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빛낸위인,누가 있나요?

부산을 빛낸위인,누가 있나요?

작성일 2012.04.30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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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초딩3인데여

  사회 숙제거든여

  그래서 말인데 부산을 빛낸 위인중 누가있나요?

  장영실,문시환등등....

  이렇게요. 내공 30겁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부산을 빛낸 위인)

 

1. 안용복 (?~?)

 

조선 때의 민간 외교가. 울릉도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함부로 베어가자, 1693년(숙종 19년)에 울릉도로 건너가 일본인들을 모두 몰아 냈다.

 

1696년(숙종 2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스스로 울릉도, 우도의 감세관이라 일컫고,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땅임을 주장한 후 그들의 잘못을 엄하게 따져 끝내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이듬해 일본 막부는 쓰시마 도주를 통하여 다시는 일본인이 울릉도와 독도에 침범하지 않겠다는 통지를 공식으로 보내 왔다.

 

2. 우장춘(1898~1959)

 

농학자. 일본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으며, 4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1919년에 도쿄 제국 대학 농학실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1936년에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 내지는 보완한 ‘종의 합성설’이라고 하는 유명한 논문으로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피튜니아의 겹꽃 종자의 육종 방법을 밝힌 논문도 유명하다. 1950년에 귀국하여 한국 농업 연구소장 및 학술원 추천 회원이 되었다. 귀국 후 채소 우량 종자 및 무균 씨감자의 생산 체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 ‘씨 없는 수박’의 국내 실험에 성공하였으며, 벼의 1식 2수작 연구에도 힘을 기울였다. 1959년에 대한 민국 문화 표창을 받았다.

 

3. 윤흥신(?~1592)

 

조선 중기의 문신인 윤흥신은 1582년( 15년)에 진천 현감이 되었으나,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변방으로 전출되어 1592년 다대포 첨사에 부임하였는데, 때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윤흥신 첨사는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부산시 사하구 다대포에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다대포 첨사 윤흥신과 전몰 장병을 위한 제단인 윤공단(부산 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 9호)이 있고, 수영에도 25 의용단(부산 광역시 문화재 기념물 제 12호)이 있다.

 

4. 장영실(?~?)

 

조선 시대 때의 과학자. 본디 관노로 농기구, 무기 등을 고치거나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다. 1423년(세종 5년)에 왕의 특명으로 상의원 별좌가 되면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을 도와 천문의의 제작을 감독했다.

 

1434년에 우리 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자격루를 완성하고, 1437년에는 소간의와 대간의를 비롯하여 해시계인 현주일귀, 앙부일귀, 정남일귀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 1441년에는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를 발명하는 등 기계, 건축,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442년에 직접 감독 제작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벼슬에서 쫓겨났다.

 

5.송상현 (1551~1592)

 

본관 여산. 자 덕구. 호 천곡·한천. 시호 충렬. 1570년(선조 3) 진사에, 157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경성판관 따위를 지냈다.

 

1584년 종계변무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뒤 호조·예조·공조의 정랑 등을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동래성에 육박하자 항전했으나 함락되게 되자 조복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은 채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충절에 탄복한 적장은 시를 지어 제사지내 주었다. 이조판서·찬성이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에 제향되었다.

 

6. 김규식 (1881.1.29~1950.12.10)  
 

부산 동래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지성이 동래 부사 막료로 재직 중일 때,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대하여 상소하였다가 그 일로 귀양을 갔다. 그 후 1887년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6세 때 고아가 되었다. 마침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와 있던 선교사 H.G.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원한경[H.H. Underwood] 박사의 아버지)가 그를 보호하게 되었다. 그 아래에서 서양교육과 기독교교육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미국으로 유학하여 1903년 로노크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듬해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05년 귀국하여 경성청년회 총무·경신학교 교감·연희전문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23년 모교인 로노크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35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민족혁명당을 창설하는 한편, 베이징[北京]·난징·쓰촨[四川]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직을 맡아 파리강화회의에 전권대사로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을 규탄하였다. 그 해 학무총장·구미위원부 위원장을 겸임하였다. 파리에서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조선공보국을 설립하여 회보를 발간한 뒤, 조선의 독립의지를 알리고 홍보를 하였다. 한편,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탄원서를 작성,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세우고, 1927년에는 그 회장직을 맡아 기관지인 『동방민족』지를 창간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에 일본군의 진격이 예상되자, 중국에 있는 한국인의 통일독립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5개 독립운동단체 대표들과 남경에 모여, 신익희 ·조경한 ·양기탁 등과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의용대원을 모집하는 한편, 기관지 『민족혁명』,『우리의 길』 등을 발행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 되어 중경에 들어간 후 김구 주석과 함께 광복군 양성에 힘썼다.


