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작성일 2013.08.20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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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위인을 올려드립니다.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 임진왜란 때)

 

1.곽재우 (1552 ~ 1617, 본관 현풍)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때 붉은 옷을 입고 선두에서 수없이 일본군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일본군을 피하여 달아났던 관찰사 김수와의 불화로 누명을 쓰고 구금되었다가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로 석방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1592년 6월 말 안고구지 에게이가 지휘하는 일본군과 정암진에서 싸워 이겼다.

 
그 후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당파싸움으로 나라의 형편이 어지러워질 뿐만아니라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죄없이 체포되었고, 또 절친한 광주의병장 김덕령 장군이 억울학게 옥사한 것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1597년 7월 말 창녕 화왕산성을 곽재우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일본군 우군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공격하려고 산기슭에서 바라보다 공격을 포기하고 초계, 합천을 지나 황석산성으로 진격하였다.

 
찰리사와 절도사를 지냈고, 광해군때는 영남 절도사와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그러나 시기하는 무리들의 모함을 받아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세상을 떠난 뒤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호는 망우당, 시호는 충익, 황해도 관찰사 월의 아들, 조식의 외손서.
 
2.권율(1537 ~ 1599)
 
권율은 좌의정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도 광주목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천 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군과 완주군의 경계인 이치에서 고바야가와 다가가게가 지휘하나는 일본군 제 6군 15,000명을 격퇴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점령을 단념하게 하였다.

 
또 북진하여 수원의 독왕산성에 주둔,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과 유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 제8군 우기다 이헤이에가 지휘한 1만명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일본군은 평양에서 패전하여 퇴각한 고니시 유기나가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고니시 부대를 선두로 마스다 나가모리, 이시다 미쓰나리, 오오다니 요시쓰구, 구로다 나가마사, 우기다 히데이에, 깃가와 히로이에의 순으로 곧 지금까지 전공이 없었던 부대를 차례로 하여 1593년 2월 12일 미명에 3만명의 군사로 행주산성을 공격해왔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2차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총대장 우기다 히데이에와 이시다 미쓰나리, 깃가와 히로이에 등의 장수가 화살에 맞아 상처를 입었고, 많은 사상자가 나와 공격을 단념하였다.

 
이 행주대첩의 전공으로 권율은 도원수에 올랐다. 그러나 도망병을 즉결처분하였다는 모함으로 해직되었다가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 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 부대와 대전하였으나 명나라 총관 양호의 돌연한 퇴각명령으로 철수했으며, 이어 순천 왜성에 있는 고니시 유기나가가 이끈 일본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린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일본 간첩의 말에 속아 한산도에 잇는 이순신 장군에게 잘못된 왕명을 전달하고, 이순신장군을 면직시키는데 협조한 행동은 큰 과오라 할 것이다.
 
3.김덕령 (1567 ~ 1596, 본관 광산)
 
김덕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와 담양에서의 의병을 일으켰다. 권율 장군 휘하에 들어가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협력,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1594년 9월 29일과 10월 4일,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과 곽재우 장군 그리고 김덕령이 같이 협력하여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도다 가쓰다가가 수비하고 있는 잠문포 왜성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이 성밖으로 나오지 않아 싸우지 못했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속을 장살하여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1596년 7월 충청도 부여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을 토벌하러 가다가 이미 집압되어서 회군하였다. 이때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 신경행이 김덕령이 이몽학과 내통하였다고 무고를 하여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1596년 8월에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영조때 억울함이 밝혀져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되었다. 시호는 충장, 붕섭의 아들, 의병장 덕홍의 아우, 별제 덕보의 형.
 
4.곽준 (1550 ~ 1597, 본관 현풍)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면이 이끄는 의병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고, 안읍현감으로 있을 때 황석산성을 지키다 왜군의 공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곽이상, 곽이후 형제는 아버지가 임금을 위해 죽었으니 아버지를 위해 죽는다면서 뒤따라 전사했다. 이어 딸과 며느리 신씨도 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는데 어찌 생명을 지키겠는가라며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에 세상에서는 한 집안에서 삼강의 모범이 모두 나왔다고 해서 '일문삼강'집안이라고 불렀다. 뒤에 병조 참의에 추종되었다.
 
5.권응수 (1546 ~ 1608, 본관 영천)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홍 휘하에 있었는데, 박홍이 도망하여 부대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정대임과 함께 일본군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점령하고 있는 영천성을 화공법을 써서 1592년 7월 26일 탈환하였다. 다시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장 다가와 나이기가 점령하고 있는 경주성을 경상좌병사 박진과 함께 공격하여 8월 20일에 탈환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의 보급로가 위험하게 되었다.
 
