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식

제천의식

다른 표기 언어 祭天儀式

요약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

천제
천제

하늘에 대한 숭배는 많은 민족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하늘이 불접근성·무한성·영원성·창조성으로 신성(神聖)이 존재하는 곳 또는 신 자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천신에 대한 신앙은 보편적으로 존재했는데, 그 신이 우주를 창조했고 땅의 풍요를 보증했다고 믿었다. 천신은 세계창조를 끝마친 뒤 세상 일에서 떠나고, 고조선의 환인(桓因)처럼 아들이나 손자를 통해 인간들을 직접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광명신(光明神)·일신(日神)·월신(月神) 또는 바람·비·번개·천둥·운석(隕石)·무지개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베리아와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대개 천신을 주신(主神)으로 생각해 제천의식을 치렀다.

알타이족의 천신은 칸(Khan)이라고 불렀는데, 보편적 주권자로 이 신의 명령은 존중되었다. 그러나 이 신은 직접 통치하지 않고 지상에 신의 대리인 칸을 보내 통치했다고 한다.

고대 중국(天)은 천상에 있다고 상상한 최고의 신이다. 은(殷)나라의 갑골문에 보이는 '제'(帝)는 후에 천(天)으로 불린 신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갑골문의 제는 비를 내리고 한해(旱害)를 일으키는 등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또 이 제는 왕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쳐 왕이 외국을 정벌할 때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때에는 제에게 물어 승인을 얻어야 했다. 때로 제는 왕에게 재해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리하여 왕은 제의 의지에 따라 그 흥망이 결정되는 것으로 여겨져 후에 '천명사상'(天命思想)으로 이념화되었다. 황제는 지상 전체 인민의 의지인 천제의 명을 받아 천자로서 지상을 지배했으므로 천제(天祭)를 지내는 것은 그의 의무이자 특권이었다.

그 제사는 원구(圓丘)·남교(南郊)·명당(明堂) 등에서 치러졌다.

우리 민족의 천신신앙과 제천의식은 고조선부터 조선말까지 우리의 정신에 흐르는 중요한 물줄기이며, 민족문화를 구성하는 주춧돌 성격을 지녔다. 우리나라에서 천신은 고대부터 지고신(至高神)으로서의 위치를 가졌으며, 지금도 무슨 일이 있으면 하늘(또는 하느님)을 찾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의 정서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식은 고대에는 부족사회의 전통에 따라 전승되다가 점차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국가의례로서 자리잡았다. 그러나 국가의례로서의 제천의식도 각 시대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고조선의 단군신화는 천신이 내려와 인간을 다스리는 건국신화의 형태를 보이는데, 여기서 천신이 내려온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의 신시(神市)는 천신이 정사를 보는 도읍이자 천신에게 기도하고 제사를 드리는 제단으로 파악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는 영고(迎鼓)라 하여 은정월(殷正月:12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올렸으며 고구려의 제천의식은 10월에 올리며 동맹(東盟)이라 불렀고, 동예는 10월에 무천제(舞天祭)를 지냈다. 특히 부여는 군사(軍事)가 있을 때에도 제사를 지내 소의 발굽뼈로 점을 쳐서 길흉을 가렸다고 한다. 또 삼한에서는 천군이라는 전문 사제를 두어 제천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 제천의식은 나라 전체의 큰 행사로 음주가무(飮酒歌舞)가 곁들여지는 성대한 행사였는데, 일종의 추수감사제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 이러한 음주가무의 축제는 민족 공동체의 생활문화로서 오늘날까지 광범위하게 계승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하늘뿐만 아니라 일월성신(日月星辰)·풍운뇌우(風雲雷雨)·산천악해독(山川嶽海瀆)·조상선현(祖上先賢) 등에도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많은 신 가운데 천신을 제일 우위에 두는 유일지고(唯一至高)의 천신신앙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와 같이 고조선 건국신화의 환인·환웅(桓雄)·단군(檀君)의 성격이나, 부여에서 군사가 있을 때 제천하며 점을 친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천신이 인간사를 좌우하는 지고한 존재로 여겨졌던 것 같다.

또 환웅이 인간세상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올 때 바람신·비신 등을 데리고 왔다는 것으로 보아 천신은 농업신과 관계가 있으며, 고대 제천의식의 성격은 농제적(農祭的)인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격은 그후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가뭄이 들거나 흉년이 들 때 국가적으로 제천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고대의 제천의식은 국중대회(國中大會)로서 부족이나 국가 전체의 중요한 의식이었고, 사회 성원들에게 공동체의식을 심어주는 기능을 했다.