1945년 8·15광복 후 귀국하여 우익 진영 지도자가 되었으며, 모스크바3상회의(1945. 12)에서 신탁통치에 관한 의견이 전해지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다. 미·소공동위원회(1946~1947)가 실패로 돌아가자, 중도 우파로서 민족자주연맹 위원장, 입법의원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에는 국제연합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김구와 함께 북한에 가서 남북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그 후 정치활동에서 은퇴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만포진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저서로 《엘리자베스시대의 연극입문》(1940)과 시집 《양자강의 유혹》(1945) 등이 남아 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7.김갑 (1888~1933.3.14)  
 
이명은 진원이다. 부산 동래에서 출생하였다. 부산 동명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함양 ·산청 등지의 연락책임자로 활동하다 일본헌병의 추격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의원, 군무위원회 이사, 교통부위원, 국무원 차창 등에 선임되어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대종교에 입교하여 참정 ·지교 ·상교 등을 역임하면서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무부차장, 법무총장 대리, 노동총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6년 국무령 김구를 중심으로 한 지도체제의 내각에 참여하여 국무원에 임명되었다. 1927년 임시정부의 약헌기초위원회 위원이 되어 개헌작업에 참여하였고, 1930년 3월에는 이동녕 ·조소앙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활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 3월 상하이에서 병사하였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8.김상호 (1889~1965)
 
본관 금녕. 부산 동래 출생.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5년에 출가, 범어사 성해의 제자가 되었다. 경내 강원에서 공부하던 1913년 명정학교에 들어갔고, 1918년에는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이수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7일 범어사의 청년승려 50여 명과 함께 동래시장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선언서를 뿌리며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피신차 상경하여, 전국 불교도 독립운동본부를 조직, 전국 주요 사찰과 연락을 취하여 불교도들을 규합, 전국 규모의 산발적인 만세운동을 지도하였다. 1919년 대동단에 가입, 불교계 책임자로 활약하면서 담해 ·성월 등의 노승들과 밀의, 사찰 등을 통하여 많은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고, 그 사실이 탄로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1년 조선불교유신회를 창설, 친일 승려들을 규탄하고 일제의 ‘사찰통합령’ 철폐운동을 벌였다. 1929년 1월 그가 주동이 되어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를 개최하고, 8월에는 하와이에서 열린 범태평양불교청년대회에 대표로 참석하는 등 불교청년계의 중추적 인물로 활동하였다.


1930년 7월 김법린 ·이용조 등과 만당을 조직, 불교혁신운동을 전개했는데 1938년 이 일로 옥고를 치렀으며, 또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는 등 항일운동과 불교 중흥·개혁 운동으로 일관하였다.


9.박재혁 (1895~1921.5.27) 
 

부산의 동래에서 출생하였다.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나와 왜관의 무역회사에 다니다가 1917년 중국 상하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를 다니며 무역업에 종사하였으며, 이때 중국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였다. 1920년 7월 만주 지린성에 있는 무장 항일독립단체인 의열단에 입단하고 단장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서장을 암살할 것을 지시받았다.


같은 해 9월 13일 고서적상으로 가장, 고서 속에 폭탄을 숨겨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와 다음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만나 폭탄을 던졌다.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단식을 시작하여 형 집행 전에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0.허정 (1896.4.8~1988.9.18)
 

부산 출생. 보성전문 법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후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0년 프랑스에 가서 재불한인거류민회 회장이 되어 교민들을 결속시켰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한인유학생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22년 북미한인교민총단장이 되어 재미교포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1923년 미국에서 발행하는 교포신문 《삼일신보(三一新報)》 사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한국민족당 총무로 민족진영의 결속에 힘쓰고, 1948년 부산 을구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해 교통부장관에 발탁되었다가 1950년 사회부장관에 전임되었으며 이듬해 국무총리서리가 되었다.