6.김면 (1541 ~ 1593, 본관 고령)
 
남명 조식 이황에게 학문을 배워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무계, 우지현, 지례, 진주, 영산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경상우도에서는 관군과 의병의 대립(김수와 곽재우) 의병 사이의 대립(김면과 정인홍) 관군 사이의 대립(김성일과 김수)으로 일본군과 싸우는데 지장이 많았는데, 김면은 김성일과 함께 조정자 역할을 하였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 받았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1593년 3월 10일 진중에서 갑자기 병사하였다.
 
7.김응서 (1564~1624)
 
용강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29세의 나이로 종군하여 평양서쪽을 방위하였다. 평안도방위사가 된후 다시 경상부병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유재란 때 이중간첩 요시라의 거짓말에 속아 조선 조정에 헛정보를 전했다. 조정이 이순신을 체포하여 원균을 패사케 하고 조선 수군이 전멸당하는데 관계가 있다하여 백의종군하였다. 광해군 11년(1618) 도원수 강홍립을 딸 부원수로 만주에 출병하여 누루하치에게 항복한 후 정보를 전달하다 탄로나 살해되었다.
 
8.김시민 (1544 ~ 1592, 본관 안동)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킨 장군이다. 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판관을 거쳐 진주통판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성을 잘 수리하고 군비를 갖추어 목사로 승진했다. 사천, 고성, 진해 싸움에서 적을 무찌르고 영남우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진주성 싸움이 벌어졌다. 1592년 10월 6일 가토 미쓰야스, 나가오다 다다오기, 하세가와 히데가스, 기무라 시끼지 등이 지휘한 2만명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해왔는데, 곽재우, 정기룡 장군의 지원을 받은 3,800명의 조선군이 5일간의 치열한 공방정 끝에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치열한 싸움 뒤 성을 순시하다가 시체속에 숨어 있던 왜병의 총에 맞아 순국하자 성안의 모든 백성이 대성통곡했다. 선무공신에 책록되고 상락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무, 봉호는 상락부원군, 지평 언묵의 손자, 북평사 충갑의 아들,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 왜군과 싸우다 부인과 어린 아들까지 순국하여 영의정에 추증된 제갑의 조카, 이조참의 치의 아버지, 참판 득신의 조부.
 
9.고경명 (1533 ~ 1592, 본관 제주)
 
고경명은 당파싸움으로 서인이 제거될 때 동래부시직에서 사직하고 낙향, 학문에 열중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의 노구로 광주에 모집한 의병 6천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전라도에 침공하려는 고바야가와 다다가게가 지휘하는 제 6군 12,000명과 금산에서 싸워 1592년 7월 9일 전사했다. 둘째아들 인후는 아버지와 같이 싸워 전사하였고, 맏아들 종후 또한 군사를 일으켜 복수장으로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딸도 정유재란 때 남편을따라 순절하였고, 동생 경신, 경형 등 일가족 9명이 전사하였다. 호는 제봉, 시호는 충렬, 호조참의 신득의 6세손, 대사헌 맹영의 아들, 현령 종후, 학유, 인후, 판결사 용후의 아버지.
 
10.김천일(1537 ~ 1593, 본관 언양)
 
산림에 묻혀 사는 어진 선비를 뽑아 쓰는 유일로 벼슬길에 올라 순창군수 최경회, 박광옥 등과 의병을 모아 여러 싸움터에 나가다 선조는 그를 장의로 삼았다. 그 뒤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함락되자 북향 4배한 후 최경회, 황진, 양산숙등과 함께 남강에 봄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때 아들 김상건도 함께 목숨을 버렸으며, 이소식을 들은 부인 김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뒤에 조정에서는 영의정에 추증했다.

 
호는 건재, 시호는 충장, 예의판서 용휘의 후손, 목사 순경의 현손, 진사 언침의 아들.
 
11.김충선 (1571 ~ 1642)
 
임진왜란 때 왜군의 선봉장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때 나의 21살로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산에 상륙했다. 선조25년 4월 13일이었다. 상륙한 지 일주일 만에 경상좌우병사 김응서에게 은밀하게 글을 보냈다. "내가 비겁하고 못난 것도 아니고 내 군대가 약하지도 않다.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발달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다. 그래서 귀순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하여 우리나라에 귀화해 장수가 된 그는 부산, 경주, 영천등에 포진하고 있던 왜군을 무찔렀다. 또 우리군대에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18개의 성을 되찾는 공을 세웠다. 그의 무공과 충절에 감복한 선조는 친히 불러 김해 김씨라는 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서른 살 때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하여 경상도 달성군 우록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다. 선조 36년 여진족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내방소를 설치하고 그에게 북방 경비를 맡겼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자신이 10년 간 지켰던 북쪽 땅이 짓밟혔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아 창의했다. 그때 나이 66세, 의병을 남한산성으로 달려가던 중 조정에서 항복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자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춘추의 대의도 끝났구나."하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7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지증추부사,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호는 모화당, 상호군 경원, 부호군 계인의 아버지, 선전관 진명의 조부.
 

