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구를빛낸위인은누가있나요?

해운대구를빛낸위인은누가있나요?

작성일 2011.05.01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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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를해가야되는데...쌩이해운대구를빛낸위인을조사해오라고해서요

좀도와주세여.....넹?부탁드려용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해운대구를 빛낸 위인)

 

1.양지 (1553~1592)


자는 언신, 남원인. 내제 양성지의 6대손으로, 31세때 음사로 적성현감을 지내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나이 40으로 삭녕군수로 부임하였는데, 부임한지 수개월에 왜적이 철원에 들어가 진을 쳤다. 공은 “철원에 적의 진지가 들어섰으니 미구에 적이 삭녕을 공격하리라. 조그마한 성과 부상병으로 사나운 적을 어찌 당하겠는가마는, 죽을지언정 난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된 도리요, 더구나 국록을 먹는 사람으로 어찌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내 얼굴에 검은 사마귀가 있고 내가 쓴 휘양에 흰 테를 둘렀으니 이를 표시로 내 시체를 수습하라” 고 하였다.

 

얼마 뒤 왜적이 밤을 틈타 내습하자, 공은 군사들과 함께 활을 당겨 항전하다가 적에게 사로잡혀 적을 꾸짖고 항거하다가 마침내 경기감사 심대와 함께 순절하였다. 집안 사람들이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단 포동면 아야동 임좌에 장사지내었다. 정조 때 조정의 명으로 삭령에 표절사를 세워 사액하고 사충을 제사지내었고,
이조판서의 증직과 충민의 시호를 내렸으며, 온양 구령리의 후손 집 앞에 정려를 세웠는데, 이 정려는 그 뒤 청양 아암으로 옮겼다. 반송의 삼절사에서 향사한다.


2.양조한


동래사람으로 젊어서 문덕겸 등과 더불어 동래 향교의 제생이었다. 노개방이 고을 교수로 부임하자 그를 따라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제생 가운데 반수(수석의 자리에 있는 사람)였다.

 

임진년 4월 13일에 왜적이 바다를 건너와서 부산진성을 포위하고 다음날 동래로 거쳐 들어올 때 동래향교의 교수 노개방은 마침 고향에 귀성차 가고 없었다. 이에 공은 제생 문덕겸과 더불어 문묘의 여러 위판 중에서 종향위, 종사위의 위판들은 땅에 매안하고, 오성의 위판을 받들고서 동래성 중의 정원류에 이안하여 급히 돌아온 노개방과 함께 그 위판을 지키다가 왜적이 쏜 총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영조때 호조정랑에 증직되고 송공단에 배향되었다. 삼절사에서 향사한다.

 

공의 휘는 조한이니 아버지 휘 겸이 진사로서 처음으로 동래에 살았다. 공은 천성이 강개하여 절의를 스스로 인정하였다.

 

본부의 향교 교수인 노개방공에게 수학하였는데, 그 학문은 의리의 실천을 우선하고 글짓는 사장은 뒤로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명망 있었던 문덕겸 같은 이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아들 흥은 공과 함께 죽었으며, 손자 부하는 포로가 되어 왜국에 들어갔다가 19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3.문덕겸


임진란 때 동래향교의 제생으로서 양조한과 함께 문묘의 오성 위판을 받들고 동래성에 들어 가서 정원루에 봉안하고 부사 송상현, 교수 노개방 등과 함께 적에게 대항하여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오성의 위판을 매안하고 북향재배한 뒤에 적의 협박에 굴하지 아니하다가 해를 당하였다. 뒤에 호조좌랑에 증직되고 송공단에 모셔지고, 동래 충렬사에서 철향하였다. 반송의 운송제에서 향사한다.

 

충렬사지에 실린 부사 엄린이 지은 문덕겸전은 다음과 같다.

 

문덕겸이란 사람의 아버지 이름은 경위이다. 그 선대는 남평 사람으로 후손이 동래로 이사하였다. 만력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 와서 먼저 부산을 함락하고 잇달아 동래성으로 들어왔다. 당시 황급하여 백성들은 모두 꿩이나 토끼처럼 산으로 피난하였는데, 덕겸은 제생으로서 집을 돌보지 아니하고 곧바로 향교로 갔다. 교수 노개방이 마침 본댁에 돌아갔기에 향교 안은 텅 비어 사람이 없었다.

 

덕겸은 선성의 위판을 받들어 성 안의 객관에 있는 정원루로 옮겨 봉안하였다. 잠시 뒤에 교수 또한 도착하여 함께 지키며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성이 포위된 지 하루 만에 함락되자, 덕겸은 교수와 함께 순절하였다.

