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존슨

벤 존슨

다른 표기 언어 Ben Jo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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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72. 6. 11, 런던
사망 1637. 8. 16,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영국의 극작가이자 비평가. 대표 작품으로 <볼포네>, <연금술사> 등이 있다. 제임스 1세 시대의 대표적 극작가로 생동감 넘치고, 특정한 성격이 두드러진 인물이 등장하는 ‘기질희극’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냈다. 순회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하였는데, 희극 <십인십색>으로 인기를 얻어 극작에 전념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낭만적 작풍과 대립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고전적 전통에 입각하여 비평하며 비평가로도 활동했다. 18, 19세기의 희곡에 인물의 극적 형성화의 자극을 주며 영향을 주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극작활동
  3. 궁정 가면극
  4. 전성기와 말년
  5. 존슨에 대한 평가

개요

벤 존슨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버금 가는 중요한 영국 극작가로 꼽힌다.

대표작으로는 〈십인십색 Every Man In his Humour〉(1598)·〈볼포네 Volpone〉(1606)·〈연금술사 The Alchemist〉(1610)·〈모두 기분이 언짢아 Every Man Out of his Humour〉(1599)·〈시저너스 Sejanus〉(1603)·〈동방으로 Eastward Hoe〉(1605)·〈에피코이네 Epicoene〉(1609)·〈바솔로뮤의 장날 Bartholomew Fair〉(1614) 등이 있다.

극작활동

벤 존슨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2개월 전에 죽었다. 의붓아버지는 벽돌공이라는 보잘것없는 신분이었으나 벤 존슨은 다행히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정규교육은 얼마 안 가 끝났고,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일을 돕다가 그뒤 네덜란드 원정군에 가담해 약간의 전공을 세웠다.

영국으로 돌아와 배우 겸 극작가가 되어 순회극단에서 배우생활을 하는 한편, 대중극장 흥행주 가운데 1인자인 필립 헨즐로에게 고용되어 희곡을 썼다. 이 초기작품들은 〈상황은 바뀌었다 The Case is Altered〉만 제외하고 모두 제목만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희극뿐만 아니라 비극도 쓴 것이 분명하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작품 가운데 비극은 〈시저너스〉·〈카틸리나 Catiline〉(1611) 단 2편뿐이다.

1598년 체임벌린 경의 극단에 의해 공연된 〈십인십색〉이 대성공을 거둠으로써(일설에 의하면 셰익스피어가 직접 이 극단에 작품을 추천했다고 함) 벤 존슨은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

이 극에서 로마 희극의 정신과 양식을 영국 대중극에 옮겨놓으려고 시도했다. 이 성공에 힘입어 훨씬 더 야심적인 작품인 〈모두 기분이 언짢아〉가 같은 극단에 의해 무대에 올려졌다.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대중극장 공연용으로 씌어진 희곡 가운데 가장 길이가 길며, 아리스토파네스의 그리스 희극에 필적할 만한 작품을 내놓으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엘리자베스 시대 문학). '도입부'나 '서막', 막간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논평에는 극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피력해놓았다.

그러나 이 극은 흥행에서 참패했고 벤 존슨은 자기 작품을 공연해줄 다른 극장을 찾아나서야 했다. 가장 확실한 장소는 연기진이 소년들로만 구성된 사설극장이었는데, 관람료가 비싸 소수의 특정한 관객층만 갖고 있던 이 극단들은 풍자성이 짙은 작품과 실험적 형식의 작품을 즐겨 공연했다(아동극단).

존슨은 이들을 위해 〈달[月]의 여신의 향연 Cynthia's Revels〉(1600경)과 〈사이비 시인 The Poetaster〉(1601)을 썼다. 그러나 이 작품들조차도 인간의 질서에 대한 열망과 인간의 행위에 대한 경멸을 동시에 드러내는 역설을 보여준다.

궁정 가면극

벤 존슨은 1603년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온 제임스 1세의 왕비 앞에서 〈앨소프의 잔치 Entertainment at Althorpe〉를 공연해 왕실의 관심을 끌게 된 듯하다.

1605년에는 〈어둠의 가면극 The Masque of Blackness〉이 궁정에서 공연되었다. '가면극'은 서로 낯모르는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1차적 목표인 반(半)극적 여흥이다. 제임스 1세 때 건축가인 이니고 존스가 궁정가면극을 위해 점점 더 화려한 의상과 무대장치를 개발해냄으로써 가면극의 기본적인 양식은 훨씬 정교해졌다(제임스 1세 시대 문학). 엘리자베스 시대의 가면극에서는 대사가 몇 마디뿐이었으나, 제임스 1세 때는 수백 행에 이르는 대사와 여러 곡의 배경음악으로 이루어진 '대본'으로 발전했다.