12.김여물 (1548~1592)
 
조선시대의 충신. 자는 사수, 호는 피구자,외암, 본관은 순천, 성현도찰방 훈의 아들이며 영의정 류의 부친이다. 현 안산시 와동에 소재한 김여물의 신도비에는,「무릇 충신·열사가 나라를 섬김은 국난을 당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인을 이루는 데 있다. 하늘의 명 또한 위훈과 환업으로써 그 자손을 반드시 창성하게 하니, 이것은 마치 상하가 서로 주고 받으면서 보답하는 것과 같다.  이와같은 이치는 크게 밝아 조그마한 착오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군자는 이로써 천리가 없다고 탄식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글귀로 시작 그의 대인으로서의 공평무사한 행적과 애국의 단성이 새겨 있는데, 이 신도비는 김상헌이 찬한 것이다. 김여물은 어렸을 때부터 병서에 밝아 20세(156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30세에 대과에 합격하였다. 호조·예조·병조 등의 좌랑을 거쳐, 정랑으로 승전되고 충주군사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25년(1591) 의주목사로 있을 때 서인 정철의 당으로 몰려 파직 투옥되었다가 선조 26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과 함께 왕의 특명으로 충주의 방어를 나섰다.

 
김여물은 신립에게 새재의 고수를 주장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았고 마침내 왜적에게 새재를 내주고 말았다. 또 불리하면 중앙으로 가서 한양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립은 또 듣지 아니하였으니, 김여물은 미리 패할 것을 알았다. 우리 군사가 패하자 신립이 김여물에게 묻기를, "공은 살기를 원하오" 하니 김여물은 웃으면서"내 어찌 죽음을 아끼리오" 하고, 함께 탄금대 아래 이르러 적 수십 명을 맨손으로 죽이고 물에 투신하였으니 이때 공의 나이 45세였다. 이듬해 의관을 거두어 안산 동장리에 장사지내고 정려를 세웠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의이다.
 

13.원균 (? ~ 1597, 본관 원주)
 
원균은 일찍이 군문에 들어와 경흥군 조산보만호(종4위)였는데, 반년만에 특진하여 전라도좌수사(정3위)로 발령이 났다. 사간원에서 조산보만호로 있을 때 근무평가가 하(下)엿는데 전라좌수사에 임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대하여 부임도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리고 부령부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다 우찬성 윤근수와 호조판서 윤두수의 천거로 임진왜란 2개월 전인 1592년 2월에 경상우수사로 특진하여 가배포(거제군 동부면 가배리)에서 73척의 군선을 지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앞바다에 많은 일본군이 왔다는 보고를 듣고서는 싸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군선과 군사시설을 불지르니, 부대가 해산되었다.

 
원균은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 만호 우치적 등 부하장수와 전선들을 해안에 버리고 혼자 달아나려 하였다. 이운룡이 원균에게 항의하기를 "장군은 수사로서 국가의 중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경상우도의 수비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여기 경상우도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목입니다. 경상우도의 수군이 산산히 흩어져 버렸다고 해도 아직 병사를 모을 수 잇습니다.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므로, 원균을 이운룡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였다. 이래서 율도망호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진영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한 척의 군선만을 남겨타고 소비포(고성군)에서 이순신의 함대와 만났다. 이때 원균은 이순신보다 나이가 5세 연상이었다. 작전중에 이순신과 불화가 심각하여 선조는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키고 그 후 다시 전라병사가 되었다. 일본 수군이 연전연패하자 풍신수길의 명에 의하여 일본군은 경상남도 해안에 왜성을 축성하고는 성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이순신 장군은 싸울 수가 없었다. 이때 원균이 "이순신이 출동 안하고 있는데, 내가 삼토수군통제사가 되면 일본군을 무지르겠소"하고 선조에게 상소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이 체포되고, 원균이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했다. 출전하라는 왕명이 내렸는데도 출전을 안하여 7월 11일에는 도원수 권율장군에게 태형을 당했다. 즉시 출동하지 않으면 왕명불복으로 이순신장군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므로 원균은 어쩔 수 없이 전선을 출동시켰다. 일본은 가덕도, 안골포, 부산포의 초소에서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환히 보고 있었으며, 조선수군이 쉴 만한 창구는 일본군이 점령하고 잇어 병사들은 쉬지도 못하고 부산 앞바다까지 갔는데, 노를 젖던 격군들은 극도로 피로에 지쳤다. 부산앞바다에 도착하자 일본 군선이 달려왔는데, 조선군선이 쫓아가면 일본군선은 달아나고,, 다시 또 일본군선이 다가오고 조선 군선이 쫓아가면 다시 달아나고하며 조선수군을 극도록 피곤하게 만들며 싸우려 하지 않았다.

