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파업

총파업

다른 표기 언어 general strike , 總罷業 동의어 총동맹파업, 總同盟罷業

요약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산업 전반에 걸쳐 노동자들이 계획적으로 조업을 중단하는 것(→ 노동).

총파업(general strike)
총파업(general strike)

한 산업체에서만 일어나는 파업은 엄밀히 말해서 총파업이라고 할 수 없다. 총파업은 영국에서 노동조합이 발전함에 따라 단체교섭 전략의 일부로서 이용되기 시작했다.

1820, 1830년대에 급진적인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의회를 개혁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업의 전면적 중단이라는 개념을 옹호했다(→ 생디칼리즘). 보통선거권을 비롯한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 확보운동을 벌이던 차티스트(Chartist)들은 1842년 랭커셔에서 일어난 파업을 총파업으로 확대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들은 이웃 지역까지 조업중단을 확산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정부의 무력행사 앞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차티스트 운동 (Chartism)
차티스트 운동 (Chartism)

차티스트 운동이 실패한 후 영국에서는 20세기초까지 총파업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총파업을 사회개혁 수단으로 보는 이론은 주로 프랑스에서 전개되었다. 이 문제는 1866년 국제노동자협회 제네바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1893, 1902년 벨기에에서 성년 남자의 보통선거권 문제를 놓고 큰 파업이 2차례 일어났다. 1902년 스웨덴에서도 그와 비슷한 문제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뒤이어 1909년에는 이윤감소를 이유로 고용주들이 택한 임금동결정책에 맞서 당시 최대규모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전체 노동자의 거의 절반이 참가한 이 파업은 1개월 동안 계속되다가 수습되었다.

영국에서는 노동운동가 톰 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온 후 총파업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1911년 맨은 혁명적 노동조합주의자 동맹을 결성했으며 1910, 1911, 1912년에 일어난 대부분의 대규모 파업에 관여했다. 1910~14년 산업별 노동조합주의로 인해 상당히 많은 파업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도로·철도·광산 노동조합은 임금 및 근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삼자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1926년 영국에서는 영국 역사상 최대규모로 꼽히는 총파업이 있었다. 파업은 석탄산업에서 시작되어 철도·도로운송·철강산업·건설업 및 인쇄업으로 확산되었으며, 노동조합회의(TUC)가 광부들을 지지했다. 총파업은 9일 만에 끝났으나, 광부들이 거의 6개월 동안 파업을 계속했기 때문에 결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협상에 의한 타결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단체협약의 불가침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원칙적으로는 총파업에 반대해왔다. 총파업은 이미 있는 협약을 전반적으로 파기할 수도 있고, 힘이 약한 노조는 고용주에게 보복당할 우려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역적인 총파업은 계속되었는데, 많은 참가노조들의 전국 임원들은 이에 반대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노동조합은 독립운동세력과 연대하여 식민지배 기간에 정치적인 저항의 수단으로 총파업에 의존했다. 이들 나라는 산업규모가 작아 노동조합활동이 제한되어왔으나, 조직화된 노동조합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총파업은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줄곧 사용되었다(→ 개발도상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