서임되었다가 나아가서 경성판관이 되었다. 선조 16년에 사헌부지평으로 돌아와 예조, 호조, 공조의 정랑(正郞)이 되 었다. 이듬해인 1548년 종계변무사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 20년에 다시 들어와 지평(持平)이 되고, 동 21년에 백천군수로 나아가 3년만에 전직되어 들어와서 충훈부경력, 사헌부집의, 사간원사간, 사재군자감정이 되었다. 선조 24년(1591)에 집의 (執義)로서 통정대부에 올라 동래부사가 되니 곧 임진왜란 바로 전년이었다.

 

송상현은 동래로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집무를 수행함에 있어 오직 성의와 신의로써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그들 따르기를 마치 부모와 같이 하였다. 성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였으며, 임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1592년 4월 14일 오전 왜군에 의해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전투가 끝나자 적군의 일부 병력은 동래성으로 진출하였다. 부산과 동래는 가까운 거리이고 또 부산의 행정관할은 동래부에 있었기 때문에 적군의 동태는 곧 동래에 알려졌다. 이 때에 경상좌병사 이각이 울산병영에서 동래부에 왔으나 적의 대군이 밀어닥친 것을 알고 도망하였다.

 

한편, 양산군수 조영규의 구원이 있었다. 동래성에 적군이 침입한 것은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14일로 그들은 여세를 몰아 내침하여 포위하고 15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전투가 전개되었다고 한다. 송부사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비하고 있었다. 적은 취병장(聚兵場, 현 동 래경찰서)에서 진출하여 백여명의 군사로 하여금 한 목패를 남문밖에 세웠다. 송부사는 군 관 등에 명하여 나가보게 하니 글에는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고 쓰여 있었다.

 

송부사는 또한 목패에다 "싸워서 죽은 것은 쉬어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고 글을 써서 적 중에 던졌다. 막중한 대군을 앞에 두고 송부사는 결사의 굳은 뜻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적군은 15일 아침 적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아군의 주력은 남문루를 중심으로 집결되었다. 남문에서 피아 양군이 사력을 다해 격전을 치렀으나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민, 관, 군이 죽을 힘을 다하여 결사항전 하였으나, 워낙 막강한 적군의 무차별 살육이 감행되는 가운데 성민들의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내를 이루었다.

 

송부사는 문인답게 죽을 각오를 표시하였던 것이다. 호상에 걸터앉아 사람을 시켜 빨리 조복을 가져오게 하여 갑옷 위에 입고 의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히 호상에서 내려 북향사배하고는 붓을 잡아 부채에 "외로운 성에는 달이흐려지고 다른 성진에는 지척이 없다. 군신의 의가 무거우니 부자의 은정 그 어찌 가벼우리까라고 글을 써서 부모님께 하직의 인사를 사람을 시켜 보냈다"고 한다.

 

송부사의 주위에는 군관 송봉수, 김희수 등 4 ∼ 5명, 향리 대송백, 부리, 소송백, 관노 철수, 매동 등이 좌우에 열입하고 있었는데 적병들이 앞으로 핍박함에 송부사, 김희수, 대송백 등은 격투 끝에 전사하였다. 이 동래부의 전투에서 이름을 전하는 자는 송부사의 측근에는 종행인 신여로, 금섬이 있으며, 이밖에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교생 문덕겸 등이며, 부민으로는 다만 김상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이촌녀 등이 전한다. 순사한 후 선조 27년(1594)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였으며, 충렬공의 시호를 내리고 숙종 7년에는 좌찬성을 가증하였다. 동래의 충렬사, 송공단, 고부의 선충사, 청주의 신항서원, 송경의 숭렬사, 경성의 화곡서원에서도 모시고 있다.

 

25.부산첨사 정발

정발의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무과를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해남현감을 거쳐 북변 종성에 여진족의 침구 가 있어 원수의 막하로 부임하여 구란을 평정하였다. 그뒤 거제현령을 지내고 들어와 비변 사의 낭요(郎僚)가 되어 팔사의 낭관을 겸하고 있다가 위원군수로 제수되기도 했다. 강섬 의 천거로 훈련원 부정(副正)이 되고 다시 사복시로 옮겼다. 이때부터 왜인이 침략할 기미 가 보였는지 조정에서는 드디어 그를 절충장군으로 품계를 올려 부산진첨사로 삼았으니 이 해가 바로 임진왜란 발발해인 1592년이었다.