 

성을 함락한 적은 군사를 모조리 이끌고 북으로 올라갔다. 덕겸에게는 종 검산이 있었는데, 그가 몰래 덕겸의 시신을 가져다가 읍 서쪽 여고리에 묻었는데 곧 덕겸이 살던 곳이었다.

 

덕겸에게는 아들 건중이 있었는데 먼저 죽었다. 처 민씨는 건중의 처 정씨와 아홉 살 난 손녀를 데리고 덕겸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함께 길에서 죽었다. 검산은 다니며 여주인을 찾다가 성 서문에서 아홉 살 손녀가 두 시신 아래에서 거의 죽어가는 것을 만났다. 검산은 손녀를 금강곡 바위 굴 속에 숨겨두고, 또 두 시신을 업어다가 묻었는데, 지금 덕겸의 묘소는 실상 민씨와 합장한 것이라고 한다.

 

난이 평정되자 본부에서는 충렬사를 건립하여 순절한 여러 신하들을 향사하였는데, 뒷 사람들이 덕겸을 함께 배정하였다. 영조 13년에는 관찰사의 건의에 따라 호조좌랑을 증직하였다.


4.양통한


조한의 아우로서 자는 이호이다. 형 조한과 함께 향교에서 수업하였는데, 왜적이 성을 포위하던 날 마침 외출하였다가 형이 순절한 소식을 듣고는 복수를 맹세하고, 의, 숙 두 아들을 데리고 곽망우당이 창의하였다는 화왕산성으로 달려가서 의거에 동참하였다.

 

숙종 때 정려를 받고, 영조 때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삼절사에서 향사한다. 부사 홍희조가 지은 양좌랑전은 다음과 같다.

 

좌랑 양통한은 자가 이호이며 어계가 그의 호이다. 임진왜란에 공은 마침 성밖에 있었는데 정랑공이 성묘의 위판을 모시고 성안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개연 분발하여 적과 싸워 죽음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화왕산성에서 곽망우당을 따랐다. 곽공은 말을 나누어 보고는 칭찬하며 특별한 인사 한 사람을 얻었다고 하였으며, 방어하는 계획이나 군사를 먹이는 일 등을 함께 의논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모두 적의하게 하였다. 남쪽 변방이 거듭 온전하였던 것은 이 거사에 힘입어서이니 공이 전후로 세운 공을 어찌 적다 하겠는가. 숙종 을해년에 관찰사의 장계에 따라 정려를 내리고, 영조 병진년에 또 관찰사의 요청에 의거하여 호조좌랑에 증직하였고, 아들 의는 검지중추가 되었으며 숙은 참봉에 임용되었는데, 군공을 기려서였다.


5.문세휘 (1562~1639)


자는 세평, 호는 백수제. 임진왜란에 동래성이 함락되자 의병장 김정서 등 24인과 함께 흩어진 군사 수백 인을 모아 적과 대항하였고, 정유재란에는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화왕산성을 지키며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만력36년에 부사 이안눌이 김정서 등과 함께 별전공신으로 포충 복호의 완문을 내렸고, 영조 12년에 관찰사 민응수의 요청으로 장예원판결사의 증직을 받고, 영조 45년에 다시 관찰사 김한기의 요청으로 24공신에게 가증할 적에 통정대부 병조참의의 증직을 받았다. 묘소가 반송동 산 7번지에 있고, 묘소 아래 운송제의 상의단에 모셨으며, 동래 충렬사에서 향사한다.

 

공의 휘는 세휘요 자는 세평이며 호는 백수제이다.

 

가정 임술년에 공이 태어났다. 천품이 탁월하여 큰 절조가 있었고, 뭇 서적을 두루 읽어 괴벽한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사귐에 소소한 예절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선배와 어른들이 원대한 제목으로 기대하였다.

 

임진왜란에 왜적이 대거 침입하여 우리의 각처 진영이 함락되자, 공은 붓을 던지고 분연히 일어서서 흩어져 도망한 군졸 수백인을 수습하여 의병장 김정서공 등 24인과 더불어 힘써 싸워 격파하니 군사의 사기가 비로소 진작되었다. 정유년에 곽재우공을 따라 함께 화왕산성을 지키며 특별한 공적을 많이 세웠고, 난이 끝나자 2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인조 기묘년에 죽어서 기장 운봉산 아래 감좌언덕에 장사지내었다.

 

6.김희수


임진난 때 동래도호부의 비장 군관으로 동래부사 송상현공을 호위하며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군자감판관에 증직되었고, 송공단 동단에 모셔졌다.