1957년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고 1959년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활약하였다. 1960년 4월 외무부장관에 취임하여 4·19혁명 후 과도내각의 수반으로 혼란한 시기에 대통령권한대행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963년 국민의 당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하여 정치일선에 복귀하였으나 곧 물러나고 1969년 국토통일원(지금의 통일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80년 국정자문위원이 되었으며 그해 국토통일원 고문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저서에 자서전 《내일을 위한 증언》이 있다.


11.양유찬 (1897~1975)
 

부산에서 출생했다. 1916년 하와이 미킴레이고등학교를 마치고, 1923년 미국 보스턴대학 의학부를 졸업,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병원을 개업하면서 한인대학구락부를 만들고, 호놀룰루 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 이사, 호놀룰루 한인기독교재단 회장 등의 일을 맡아보며 재미교포의 단결과 친목에 기여하였다.


1951년 대통령 이승만에 의하여 주미대사로 발탁된 데 이어, 유엔총회 한국 수석대표로 임명되어 6 ·25전쟁 이후 한국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공헌하였다. 한편, 1953년까지 한일회담 수석대표가 되어 대일교섭의 주역을 맡기도 하였다. 1960년에는 주미대사 겸 브라질대사로 활약, 1965~1972년 순회대사가 되어 각국을 순방하며 한국의 국제적 위상확립을 위하여 힘썼다. 저서에 《Korea Against Communism》이 있다.


12.김말봉 (1901.4.3~1962.2.9)
 
부산 출생. 서울 정신여학교를 거쳐, 도일(渡日)하여 다카네 여숙과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망명녀》가 당선되면서 데뷔하였다. 그후 장편소설 《밀림》 《찔레꽃》을 신문에 연재하여 통속소설 작가로서 각광을 받았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사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애욕의 문제를 다루었으나, 광복 후에는 사회성을 띤 작품을 쓰기도 하였는데 대표작은 1956년부터 1957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생명(生命)》이다.


13.오종식 (1906~1976) 
 
호 석천. 부산 출생. 일본 도요대학 전문부 문학과를 졸업하고, 1946년 《민주일보》 편집국장으로 언론계에 투신하여 1947년 《민중일보》 편집국장 ·《경향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잠시 사회부 차관을 지내고, 1948∼1962년 동국대학 교수로 강단에 서면서 1949년 《서울신문》 전무 겸 주필, 1953년 《경향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1954년 《한국일보》 주필과 1955년 동 부사장을 겸임하고, 1960년 《서울신문》 사장이 되었다. 1961년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창립위원, 1962년 《국제신보》 사장, 1963년 《세대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 한국신문연구소장 ·방송윤리위원장, 1970∼1972년 《대한공론》 이사장, 1972년 IPI 준회원을 역임하는 등 반생을 언론계에 바쳤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저서에 《원숭이와 문명》 《연북만필》 《용용기》 《혁명의 원근》 등이 있다.


14.김소운 (1907.1.15~1981)  
 
호 삼오당. 본명 교중. 부산 출생. 사립 옥성학교를 중퇴하고, 13세 때 도일하여 34년간 체재하였다. 일본 시인 기다하라 하쿠슈에 사사하여 20세 전후부터 일본시단에서 활약하였다. 한편 《조선민요집》(1929), 《조선시집》(1943) 등 많은 작품을 일본에 소개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51년 장편수필 《목근통신》이 일본 주오고론에 번역 소개되어 한일 양국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으나 1952년 도쿄에서 이승만 정권을 비방한 것이 말썽이 되어 다시 13년간 일본에 체류하였다. 1965년 귀국 후 본격적인 수필문학에 몰두하였으며, 이때에 《물 한 그릇의 행복》 등 10여 권의 수필집을 발표하였다. 말년에는 '소운'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을 받았다.


15.김지태 (1908∼1982)


실업가·정치가·언론인으로 부산 출생이다. 민족항일기에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복 직후 1946년 조선견직한국생사를 창립하여, 196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생사수출조합 이사장, 1970년 한국생사회 회장을 역임하기까지 한국견직물업계에 기여한 바가 크다.