 

부산으로 부임할 때 아들과 동행하였다. 왜인의 침입이 예상되어 아들을 억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자 하였다. 아들은 남아있기를 간청하니 "너는 돌아가서 내 어머니와 할머니를 봉양하라"면서 종자를 시켜 떠나도록 하였다. 한편, 남행하고 있던 조방장 이정헌을 막빈 으로 초빙하여 부산진성의 방위를 함께 의논하였다.

 

임진 4월 13일 저녁 왜적의 제1군 18,700명이 부산앞바다에 쇄도하였다. 13일 당일에는 적 군은 절영도 전방에서 가박하고 공격은 개시하지 않았다. 다만 왜군의 장인 소서행장(小西 行長)의 막료인 대마도 주(主)인 종의지(宗義智)가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부산 진성의 경비상황을 정탐하고는 휘하 장수인 평조신(平調信)을 시켜, 군의 내침의 사유를 말하고는 길을 빌리는 가도를 요구하는 글을 목판에 쓴 것을 성밖에 세웠다고 한다. 이때 정발은 가도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그리고 일전을 불사한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전투태 세를 공고히 하였다.

 

이튿날 14일 적은 예측한대로 부산포 우암에서 삼분하여 결진하고는 배를 포안에 붙여 차 례로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적군은 성을 첩첩으로 포위하였다. 절대다수의 병력을 가 진 적군은 신무기인 조총을 마구 발사하여 천지를 진동시키며 성을 넘어오려고 하였다. 이 에 아군은 이를 제지하기 위해 4면에서 혈전을 벌였다. 총탄이 터지는 소리 화살이 나는 소 리 순식간에 처절한 공반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정발은 휘하의 장사를 거느리고 성내를 순시하며 독전하였다.

 

군, 성민은 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모두 죽게된다는 마음으로 분전을 계속하였다. 정발은 이미 예측한 일이나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무인답게 죽을 각오를 하고 더욱 사졸을 격려하며 자신도 분전하였다. 그러나 노도와도 같이 밀어닥쳤던 적군의 일부 군사들 이 북쪽의 허술한 곳을 넘어 쳐들어왔다. 따라서 순식간에 성중(城中)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피아쌍방 육박전이 전개되고 적의 무차별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정발도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파상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의 수는 늘기만 했으며 소수 군민의 필사적인 저항으로는 이를 막을 도리가 없었고 차례로 순사하며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사한 이의 이름을 남기고 있는 자는 적은데 순사한 애향, 용 월은 정공단에 합사하고 있다. 영조 37년(1761 좌수사 박재하가 공의 전망비를 세웠으며, 영조 42년(1766)첨사 이광국이 정공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시호를 내리어 충 장공(忠壯公)이라 하고 좌찬성을 증하였다.

 

26.양산군수 조영규

자는 옥첨(玉瞻)이며, 직산인으로 수의부위 준(準)의 아들로서 중종 30년(1535) 장성부 백 암리에서 출생하여 명종 6년(1551) 무과에 급제하였다. 훈련원 초관을 거쳐 사복시 주부, 판관이 되고 이어 제주판관, 무장현감이 되었다. 그후 부친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떠났다 가 다시 영암, 용천, 낙안, 영해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에 양산군수 로 부임하였는데 얼마되지 않아 왜적이 쳐들어왔다. 병사 이각은 성을 버리고 먼저 달아나 고 열군(列郡)은 풍미하여 믿을 바가 없었다. 그는 이미 전세가 기울어졌음을 탄식하였으 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말을 달려가서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말하기를 "국사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공은 장차 어찌하겠소" 하니 송상현은 "마땅히 이 성을 굳게 지킬 따 름"이라 답했다. 이에 그도 "이 환란을 당하여 마땅히 그대와 같이 이 성을 지키다가 나라를 위하여 죽을 따름이라"라고 했다.