이로써 작가는 디자이너 못지 않게 중요한 존재가 되었으며 필요한 대사뿐만 아니라 여흥 전체의 저변에 흐르는 특별한 '우화적' 의미까지도 제공하는 역할을 맡기에 이르렀다. 제임스 1세 시대의 가면극에 독특한 형태와 양식을 부여한 사람은 이니고 존스와 공동저작한 벤 존슨이었다. 존슨은 1차적으로 '극적' 행위가 지니는 암시를 가면극에 도입함으로써 이 역할을 수행했다. 정교한 무대연출과 여흥이 차지하는 시간이 대본을 숙독하는 데 걸리는 정도보다 훨씬 비중이 커졌다. 따라서 시인은 단지 부수적인 존재로 취급되기 쉬웠으나, 갖가지 정보를 제공하고 회중 전체의 차림새를 지시하는 사람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벤 존슨이 궁정시인으로 불려다닌 점에 비추어볼 때 그의 초기 가면극은 성공을 거둔 듯하다. 존슨의 가면극에는 낯모르는 사람들을 끼어들게끔 유도하는 새로운 장치가 풍부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자 본 가면극에 앞서 벌어지는 안티마스크극(antimasque : 막간의 익살촌극)을 고안해냈다. 여기에는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차림의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춤추고 노래할 수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배우였다(가면극에서는 그것을 개최하는 집안의 식구들이 가면무도자의 역할을 맡았으며, 춤과 노래에 능한 이들로서는 굳이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음).

안티마스크극과 가면극 사이에는 구조적인 대비가 생기기 시작했고 안티마스크극의 배우들도 곧 대사를 말하게 되었다. 하나였던 안티마스크극이 여러 개로 늘어났지만 벤 존슨은 대체로 이 장치를 꼭 필요한 곳에만 사용하는 절제를 지켰다.

전성기와 말년

1606년 벤 존슨과 그의 아내는(그는 1594년에 결혼했음) 런던의 교회법정에 불려나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벤 존슨은 아내에게는 죄가 없으며 순전히 자신의 의견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 문제는 존슨이 학자들과 만나 그들의 권유를 진지하게 검토해보겠노라고 양보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존슨이 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한 것은 그로부터 6년이 걸렸다. 이 결정을 내리기 앞서 존슨은 한동안 아내와 떨어져, 후원자인 로버트 타운전드 경과 오비니 경 에즈미 스튜어트와 함께 은둔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벤 존슨은 대중극장계에서 셰익스피어에 다음 가는 눈부신 작품들을 남겼다. 〈볼포니〉·〈연금술사〉는 당대의 희곡 가운데 최고의 인기와 명성을 누렸다. 황금을 좇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그린 이 두 작품은 각각 이탈리아와 런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존슨이 전형적인 르네상스 무대와 유럽의 변경에 위치한 자신의 출신지 둘 다에 대해 열렬한 애정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두 작품은 설득력이 있고 짜임새 있으며 신랄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다.

벤 존슨은 1618~19년에 스코틀랜드까지 도보여행을 했다. 에든버러 시는 존슨이 방문하자 명예의원 겸 조합원으로 추대하는 한편, 특별연회를 베풀어 그를 대접했다. 잉글랜드로 돌아와서는 당대 최고의 명예를 상징하는 옥스퍼드대학교 명예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1623년에는 존슨의 개인서재가 불에 타 없어졌으며, 찰스 1세의 궁정연회에 거의 부름을 받지 못했고 말년에 쓴 희곡들마저 흥행에 실패했다.

1628년 뇌졸증을 일으켜 문밖 출입을 못하더니 급기야 병석에 눕고 말았는데, 같은 해에는 1627년에 사망한 토머스 미들턴의 뒤를 이어 런던 시의 행사기록자로 임명되었고, 이로써 형식상으로는 시장 취임식을 비롯한 런던 시의 각종 야외행사를 관장하게 되었다. 탁월한 극작가였던 미들턴은 런던의 자랑거리였으나 벤 존슨은 아무 하는 일 없이 월급만 축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높았다. 벤 존슨에 관한 다른 문제도 흔히 그랬듯이 1634년 그의 봉급이 연금으로 발표되면서 이 일도 일단락되었다.

벤 존슨은 글뿐만 아니라 입담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셰익스피어와 '재담 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며, 처음에는 머메이드태번에서, 다음에는 데블 태번에서 무적의 자리에 올랐다. '벤의 아들'로 불리는 것은 젊은이의 최고 영예였는데, 찰스 시대의 극작가 중 존슨의 '아들'로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리처드 브룸의 혈기넘치는 희극은 그가 스승에게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벤 존슨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육체 노동까지 제공한 '하인'이나 다름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존슨의 주위에는 양가 출신의 젊은이들도 많이 모여들었다. 존슨은 1637년 사망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는데, 그의 묘비에는 "오 걸출했던 인물 벤 존슨이여"(O rare Ben Jonson)라고 씌어 있다. 그런데 이 묘비명의 첫 두 단어는 라틴어의 한 단어(Orare)로 붙여 써야 하며 그럴 경우 전체 문장의 뜻은 '벤 존슨을 굽어 살피소서'가 된다는 설도 있다.