또한, 1952년 삼화고무를 창업하여 대기업의 기초를 다지면서 1972년 삼화고무회장직에 올랐다. 1973년 대한판지를 창업하고 동방증권을 인수하면서 한국실업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실업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은탑 및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언론계에도 관여하여 1948년 부산일보사 사장, 1958년 한국문화방송·부산문화방송 사장으로 활동한 바도 있으며, 실업계와 언론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바탕으로 1950년 제2대 민의원선거 때 부산갑구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뒤에는 자유당에 입당하였고, 1964년 제3대민의원선거에서도 자유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삼화플라스틱·자명해외건설회사 등과 기존의 업체를 통합하여 1979년 삼화그룹을 형성하여 그 회장에 취임하였고, 1980년 명예회장직을 맡아 사업일선에서 물러났다.


16.구자운 (1926.11.3~1972.12.15)
 
부산 출생. 1949년 동양외국어전문학교 러시아어과를 졸업하였다. 1955년과 1956년 《현대문학》지에 《균열》 《청자수병》 《매》가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후 《포도도》 《도가》 《고도이품》 《묘비명》 《유상의 거리에서》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한국적인 정서를 세련된 언어로 다듬은 초기의 시는 형식미에 특징이 있었으나,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정적의 세계에서 소용돌이치는 현실의 세계로 뛰어나와 서민의 생활감정과 자신의 궁핍과 실의를 자조하는 가혹하고 비장한 경향으로 흘렀다.


경제적인 곤란과 가정적인 불행 속에서 일문번역으로 생활을 지탱하여야 했던 만년에 발표한 《일하는 자의 손에 대하여》에서 그는 "한밤중에도 쉬지 않고/기름때 톱니바퀴"처럼 일을 하여야 하는 시인의 손을 노래하였다.


시집에 《청자수병》 《벌거숭이 바다》 등이 있다.


17.채영주 (1960.6.8~2002.6.15) 
 
1962년 6월 8일 부산광역시에서 출생하였고, 1988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문학과사회》에 단편소설 《노점 사내》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90년 단편소설 《상처》와 《가면 지우기》, 《지휘자의 눈물》을 발표하였으며, 1991년 《겨울 소묘》, 《마지막 진실》, 장편소설 《담장과 포도넝쿨》을 발표하였다.


1993년 장편소설 《시간 속의 도적》, 《크레파스》, 단편소설 《춤추는 멍텅구리배》, 《당신을 찾아드립니다》, 1995년 《목마들의 언덕》을 발표하였다.


1996년 발표한 장편소설 《웃음》은 여행을 꿈꾸는 연극배우와 냉소적인 연출가가 계속되는 연극과 연극 밖의 세상에서 경험하는 일을 통해 삶과 사랑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작품이다.


이외의 작품에 소설집 《가면 지우기》, 《연인에게 생긴 일》(1997), 유고소설집 《바이올린맨》(2003), 장편소설 《웃음》(1996), 《무슨 상관이에요》(2002), 장편동화 《비밀의 동굴》(1999), 《담장과 포도덩굴》 등이 있다.


2002년 6월 15일 지병으로 요절한 후, 2003년 유고집 《바이올린맨》이 나왔으며, 2003년 소설가 신경숙이 작품집 《종소리》에 그의 죽음을 소재로 한 《혼자 간 사람》을 발표하였다.


18.이태석 (1962.9.19~2010.1.14)
 

1962년 9월 19일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1981년 부산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87년 인제대학교 의과대를 졸업하였다. 1990년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1991년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였고 1992년 광주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1994년 1월 30일 첫 서원을 받았으며 1997년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하였다. 2000년 4월 종신서원을 하였고 그해 6월 28일 부제서품을 받았다. 2001년 6월 24일 서울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11월 아프리카 수단 남부 톤즈(Tonj)로 향했다.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오지로 불리는 수단의 남부 톤즈는 오랫동안 수단의 내전으로 폐허가 된 지역이며 주민들은 살길을 찾아 흩어져 황폐화된 지역이었다. 이태석 신부는 이곳에서 가톨릭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말라리아와 콜레라로 죽어가는 주민들과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흙담과 짚풀로 지붕을 엮어 병원을 세웠다.