 
아무 전과도 없이 밤이 되어 철수하려 하니 파도가 심하여 조선 수군이 흩어졌다. 간신히 배를 모아 가덕도에 도착, 군사들이 목이 말러 물을 마시기 위해 상륙하였는데, 돌연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순식간에 400명이 죽고 황급히 배로 돌아왔다. 이 때 가덕도에는 1597년 5월 2일에 상륙하여 일시 주둔하고 있던 시마쓰 요시히로 부대가 있었다. 그 해 7월 15일에 조선수군이 궤멸하였다. 원균은 춘원포에 상륙하였는데, 일본군이 추격해와서 달아나다 몸이 비대하여 뛰지 못하고, 일본군의 칼에 최후를 마쳤다.

 
봉호는 원릉군, 병부령 극유의 후손으로 호조참판 임의 손자, 병사 준량의 아들, 동지중추 사옹의 아버지.
 

14.이억기 (1561 ~ 1597, 본관 전주)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용병, 전술, 무장에 번번이 격파당했다. 그래서 낸 꾀가 요격전 정보였다. 이순신 장군은 말려들지 않았으나 곧 일본군이 상륙했다.그러자 조정에서는 충무공을 비겁한 사람으로 몰았다. 결과적으로 이간책에 빠져 서울로 압송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때 목숨을 걸고 이순신 장군을 구하려 애쓴이가 판중추부사 정탁과 전라우도부사 이억기였다. 이순신 장군과 손을 잡고 한산도, 왕항도, 목포등 여러 해전에서 싸운 경험으로 이순신 장군의 억울함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려서 무과에 급제하여 경호부사로 나가 북방 수비에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 때에는 여러 해전에 이순신 장군과 함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정유재란 때 한산도에 좌익군을 거느리고 끝까지 싸운뒤 바다에 뛰어 들어 3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뒤에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의민, 봉호는 완흥군, 덕천군 후생의 현손, 심주부수 연손의 아들.
 
15.이순신 (1545 ~ 1598)
 
이순신은 여러 미관말직을 지내다가 유성룡의 천거로 임진왜란 14개월 전에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에 승진, 좌수영(여수)에 부임하여 군비확중에 힘쓰고 거북선을 건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 수군에 연전연승하였으나, 풍신수길이 일본 수군에 군선을 해안에 매두고 바다로 나가서 싸우지 말라고 명령한 후에는 작전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일본군은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전도를 거의다 점령하였으나 바다를 통한 보급 물자, 특히 군량의 수송이 불가능하여 아사자가 속출, 2/3를 상실하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유재란 때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당하게 되는데, 겨우 판중추부사 정탁에 의해 방면되어 백의종군한다. 후임자 원균의 무모한 작전으로 조선 수군이 싸우지도 못하고 궤멸된 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되었다. 충청도에 진군한 일본군은 이 소식을 듣고 전라도와 경상도로 후퇴하였다. 겨우 남은 12척의 전선으로 해남과 진도사이의 명량에서 조수의 변화를 이용하여 도도 다가도라가 지휘하는 일본 전선 133척과 싸워 31척을 침몰시키고 격퇴하여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 해전에서 도오도 다가도라가 부상하고, 구루시 이지후사가 전사하였다.

 
풍신수길 사후 본국으로 철수하려고 순천 신성리 왜성에 있던 고니시 유기나가 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구출하러 온 일본 수군과 노량 관음포에서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하여 발포만호, 정읍현감, 고사리 첨사 등을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와 수군통제사를 지냈다. 이순신이 무인으로 출세하자 덕수이씨는 66명의 무신이 나로 만큼의 훈무세가 되었다. 시호는 충무, 전법판서 소의 9세손, 영중추부사 변의 5세손, 병조참의 거의 증손자, 증좌의정 정의 아들, 현감 회의 아버지.
 