 

송상현이 그의 손을 잡고 크게 기뻐하자 그는 "나는 죽음으로 싸우기를 결심했으나 다만 노모가 양산에 계시니 돌아가 하직한 후에 다시 오겠다"하고 곧 양산으로 돌아가 어머님께 작별을 고했다. 말을 달려 동래로 오니 성은 이미 포위되어 위급한 가운데 있었다. 칼을 빼 어들고 거세게 말을 채찍질하니 적이 잠깐 피하는 틈에 성중에서도 그가 다시오는 것을 알 고 급히 성문을 열어 받아들였다. 그후 그는 송부사와 같이 힘써 싸우다가 순사하였다. 숙 종 때에 호조참판을 추증하였으며, 장성 모암서원, 양산 충렬사, 동래 충렬사에 배향하고 있다.

 

27.제생 문덕검

제생이란 향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문덕겸은 교수 노개방 밑에서 공부 하던 학생으로 임난을 당하여 선생과 같이 순절한 사람이다. 문덕겸은 교수 노개방이 밀양 으로 어머니를 뵈러 간 사이에 적이 밀려 왔으므로, 향교에 봉안했던 선현의 위패를 스스 로 성중의 정원루로 옮겨 모신 뒤 그 곁을 떠나지 않다가 적이 쇄도하매 돌아온 노교수와 함께 그 앞에서 조용히 순사하였다. 그는 남평문씨로서 동래에 옮겨와서 살았는데 당시의 집은 여고리(현 사직동)였던 모양인 듯 적병이 북으로 올라간 뒤에 종 검산이 몰래 덕겸의 시체를 여고리로 옮겨다 묻었다.

 

자식으로는 아들 건중(建中)이 있었으나 일찍 죽고 부인 민씨가 자부 정씨와 9살 먹은 손 녀를 데리고 덕겸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고부가 함께 길가에서 죽었다. 종 검산이 여주인 을 찾아 헤매다 성의 서문에서 찾아내었는데 9살짜리 손녀가 두 시체 밑에 깔려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검산은 손녀를 금강골의 바윗굴(金岡谷 岩窟)에 숨겨두고 두시체를 업고가서 묻었다. 문덕겸 부부는 한묘에 묻혔으며 손녀는 자라서 동래인 김천상(金天祥)에게 시집갔 다. 김천상의 후손은 동래 유생 이동형에게서 비문을 받아 덕겸의 묘에 비석을 세웠다. 검 산은 또 주인집 토지문서를 우물돌 밑에 묻었다가 뒤에 찾아내니 이로인해 문씨의 전답과 토지가 모두 김씨에게로 돌아갔다. 문덕겸은 뒤에 동래충렬사에 배향되고 영조 13년에는 호조좌랑에 증직 되었다.

 

28.제생 양조한

문덕겸과 함께 향교의 제생으로 노개방교수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던 양조한은 임진란때 순절하였음에도 그 사적이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사적을 밝혀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한 이유이며, 또한 잘못되어 그 동생되는 양통한(梁通漢)의 사적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양조한 사시말에 의거해 살펴 보면 본래 가매실에 살던 양조한은 임진란이 일어나매 문덕겸과 의논하여 향교의 위판들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땅에 가려묻고 오직 선성(先聖)과 오현(五賢)의 위패만을 모시고 성내 정원루로 옮겼는데 적탄에 맞아 노 개방, 문덕겸 등과 같이 전사하였다.

 

아들 양홍도 전사하였으며, 당시 13세 손자 부하(敷河)는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가 31세때 고국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양통한은 그가 형 양조한의 손자임을 확인하고 재산과 노비를 돌려주고 장가를 보내서 살게 하였다. 부하는 두아들과 세딸 모두를 한울타 리 안에서 함께 살았다. 일년에 2번씩 소를 잡고 일문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등 베풀었고 ,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송시열이 남문비기를 쓴 것은 임진란 후 77년 되는 해이고 그 비를 세운 것은 경술 즉 1670년인데 부하가 91세때의 일이다. 그 비문에 양조한의 이름 대신 양통한의 이름을 썼기 때문에 이것이 불씨가 되어 양조한의 후손과 양통한의 후손사 이에 소송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으로는 송시열이 쓴 비문을 감히 고치지 못했다. 그 결과 양조한은 사절한 사람이 안되고 대신 살아있었던 동생 양통한이 사절공신이 되었던 것이다.

