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부여

다른 표기 언어 夫餘 동의어 북부여

요약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부여인들이 스스로 오랜 옛날 다른 곳에서 옮겨온 사람들의 후예라 했고, <위략>에는 부여가 북쪽에서 이주해온 시조 동명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한다. 3세기 무렵 부여는 서쪽으로 오환·선비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읍루와 닿았으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경계를 접했고, 서남쪽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닿아 있었다. 그 중심은 부여성이었으며, 지형상 대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무력에서 상대적 우위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 주변세력의 침략을 받기 쉬웠다. 부여인은 농업과 목축을 겸했으므로 농경민이면서 기마에도 능했다. 매년 12월에 영고라는 대축제를 거행했는데, 영고는 공동수렵의식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사회의 통합과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여는 494년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합병되었다.

목차

접기
  1. 강역
  2. 정치체제와 사회구성
  3. 산업과 풍속
  4. 역사

북부여라고도 한다. 부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puhu'와 연결시키는 견해도 있으나,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BC 1세기의 중국 문헌에 이미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BC 2세기 무렵에는 성립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부여인들이 스스로 오랜 옛날 다른 곳에서 옮겨온 사람들의 후예라 했고, 〈위략 魏略〉에는 부여가 북쪽에서 이주해온 시조 동명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한다. 이것으로 보아 부여의 중심집단은 만주 이외의 지역에서 이동해온 것으로 추측되나 그 시기나 경로는 분명하지 않다.

강역

3세기 무렵의 부여는 서쪽으로 오환·선비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읍루와 닿았으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경계를 접했고, 서남쪽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잇닿아 있었다. 그 중심은 부여성이었고 사방 2,000리에 달하는 평야지대를 영역으로 했다. 이 강역은 부여 건국 이래의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창춘[長春]·눙안[農安] 부근으로 보는 설, 금을 세운 완안부의 발흥지인 아청[阿城]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 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지린[吉林] 지역을 초기 중심지로 보고 눙안 근처를 후기 중심지로 보는 설 등이 있으나 유적·유물상으로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치체제와 사회구성

초기 정치체제는 일종의 부족연맹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왕은 족장회의에서 선임되는 형식을 거쳐 일정한 집단에서 배출되었으며 주술적 능력을 지닌 제사장의 역할을 겸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흉년이 들면 주술능력이 부족한 존재로 여겨져 교체되었으며, 심할 경우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왕의 제사장적 성격은 퇴색되고 정치적 지배자로서의 권한이 강화되어 3세기 전반에는 간위거(簡位居)-마여(麻余)-의려(衣慮)로 이어지는 왕위의 부자계승이 이루어졌다.

왕 밑에는 마가(馬加)·우가(牛加)·구가(狗加)·저가(猪加)·견사(犬使)·견사자(犬使者)·사자(使者) 등의 관인이 있었다. ''(加)는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지닌 족장층으로서 귀족회의의 구성원이 되어 국정에 참여했다. 부여의 대가는 수천 호를, 소가(小加)는 수백 호를 다스렸다.

'가'는 평시에는 자치적으로 자신의 부족을 다스리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왕의 기치 아래 모여 전쟁에 참가했다. 왕은 대·소가의 대표이자 그 자신도 대가의 하나였으므로 가의 개별적 세력기반에 대해서는 간여하지 못했다. 가가 지배하는 읍락은 호민(豪民)·일반민·노예로 구성되었다. 호민은 철제기구의 제작 등 읍락 안의 특수한 업무를 담당하는 기술자, 종교행사를 담당하는 샤먼, 부유한 민호 등이었다.

일반민들은 목축이나 농경에 종사했으며 각자의 집에 무기를 지니고 있다가 전쟁시에는 병사로 출전했다. 그 가운데 가난하여 스스로 무장할 수 없거나 노약한 자들은 전쟁 때 식량운반과 같은 일을 담당했다. 읍락을 지배하며 대인이라 불리기도 하던 족장층은 부를 독점해 외국에 나갈 때는 금은으로 장식한 모피갓을 쓰고 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어 호사로움을 과시했다.