17.정탁 (1526 ~ 1605, 본관 청주)
 
임진왜란 때 왜군은 육지에서는 승승장구 했지만 바다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군절도사가 된 뒤 거북선을 만들고 군대를 훈련시켜 놓았기 때문이었다. 옥포, 사천, 당포, 한산도, 부산포, 안골포 등의 싸움에서 크게 이기자 왜군을 거짓 밀정꾼을 보내 왜선이 다시 쳐들어오니 바다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왜선들을 쳐부수라는 것짓 정보를 흘렸다. 선조 29년 2월이었다. 이 꾀를 알아차린 이순신 장군은 싸움터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왜군은 흘린 정보대로 바다를 건너왔다. 정보가 옳았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목숨이 아까워 비겁하게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다고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힌 뒤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것은 왜군의 계략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은 꼼짝없이 죽게될 처지에 놓였다. 누구도 섣불리 감싸줄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때 이순신 장군이 옳았다고 나선 이가 좌의정 정탁이었다. 정탁의 도움으로 이순신장군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백의종군하다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어 더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황에게 글을 배워 명종 13년 문과에 급제한 뒤 교리, 대사헌, 좌찬성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때 선조를 의주로 호종하여 호성공신이 되었으며,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좌의정으로 벼슬길을 마감했는데 박학다시 하기로 유명했다. 호는 약포, 시호는 전간, 현감 윤로의 증손자, 이층의 아들.
 

18.정운 (1543 ~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자기 휘하에 있는 수군을 집결시켜 일본군과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던차 경상좌수사 원균이 율포만호 이영남을 보내 구원을 청해왔다. 이순신의 부하 장병들은 대부분 "우리들의 수비 담당구역인 전라도를 지키는데 힘겨운데 경상도까지 지켜줄 병력이 없다"고 부정적으로 말했다. 이에 슬프고 원통하다고 생각한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은 "일본 수군을 치는데 여기까지가 경상우수사의 수비범위이고, 여기까지가 전라좌수사의 수비범위라고 하는 도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경상도에 진출하여 일본 수군을 격파하는 것은 전라도를 방비하는 것도 될 것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정운의 의견에 기꺼이 동의했다. 이순신장군은 "정운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크게 국가대사를 그르칠 뻔했다"고 말하고 출격을 결심, 나라를 위급에서 구했다. 정운은 선봉장으로 거북선을 지휘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부산포 해전에서 일본군이 쏜 포탄이 거북선에 명중하여 전사하였다. 정운의 위패는 그가 전사한 부산시 서구 다대포 목운대와 근무지였던 고흥군 녹동읍 쌍충사, 출생지인 해남군 옥천면 충절사에 모셔져 있다. 당시 일본 수군에는 포가 없었는데, 경상좌수사 박홍이 조선 수군의 장비일체를 놓고 달아났으므로 그 포를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사용하였으니, 불운하게도 조선제 포탄에 맞아 전사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우리나라를빛낸 위인들좀 알려주세요... 방학숙제인데 지식이없어서.... 너무복잡한건 사절합니다. 한,10명정도만알려주세요. 욕설을 하거나 비방하는...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중 10명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중 10명만 조사해주세여 우리나라의 위인 20분을 올려드립니다.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1.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은 누가있나요? 조선시대나 임진왜란때나 일제 강점기 위주로 해주세요ㅠㅠ 내공 겁니다 임진왜란 때의 위인을 올려드립니다. (우리나라를 빛낸...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중에서...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중에 제일 대단하신분들 몇분만 추천 해주세요!사진이랑 설명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방학숙제라서요... 제일 대단하신 분이다라고 하면...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10명)

... 저는 어느 학교 초5학년인데요 ^^* 제가 이번에 방학숙제로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10명을 조사할거예요. 근데 제가 머리가 좀 떨어져서 잘 모르거든요 ㅠ.ㅜ 좀 가르쳐...

우리나라를빛낸위인들

우리나라를 빛낸위인들에대해서 10가지좀 가르켜주세요 ㅠ,ㅠ 안녕하세여 지나가던 나그네 입니다.. (어땠거나 잡솔그만하고) 저는 정말 존경하는 위인15명이 있읍니다 그중...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은 누구누구인가요? 단군할아버지랑 이순신이랑 광개토 빼고 모두다 적어주세요 내공 15 겁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업적 단군 - 우리...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 저희 선생님 께서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을 조사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전 너무 무지식해서.. 저 ...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제발요..그리고...

우리나라를 빛낸위인들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과 업적좀 ....... 알려주세요.(자세히부탁합니다)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 35분을 올려드려요^^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1.한용운 (1879.8.29~1944.6.29)...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좀...

방학숙제로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 보고서로 나타내긴데 제가 잘몰라서... 좀가르쳐주세요. 욕설및 이상한말 신고합니다. 내공30 (우리나라의 위인) 1.한용운 (1879.8.29~19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