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하비

윌리엄 하비

다른 표기 언어 William Harvey
요약 테이블
출생 1578년 4월 1일, 잉글랜드 켄트 포크스턴
사망 1657년 6월 3일,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윌리엄 하비는 혈액순환의 본질과 심장의 펌프 작용을 명확하게 밝혀 명성을 얻었다. 하비는 자신의 용기와 진리를 꿰뚫는 지성, 그리고 정확한 방법을 통해 생물학과 다른 학문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연구 방법을 확립하여 후대에 남겼다. 파도바대학교에서 저명한 해부학자 파브리키우스 아브 아콰펜덴테를 스승으로 의학을 공부했고, 그 대학의 타원형 해부실습실에서 심장 박동현상과 심장을 지나는 혈액의 특성에 대한 당대의 지식에 처음으로 의문을 품게 되었다. 28개월간의 학습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하비는 런던 왕립의사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609년초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에 근무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그 곳에서 34년 동안 근무하면서 의사와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주치의로 일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새롭고 비정통적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던 혈액순환 이론을 확립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의사와 과학개혁가로서의 생애
  3. 혈액순환의 발견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개요

윌리엄 하비는 혈액순환의 본질과 심장의 펌프 작용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윌리엄 하비는 자신의 용기와 진리를 꿰뚫는 지성, 그리고 정확한 방법을 통해 생물학과 다른 학문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연구 방법을 확립하여 후대에 남겼다(의학, 심혈관계).

의사와 과학개혁가로서의 생애

윌리엄 하비의 소년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윌리엄 하비는 의학 공부에 특별한 흥미가 있어 1593년 케임브리지의 곤빌 앤드 카이우스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그가 받은 교육은 대체로 부적절했다. 하비는 의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당시 유럽 제1의 의과대학이 있는 파도바대학교에 유학하여 2년 6개월 과정의 학업을 시작했다. 하비를 가르친 선생은 저명한 해부학자 파브리키우스 아브 아콰펜덴테였으며, 하비가 심장 박동현상과 심장을 지나는 혈액의 특성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그 대학의 유명한 타원형 해부실습실에서였다.

BC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혈관에는 혈액과 공기가 들어 있다고 널리 믿어져왔다.

2세기의 갈레노스는 동맥에는 혈액만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지만 그 역시 여전히 공기는 폐를 통해 오른쪽 심장으로 들어간다고 믿었다. 그당시 혈액의 움직임은 바닷물과 비슷하게 썰물과 밀물식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것에 대한 갈레노스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혈액의 순환 운동에 대한 개념을 갖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썰물과 밀물식의 그러한 진동 운동은 동맥의 수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것들이 갈레노스 이후 14세기 동안 믿어져왔던 혈액 운동에 대한 생각이었다. 16세기초 폐순환, 즉 심장과 폐 사이에 혈액이 순환한다는 생각이 몇몇 해부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리고 심실 중격에 과연 구멍이 있는가 하는 의문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엽 해부학자 베살리우스는 처음으로 인체 해부에 대한 정확한 지식 체계를 쌓았지만 인체의 기능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몇몇 다른 의학자들이 심장의 해부학적 지식을 더욱 발전시켰다. 레알두스 콜룸부스는 폐순환 개념을 생각해냈으며, 안드레아스 케살피누스는 비록 여전히 정맥을 통해 혈액이 신체 각 부위에 운반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폐순환 개념을 더욱 세밀하게 발전시켰다. 파브리키우스는 정맥의 구조에 특별히 관심이 많아 정맥판막에 대해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기술했지만 그것의 기능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윌리엄 하비가 파도바대학교에서 보낸 28개월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가 자기 학년 가운데서 뛰어났다는 점은 확실하다.

윌리엄 하비는 1602년 4월 파도바대학교에서 의사자격을 받은 후 곧 귀국했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아 하비는 해부학, 인체의 기능,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 근거를 둔 치료법 등에 관해 충분한 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비는 영국의 의사자격 시험을 거쳐 런던 왕립의사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귀국 후 하비는 곧 엘리자베스 브라우니와 결혼했다.

그들은 의사협회에서 멀지 않은 성 마틴 교구 내에 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윌리엄 하비는 저명한 사람들이 많이 갇혀 있던 런던 탑의 의사직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607년 하비는 런던에 있는 큰 병원인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과 세인트 토머스 병원 중 한 군데에 근무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1609년초 왕은 하비에게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에 근무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왕실에 근무하던 동생 존이 주선한 덕분이었던 것 같다.

윌리엄 하비의 일은 1주일에 적어도 하루와 그밖에 필요한 때면 언제든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었다. 하비는 연봉 25파운드와 옷값으로 따로 2파운드, 그리고 병원 사택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8파운드를 더 받았다. 병원 내 하비의 동료로는 3명의 외과의사와 1명의 약종상이 있었다.

윌리엄 하비는 크롬웰당에 의해 1643년 면직될 때까지 34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윌리엄 하비는 그 기간 동안 의사와 과학자로서 경력을 쌓아 정점에 이르렀다. 1618년 경부터 제임스 1세의 주치의가 되어 궁정의 수석의사인 드 메이언의 동료가 되었다. 논문이 출간된 1628년 이래 혈액순환에 대한 비정통적인 견해 때문에 환자 진료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비는 잉글랜드 최고 수준의 의사로 인정받았다. 해부학 및 생리학에 대한 견해가 진보적이었고 연구 방법이 과학적이었지만 하비가 사용한 치료법은 보수적이었다.