 

공은 김해김씨요 가락 태조왕 후손 김녕군 목, 자 경중조의 십세손이니 자는 운손이요 호는 지곡이시다.

 

그 묘소가 우1동 해운대여고 부근 선황곡에 있고, 순종 12년(1918년) 후손들이 묘소에 묘표를 건립하였고, 1992년에 공적비를 건립하였다.


7.구영취


호는 포함, 창원구씨 종길(1363 - ?)의 8대손으로, 임진란에 응진, 응남, 응달 등 세 아이들과 함께 동래성 전투에 참여했다가, 동래성이 함락되자 소산역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등의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1991년 후손들이 석대동 산 104번지에 기적비를 세웠다.

 

공의 자는 윤중이요, 호는 포함이며 본관은 창원인데, 조선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에 오른 천곡선생 휘 종길이 그의 7대조이다. 공은 어릴 적부터 총명과 담력이 과인하였다. 임진년 4월 14일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어린아들 응노와 응기는 부인에게 부탁하고 세아들 응진, 응남, 응달을 데리고 덕포리 본제로부터 동래성으로 달려가 여러 의사들과 왜적들과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송상현부사는 순절하고 성이 함락되니 공은 성벽을 뛰어넘어 항전을 계속함이 국가 장래를 위해 유익하다는 판단으로 소산역구에 집결하였다. 이후로 동래 양산간에서 혹은 적의 수송로를 차단하고 혹은 적의
초소를 기습하는 유격전을 벌였는데, 이 사이에 문택용은 그 가문의 젊은이들과 함께 공과 연계작전을
폈다고 한다.

 

7년의 전란이 끝나고 국가가 화평을 되찾은 후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 3등훈의 녹권이 하사되었는데,
벼슬길에는 뜻이 없어 고리덕포에서 후진 교도에 전념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8.천성태 (1719~1789)


화산군 천만리의 후손으로 효자였다. 모부인이 질병으로 위태할 적에 단지하여 소생시키고, 부친이 병석에 누워 위급하게 되자 또한 단지하여 연명하게 하였고, 부모의 상에 모두 묘 곁에 여막을 짓고 시묘를 하며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는데 여막 곁에 홀연 샘물이 솟아났으며, 밤에는 범이 여막을 호위해 주었다고 한다. 그 아들 세모와 손자 술운, 증손 일갑, 현손 우형, 우형의 부인 김해김씨등도 효행이 탁월하여 5대 5효자 1효부로 칭송되어, 영조때부터 동래 사람과 영남 유생의 칭송하는 상소가 잇달아 있었다. 석대동에 그 정려가 있다.

 

9.정기진 (1809~1885)


자는 문백, 호는 반계. 연일인이다.

 

문학으로 명망이 높았는데, 장산 아래 반여동에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침에, 이 지방의 학자들의 사표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 후손이 없었는데, 문하의 제자인 김문주 등이 계축년(1913년)에 변향계를 조직하여 향선생으로 제향을 받들었다.

 

공의 휘는 기진이요 자는 문백이며 반계가 그의 호이다. 연일의 정씨는 고려조의 한림학사 영양공 휘 용명이 시조이다.

 

그 아들 변균이 문과에 급제하여 주박동정 전서였고, 그 아들 겸목이 문과에 급제하여 내지전서였으며, 그 아들 린신이 문과에 급제하여 대학박사였으며, 그 아들 지태가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전서였고, 그 아들 종흥이 진현관대제학이었으며, 그 아들 림이 봉익대부판도판서였다.

 

여러 대를 전하여 12대손 휘 영종이 영천에서 동래로 와서 살았는데, 효종 강인에 나서 묘소가 동래 북면 남산리의 자좌에 있으며, 배위는 청도김씨인데 그 묘소는 노포리의 주좌이다.

 

공은 순종 기사 10월 20일에 나서 을유 4월 4일에 돌아가셨다.


10.노영경 (1845~?)


자는 경향, 호는 흠제. 소제 노수신의 후예로서, 성제 허전의 문인이다.

 

고종 14년(187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임오군란때 기주관으로써 어가를 호위하였고 갑신정변 때는 옥당으로서 어가를 호종하였으며 을유년(1885년)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고,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경인년(1890년)에 경주부윤이 되고 임진년(1892년)에 다시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을미년(1905년)에 향리로 돌아와 송정에 송호제를 짓고 경학에 전심하였다.


11.정재우


자는 원유, 호는 장은이다.

 

흠제 노영경과 더불어 일찌감치 허성제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학문에 전심하였는데, 허성제는 손수 성학십도를 베껴 주면서 학문을 장려하였다 한다. 묘소가 중리 오엽등 손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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