 

뒤에 양통한은 난후의 호적에 보이고 또 『화왕수성록』에도 이름이 보임으로 사절한 사람은 형인 양조한 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미 양통한은 비문에 실리고 공신녹권에 실려있고 또 의병에 가담하여 창녕 화왕성에서 곽재우장군과 같이 나라를 지킨 공이 있으므로 결국 두 사람은 다 증직하고 표창하도록 결론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양조한은 향교에서 훈도를 하였기 때문에 호조정랑을 증직하고 양통한은 호조좌랑을 증직하였다.

 

29.김병규

김병규의 호는 정산(井山)으로, 1887년 동래읍에서 출생하여 1962년 타개하기까지 한국 초창기 교육계에 투신하였고 다시 은행가로, 또 광복 후에는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하는 등 다채로운 생애를 보냈다. 그는 당시 동래지방에서 대학자로 알려진 외숙 지전 이광욱의 밑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한편 와세다대학 강의록을 읽어 근대학문을 습득하여 개화사상을 가졌다. 근대교육에 관심을 가진 그는 개양 학교에 입학하여 근대문화를 익혔으며, 1906년 개양학교를 마치고 동래의 삼락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이 삼락학교는 1905년 동래 기영회가 설립한 것으로 뒤에 개양학교를 흡수, 합병 하여 동명학교(동래고전신)로 교명을 바꾸었다. 이곳에서 그는 학문에 정열을 쏟고 학생에게는 근대사상을 주입하는 한편 민족사상을 주입시켰다.

 

그후 학교를 떠나 동래지방의 유력자 윤병준, 박인표, 오태환 등이 동래은행을 설립하고, 1918년 8월 동래은행 본점 지배인으로 취임하여 거창 등지에 저점을 설치하였다. 1927년 감사역이 되고 1931년 상무역에 취임하여 1933년 7월 호남은행으로 합병될 때까지 은행가로서의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933년 동래산업조합이 창업됨에 따라 초대 조합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일제시기 지방유지들의 권유로 동래군의 초대 민선 도의원이 되었다. 관선 도의원 때는 일부에서는 친일파라는 비난도 있었으나 그는 도의회에서 도예산심의를 거부하여 파문을 일으켜서 그의 진면목을 다시금 인식시켰다. 광복이 되자 미군정청에서는 그를 경남내무국장에 임명하고 다시 경남지사로 추대하였다. 민족발전이란 신념을 갖고 부산지방 민립대학기성회 발족에도 힘썼으며 부산대학의 발족에도 공이 컸다.

 

30.박기종

1839년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초량왜관의 일본상인과 교역할 수 있는 특권상인인 동래상고(東萊商賈)가 되어 상업에 종사하며, 한편 일본어를 익혔다. 그는 어장(영도 한진중공업앞 해역)과 김해지역의 토지를 매입하는 등 부산의 부호가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그해 제1차 김기수 수신사 일행이 도일 할 때 동행하여 일본의 근대적 시설, 문물을 접하였고, 그후 또 한차례 일본으로 건너기 일본의 제철소, 조선소, 철도를 견학하고 해운업을 살폈다. 1895년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신교육기관인 부산개성학교를 세웠다.

 

1886년 10월 부산항 경무관에 임명되어 1898년 8월까지 근무하였고, 한편 고장의 상업발전을 위해 영주동에 상무소를 설립하였다. 또 1897년 9월에는 부하철도(부산 ∼ 하단)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901년 일제의 방해로 인해 부하철도는 개설상 큰 어려움을 겪고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1896년 8월 외부 참사관으로 승진, 1899년에는 동지를 구하여 대한철도회사를 발기했으나, 그 뜻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1902년 6월 자기의 전재산을 투입하여 영남지선 철도회사를 설립 기공했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의 강압으로 그의 이권을 빼앗기고 재산도 잃었다. 1905년 6월 그는 변리공사라는 한직을 받기는 했으나 그는 계획했던 일이 좌절된채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속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부산에 있어 개화의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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