윌리엄 하비는 실험동물학의 위대한 주역이었지만 그것을 임상에 응용하지는 않았다. 1626년 새로 왕이 된 찰스 1세도 하비를 자신의 주치의로 임명했다. 찰스 1세는 처형당할 때까지 건강했기 때문에 하비의 진료가 필요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비는 왕의 측근으로 여행에 항상 동반했다. 왕은 왕실 정원의 사슴을 마음대로 사용하게 하는 등 하비의 과학적 연구를 도왔으며 하비도 과학적으로 흥미로운 것들로 왕을 즐겁게 했다. 그와 동시에 하비는 의사협회의 일에 진력하여 회장 자리를 제외하고는 주요한 자리를 모두 거쳤다.

윌리엄 하비가 활발히 활동할 때는 궁정의 일로 바빠 의사협회의 회장 자리를 수행할 수 없었다. 1654년 회장 자리에 대한 제안이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늙고 병들어 그 일을 맡을 수가 없었다.

혈액순환의 발견

윌리엄 하비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견해를 존중했다.

그러나 윌리엄 하비는 자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거의 전적으로 자신의 관찰과 실험으로부터 추론했다. 마침내 1628년 하비는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하여 Exercitatio Anat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이 소책자에서 하비는 혈액순환이라는 새롭고 비정통적인 이론을 확립했다. 혈액은 심장이 수축할 때 오른쪽 동맥을 통해서는 폐로, 왼쪽 동맥을 통해서는 사지와 내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좌우 두 심실을 분리하고 있는 중격을 통해서는 혈액이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과 정맥판막은 혈액을 심장으로 되돌려보내기 위한 것임을 입증했다. 윌리엄 하비는 심장이 수축할 때 혈액이 심실로부터 박출되며 이완할 때 혈액이 정맥에서 심실로 유입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한 하비는 동맥의 맥박은 동맥벽의 능동적 수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수축할 때 동맥이 확장되면서 생기는 것임을 입증했다.

윌리엄 하비가 유일하게 증명하지 못한 것은 동맥과 정맥의 연결, 즉 모세혈관의 존재였다. 하비는 적절한 현미경이 없었기 때문에 모세혈관을 볼 수 없었다. 하비는 처음으로 각 심실의 용량을 측정하고 체내 혈액의 총량을 추정하는 등 생체의 정량화를 시도했다(심혈관계). 오랫동안 신성불가침으로 생각되던 확신을 뒤집어엎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하비는 자신의 저술 덕택에 유명해졌다.

윌리엄 하비는 논쟁에 말려드는 것을 꺼려 1649년 프랑스의 해부학자 장 리올랑의 비판에 답하는 소책자를 출간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1642년 내전이 일어났을 때 윌리엄 하비는 왕과 함께 있었으며, 얼마 뒤 왕이 옥스퍼드대학교에 사령부를 마련했을 때도 함께 있었고 그곳에서 1645년 머턴 칼리지의 학장을 맡았다. 그곳에서 하비는 달걀에서 병아리가 생겨 나오는 것에 대해 연구했다. 패전한 왕이 스코틀랜드에 몸을 의탁했을 때 그도 잠시 왕과 함께 뉴캐슬에 머물렀다.

그러나 왕이 의회군에게 넘겨져 와이트 섬에 유폐되었을 때 왕과 떨어지게 되었다. 윌리엄 하비는 정치에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지만 왕을 개인적으로 깊이 존경했기 때문에 1649년 왕이 처형당하자 슬퍼했다. 그후 2년 뒤에 2번째 대작을 출간했다. 생애 최대의 성취인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연구〉를 출간한 뒤에는 동물의 생식이라는 어려운 주제의 연구에 계속 전력했다. 그결과 1651년 〈동물의 발생 Exercitationes de Generatione Animalium〉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역사적·과학적으로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들어 있지만 윌리엄 하비의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 책은 주로 달걀에서 병아리가 생기는 것을 다루고 있지만 하비는 시종 모든 생명체의 발생은 알에 의한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하비는 난자의 수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고 전염병의 발생과 비슷한 전염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윌리엄 하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동조하여 후성설이라는 용어로 발생과정을 집약했는데 현재의 견해에 비추어 보면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등생물의 자연발생을 믿었는데 하비는 그러한 견해에 동조한 것 같지 않지만 그의 주장은 애매하여 아직도 그 입장이 확실하지 않다(자연발생설, 수정, 병리학).

윌리엄 하비는 의사로서의 능력과 타고난 절약정신, 그리고 형제들의 조언 덕택에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윌리엄 하비는 나이가 들면서 병약해졌고 그동안 수많은 반대와 불신에 부딪혀 과학적 진리를 세우려는 그의 열정도 어느 정도 마모되었다. 크롬웰이 통치하던 말년에는 찰스 1세와의 오랜 교분 때문에 하비는 정치적 죄인으로 취급받아 형제들의 집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비는 더이상 과학 연구를 하려 하지 않았으며, 환자도 거의 돌보지 않았고 의사협회의 일에도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하비는 말년에 통풍과 신장결석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어느날 아침 부분마비가 일어났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뇌혈전증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하비는 에식스 헴스테드에 있는 지하 가족 납골당에 묻혔다가 1883년 하비 예배당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