이듬해 벤 존슨을 기리는 추모시집 〈욘소누스 비르비우스 Jonsonus Virbius〉가 나왔다. 2절판으로 된 벤 존슨의 작품집은 1616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며, 죽은 뒤인 1640년에 나온 2번째 2절판집에는 〈숲 또는 발견 Timber : or, Discoveries〉이 실려 있다. 삶에 대한 관찰과 편지글로 이루어진 〈숲 또는 발견〉은 머리말 앞에는 〈실바 Sylva〉라는 제목이, 본문 앞에는 〈탐사 Explorata〉라는 제목이 각각 따로 붙어 있다.

여기서 벤 존슨은 시와 극의 본질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한편, 독서를 통해 많은 도움을 얻었음을 밝혔다. 이 책에서는 또 셰익스피어가 이따금 "잘난 체한다" 하면서도 "나는 그를 사랑했으며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그를 숭배한다"고 밝힘으로써 셰익스피어에게 마지막 찬사를 보냈다. 이 2절판에 처음 실린 또다른 산문 작품은 〈영문법 The English Grammar〉이다. 만약 존슨이 그레셤 칼리지에서 잠시 수사학교수로 재직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글과 〈숲 또는 발견〉은 강의를 염두에 두고 썼을 가능성이 높다.

존슨에 대한 평가

벤 존슨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와 제임스 1세 시대의 영국 극작가 가운데 제2인자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는 양면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12년 동안 로마 가톨릭교도였으면서,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영국 최초의 계관시인이었다.

대표적 희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강한 혐오감과 동시에 그 세계의 어리석음과 추악함을 드러내는 데 대한 희열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서정시인이면서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산문으로만 쓴 희곡 2편으로 최대의 성공을 거두었다. 화를 잘내고 고집 센 사람인데도 그의 밑에는 누구보다도 문하생이 많았다. 당대의 극작가 중 가장 학식이 높았던 그는 극적 구성, 언어, 인물묘사의 대가였다.

그의 희곡이 사상 처음으로 2절판으로 출판되었다는 사실과(2절판이라는 용어는 사실상 '작품모음집'을 뜻함), 그의 극이 왕정복고 시대에 이르러서도 계속 공연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하게 해준다. 그뒤에는 그의 작품들이 무시당했지만 〈연금술사〉는 18세기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20세기 중반에는 여러 편이 다시 빛을 보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볼포네〉·〈연금술사〉·〈바솔로뮤의 장날〉은 재공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존슨의 주요작품들은 아직까지도 무대에 올리기에 손색이 없다. 집요하게 고전이론을 작품 속에 실제로 적용시켰기 때문에 실감나는 대화, 생생한 인물묘사, 치밀하고 절제된 구성면에서 돋보인 그의 재능은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생동감 넘치는 수많은 인물을 등장시켰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개성을 일관성 있게 유지했다. 작품의 구성은 치밀해서 한 사건으로부터 또다른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은 일관성이 있으며, 관련된 인물 개개인의 성격이 그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의 희극은 때때로 대화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데 대화가 당대의 화술에 대한 관찰에 근거했을 경우에 특히 그렇다. 그러나 그의 희극에는 현실을 소재로 한 농담이 들어 있는 수준 높은 희극적 상황도 있다. 존슨은 또 등장인물의 성격을 지배하는 몇몇 측면을 부각시키는 기교가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것은 그의 고전적인 예술관이 낳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람들에 대한 빈틈 없는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존슨의 희곡에서는 한 인물을 지배하는 특성으로부터 자연히 유도되는 괴벽과 정상적인 면이 모두 들어 있다. 그결과 인물은 자신의 욕망을 쫓는 생생하고 사실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후기 희곡에서는 등장인물들이 하나의 심리적 특질에 지배되는 행동을 보여준다. 존슨의 희곡에서 줄거리는 원인과 결과의 끊임없는 연속이며, 인물의 성격이 큰 역할을 하고, 우연의 일치라는 장치에 의존하지 않고도 뜻밖의 사건으로 가득 찬 행위의 반전을 통해 일관성 있게 전개된다.

존슨은 바로 다음 세대의 극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제임스 1세 시대 말기와 찰스 1·2세 시대에는 그와 셰익스피어·보몬트·플레처가 모든 본보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왕정복고시대와 18, 19세기의 희곡에 인물의 극적 형상화라는 본질적인 자극을 준 사람은 존슨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