고구려에서는 동맹 외에도 3월 3일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잡은 동물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유리왕과 산상왕대에 교제(郊祭)에 쓸 희생인 돼지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고구려 초기에 희생을 바치는 제천의례를 정기적으로 거행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대단(大壇) 또는 남단(南壇)을 쌓고 왕이 천지(天地)와 오제신(五帝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신라에서는 〈삼국사기〉에 시조묘와 신궁(神宮) 및 산천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나타나지만 제천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에는 일신과 월신이 있었는데, 이 신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뒤 갑자기 일광·월광이 사라지고 천지가 어두워져 이를 되살리기 위해 제천의식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온 천신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그에 대한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보아 신라에도 제천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 가야에도 구체적으로 제천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시조인 수로왕 신화에 가야인들의 하늘숭배사상·노래·춤·주술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제천의식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우리나라 고대의 건국신화는 그 시조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다스렸다는 천신사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전의 전통사상과 의식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특히 전통적인 천신은 불교의 천신인 제석천(帝釋天)과 비슷하게 여겨져 이후 불교의식에서도 제석천 등의 천신에 관한 의식이 고려시대까지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고려의 제천의식은 중국의 한대를 거쳐 당·송대에 정비된 의례를 도입함으로써 매우 세련된 의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원구단(圓丘壇)에서의 제천행사가 성종 때부터 행해져 오제(五帝)와 호천상제(昊天上帝)에 대한 제사가 행해졌다. 고려시대의 국가적인 제사의 종류는 크게 원구단에서 제천하는 것, 사직에서 봄·가을로 제사하는 것, 태조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원구단에서 왕이 초봄에 천제를 드리는 것은 기곡제(祈穀祭)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예기〉에 의하면, 천자만이 제천의식을 행할 수 있고 제후는 경내(境內)의 산천에만 제사할 수 있었다. 고려가 천자의 예에 따라 제천을 행한 것은 고대 사회 이후의 고유한 제천전통과 중국에 대한 자주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단군숭배의식이 활발하게 일어나 황해도 구월산에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제사드렸다. 또 염주(鹽州:지금의 연백) 동쪽에 있는 전성(氈城)은 옛날에 제천하던 단(壇)으로 전해지며,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도 단군신앙과 연결되어 제천의례가 거행되었다.

특히 마니산의 참성단은 초제(醮祭)를 드림으로써 단군신앙과 도교신앙이 결합된 제단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리학이 정착된 조선 초기에는 〈예기〉의 규정에 따른 제천의식폐지론이 대두했다. 즉 조선이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표방하여 중화적 천하관을 받아들임에 따라 조선을 제후국(諸侯國)으로 자처하는 입장에서는 천자의 의례인 원구의 제천의례를 행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므로 원구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천의례가 우리의 역사적 전통으로 기곡(祈穀)·기우(祈雨) 등 백성의 삶과 직결된 의례임을 알고 우리의 자주권을 강조하여 원구제도와 의례를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에 태조 때부터 세종 때까지 원구제도와 제천의례의 폐지에 대한 찬반론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세종 때 〈오례의〉를 완성하면서 원구를 폐지하고 제천의례를 중단했으나, 세조는 의례의 제도와 절차에 대한 상세한 고증을 거쳐 다시 제천의례를 거행했다.

세조의 제천의례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뒤 자신의 왕위 정당성의 명분을 강화하기 위한 의례적 실천이라는 정치적인 의미를 많이 띠고 있다. 따라서 자세한 고증 뒤에 원구단의 제천의례를 성대하고 규모있게 회복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뒤 사림파의 정계진출과 함께 제천의례는 급격히 쇠퇴하여 실질적으로 소멸했다.

국가의례로서 제천의례가 다시 실시된 것은 1897년(고종 34)으로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광무개혁을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

그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의례로서 제천의례를 실시했다. 이때 제천의식을 행하기 위해 원구단을 서울 소공동 남별궁터에 쌓았는데, 1913년 총독부가 황궁우(皇穹宇)만 남겨두고 원구단을 헐어낸 뒤 철도 호텔(지금의 조선 호텔)을 지음으로써 제천의례가 중단되었다. 국가의례로서의 제천의식은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변화했으나, 민간에서는 계속 그 뿌리를 간직해왔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이를 되찾기 위한 종교적 염원으로서 환인·환웅·단군 등의 3신을 모시고 제천의식을 행하는 대종교(大倧敎)가 조직되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원초적인 신앙인 무속(巫俗)에서도 천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당들이 섬기는 신들을 보면, 천신·천왕신(天王神)·천신대감신(天神大監神)·제석신(帝釋神) 등은 천신계통의 신으로서 무신(巫神) 가운데 최고신이었다.

현재에는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 하여 국경일로 정하고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과 강원도 태백산의 천제단 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국가의 태평과 국민의 안정, 민족의 무궁함을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