노예는 족장층과 호민층의 소유로 농경·목축·일반노동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주인의 장례시에는 무덤에 순장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그 수가 10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노예는 전쟁·형벌·부채 등의 방법으로 공급되었다. 부여의 법은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예로 삼았으며 절도를 한 사람은 12배로 배상하게 했다는데, 이는 일반민의 노예화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음을 시사한다.

산업과 풍속

부여인은 농업과 목축을 겸했으므로 농경민이면서 기마에도 능했다. 말·소·돼지·개 등이 주요가축이었고 오곡을 생산했다.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특히 유명하여 중국에도 수출되었다. 훌륭한 말과 뛰어난 기마술은 부여로 하여금 여러 세기 동안 만주 일대의 패자가 되게 했고, 백제·고구려도 부여족의 일파에 의해 건국되었다.

부여인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매년 12월에는 영고라는 대축제를 거행했다. 영고에는 노예와 외래인을 제외한 모든 부여인이 참여해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고 즐김으로써 결속을 다졌다. 또한 이 기간에는 형벌을 결정하고 죄수를 석방했으며, 수도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부여의 모든 대소 족장이 모여 하늘에 제사지내고 국가의 주요문제를 토의하고 처리했다. 영고는 12월에 시작하는 공동수렵의식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사회의 통합과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혼인을 할 때는 혼납금으로서 남자집에서 여자집으로 소와 말을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면 모두 죽였으며, 특히 부인의 질투를 나쁘게 여겨 죽인 뒤 시체를 산 위에 버려 썩게 했다. 만약 죽음을 당한 여인의 친정에서 딸의 썩은 시체를 거두어가려면 남자집에 소와 말을 보내야 했는데, 이것은 혼인 때의 혼납금을 반환하는 것과 같았다. 고구려에서와 같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고 보살폈다(兄死妻嫂). 해마다 5월에 장례를 지냈으며 여름에 죽은 자의 시체는 얼음을 써서 부패를 방지했다가 장례를 지냈다.

역사

부여
부여

부여는 지형상 대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무력에서 상대적 우위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 주변세력의 침략을 받기 쉬웠다. 이러한 지리적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무력 보유에 힘쓰는 한편, 서남쪽의 중국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유목민 세력을 견제했다. 건국 초기에는 동쪽의 읍루를 복속시켜 공납을 징수했다. 그러나 BC 2세기 무렵부터 고구려족이 압록강 중류지대를 근거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만주 일대에서 부여의 패권은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부여는 남쪽의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세력과의 관계를 보다 강화했다.

위구대(慰仇臺)는 120, 136년 각각 왕자와 왕의 자격으로 후한(後漢)의 수도를 방문하는 한편, 요동을 지배하던 공손씨의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244~245년에 걸친 위(魏)와 고구려의 전쟁 때는 부여 측에서 유주자사(幽州刺使) 관구검이 이끄는 위군에게 식량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220년대초 과중한 공납을 거부한 읍루의 평정에 실패하는 등 부여의 세력은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더욱이 3세기 중반 이후 북중국이 혼란에 빠지면서 중국세력과의 연계가 여의치 않게 되고, 부여에 대한 고구려와 선비족의 압력이 가중되자 그 쇠퇴는 보다 가속화되었다. 285년에는 선비족 모용씨의 침입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국왕 의려는 자살하는 한편, 주민 1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중심지를 일시 북옥저 방면으로 옮기기도 했다. 진(晋)의 도움으로 나라를 되찾은 뒤에도 모용씨의 침입을 거듭 받았다. 346년에는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침입을 받고 국왕 현(賢)과 5만여 명의 주민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로 인해 더이상 나라를 유지할 여력이 없어지자 고구려에 복속하여 그 군대의 보호 아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5세기말 동부 만주의 삼림지대를 근거로 흥기한 물길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부여의 지배를 꾀하자 왕실을 고구려 내지로 옮겼고 494년(고구려 문자왕 3)에는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합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