또한 병원까지 찾아오지 못하는 주민들을 위해 척박한 오지마을을 순회하며 진료를 하였다. 그의 병원이 점차 알려지게 되자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원주민들과 함께 벽돌을 만들어 병원건물을 직접 지어 확장하였다. 하지만 오염된 톤즈 강물을 마시고 콜레라가 매번 창궐하자 톤즈의 여러곳에 우물을 파서 식수난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하루 한끼를 겨우 먹는 열악한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농경지를 일구기 시작했으며, 학교를 세워 원주민 계몽에 나섰다.


처음 초등교육으로 시작한 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차례로 개설하였고 톤즈에 부지를 마련하여 학교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전쟁으로 상처받은 원주민을 치료하는데 음악이 가장 좋은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치료의 목적으로 음악을 가르쳤으며 예상을 넘는 효과가 있자 학생들을 선발하여 브라스밴드(brass band)를 구성하였다. 그의 밴드는 수단 남부에서 유명세를 탔으며 정부행사에도 초청되어 연주하였다. 2005년 그의 헌신적인 공로가 인정되어 제7회 인제인성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미처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했다. 2008년 11월 한국에 잠시 입국하였다가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고 톤즈로 돌아가지 못했다. 투병생활 중 2009년 12월 17일 제2회 한미 자랑스러운 의사상을 수상했다.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되어 증세는 점차 나빠졌으며 결국 2010년 1월 14일 새벽 5시 48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는 사제이자 의사였으며 교육자이자 음악가 건축가로 일인다역을 하였고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가 작곡한 묵상(默想)이 대표곡이며 저서로 아프리카 톤즈의 일상을 집필한 에세이집《친구가되어주실래요》(2009)를 남겼다.

부산을 빛낸위인,누가 있나요?

전 초딩3인데여 사회 숙제거든여 그래서 말인데 부산을 빛낸 위인누가있나요? 장영실,문시환등등.... 이렇게요. 내공 30겁니다. (부산을 빛낸 위인) 1. 안용복 (?~?) 조선...

부산을 빛낸 사람(위인) 누가있나요??

부산을 빛낸 사람(위인) 좀 가르쳐 주세요~~ 조금 급해서요~~빨리 부탁드려요~~ 그림도 같이 부탁해여~~ㅈㅅㅈㅅ 1.장영실 조선 세종조의 과학자로 본관은 아산...

부산빛낸 위인누가 있나요??

... (부산을 빛낸 위인들) 1. 안용복 (?~?) 조선 때의 민간 외교가. 울릉도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함부로 베어가자, 1693년(숙종 19년)에 울릉도로 건너가...

해운대구를빛낸위인누가있나요?

숙제를해가야되는데...쌩이해운대구를빛낸위인을조사해오라고해서요 좀도와주세여........ 임진년 4월 13일에 왜적이 바다를 건너와서 부산진성을 포위하고 다음날 동래로 거쳐...

대구를 빛낸 위인누가 있나요,,??

우리 대구를,, 빛낸 위인누가 있나요,,?? 우리 학교에서,, 우리 고장 자랑하고 발표하기 대회를 하는데,,; 대구의,, 마땅한,, 자랑 거리가 없어서요,,;;ㅠ_ㅠ 대구를...

목포시를 빛낸 위인들은 누가있나요?

... 제가 목포시를 빛낸 위인들을 조사해볼려구 하는데요, 그 위인들은 누가 있나요? 위인들 중에 한명만써주세요~ 내공 40 올릴께요~~~~ 1.박화성 [1904.4.16~1988.1.30] 목포...

부산을 빛낸 위인중 안용복이 있나요..?...

... 반가워요~ ^^ 그런데 부산을 빛낸 위인 중 안용복이라는 사람이 있나요? 궁금하기도하고 학교 숙제를 잘못해 간것 같아서...요.. 맞나요? 내일까지 입니다.( 4월 20일까지.. )...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은 누가있나요? 조선시대나 임진왜란때나 일제 강점기 위주로... 그때 나의 21살로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산에 상륙했다. 선조25년 4월 13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