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자유주의

다른 표기 언어 liberalism , 自由主義

요약 집단에 의한 통제보다는 개인의 자발성을 우선시하며, 국가와 사회제도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개성을 꽃피우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철학사조.

자유를 희구하여 억압에 항거하고 권력에 저항한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는데, 정치적 자유의 관념은 고대 그리스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보편적 가치로 인식하고 그것에 기초한 사회제도를 적극적으로 구상하는 자유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국가와 사회의 지도원리로 자리잡게 된 것은 근대 유럽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현상이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은 고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자기 완성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인간관, 원리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모순되지 않는 정치제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정치관, 개인의 자발성 보장이야말로 사회발전의 조건이라는 사회관 등 자유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이러한 관념들은 모두 근대사회의 구성원리를 형성했다.

종교개혁 이후 '신교의 자유' 주장, 원죄설의 부정 및 인간의 완성 가능성과 진보의 관념을 강조한 계몽사상, 기본적 인권과 사회계약의 관념, 영국 입헌주의의 역사적 전통, 고전경제학과 자유방임 정책론 등 근대혁명을 이끈 사상과 관념들도 자유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역사적 전개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였지만 자유주의가 의미하는 실질적인 내용은 이미 17~18세기의 부르주아 혁명 이념 속에 내포되어 있었다(부르주아지). 영국은 명예혁명으로 스튜어트 왕조의 절대주의를 청산하고 법에 의한 지배의 전통 위에 의회정치를 정착시킴으로써 근대적인 입헌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당시 유럽 대륙의 제국가들이 전제주의의 통치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영국에서 형성된 입헌국가는 자유주의적 이념들을 조기에 실현한 것이었다. J.로크의 정치이론과 A.스미스의 경제학설이 종종 고전적인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영국에서 처음으로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가 성립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독립선언과 뒤이은 프랑스의 인권선언은 근대 정치원리의 기본이념으로서 인간의 자유를 보다 보편적인 용어로 표현하여 자유의 기초를 확립시켰고, 자유주의에 있어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동시에 프랑스 혁명의 정치과정은 폭력적 수단을 수반하는 급진적인 사회제도의 변혁에 반대하고, 의회제도의 틀 속에서 온건한 개혁을 지향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의 의미를 확인시켜주었다.

본래 자유주의는 유럽에서 근대 혁명의 보편적 원리를 주창하는 부르주아가 토지귀족세력의 정치적 지배를 타파하고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19세기 전반에 성립시킨 정치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자유주의는 양면성, 즉 한편으로는 봉건제와 절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자유·평등의 인간상과 합리주의를 계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산과 교양을 지표로 하여 빈곤한 계급을 정치과정에서 제외시키고 자산가 계급에 봉사한다는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었다(정치제도). 또한 자유주의가 비록 국가권력의 개입을 배제하는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민족국가의 자립 없이는 자유주의가 정치원리로 확립될 수 없기 때문에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도 양의성(兩義性)을 피할 수 없었다.

보통 19세기를 자유주의의 시대라고 하지만 자유주의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은 각국이 처한 역사적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전개되었으며, 민주주의·사회주의·민족주의 등 다른 사회사상과의 관계도 역사의 단계에 따라 변해왔다.

18세기의 휘그주의를 기원으로 하는 영국의 자유주의는 J.벤담의 공리주의와 D.리카도의 경제학을 계승한 이른바 철학적 급진주의 운동을 수용함으로써 산업혁명이 초래한 새로운 사회 상황에 적응하는 데 성공했다(영국 자유당). 1832년 선거법 개정을 시작으로 곡물법 철폐(1846), 제2차 선거법 개정(1862)에 이르는 과정은 정치과정을 토지귀족세력의 독점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본과 노동의 자유를 실현시키려는 부르주아 정치과정을 점진적으로 의회주의 구조에 도입하면서 영국을 전형적인 자유주의 국가로 성립시켰다.

일정 시기까지 자유당이 노동자를 대표했다는 사실과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당이 노동당에 그 정치적인 역할을 양도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의 경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대립이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만큼 첨예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당파를 초월한 정치적 전통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이와는 달리 프랑스 혁명을 유산으로 짊어진 프랑스 자유주의는 한편에서는 가톨릭의 교권지배와 부르봉 왕조의 정통주의와 싸워야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코뱅주의와 혁명적인 민중운동으로부터 자유주의를 끊임없이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뱅자맹 콩스탕 드 르베크(1767~1830)가 토지소유를 정치적 권리의 불가결한 조건으로 생각했고, F.기조가 일정한 재산을 소유한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을 끝까지 고집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프랑스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 민주화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자국의 혁명적 전통에 대한 양면적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나폴레옹 3세가 인민투표를 실시하여 독재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야 1848년의 사회적 위기가 수습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프랑스 자유주의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프랑스의 경우 한편에는 혁명과 급진적 민주주의의 전통이 뿌리 깊이 남아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나폴레옹 이후 관료적 지배가 강력하게 독자적인 정치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 자유주의는 A. 토크빌 이후 비판과 억제라는 이중적 기능을 담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주의가 궁극적으로는 체제의 개혁원리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정치적 통일 자체가 당면 과제였던 19세기의 독일이탈리아에서 자유주의가 정착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물론 M.베버와 B.크로체와 같은 이론가들이 자유주의의 역사적 기초에 관해 깊이 있는 연구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자유주의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정치의 지도원리로 구체적으로 적용된 경우는 드물었다. 비르트 체제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은 오히려 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파시즘 운동을 야기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러시아 혁명이 던진 충격과 파시즘의 도전에 직면한 20세기의 유럽은 자유주의에 대한 최대 시련의 장이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소생에 공헌한 것은 건국 이래 체제의 원리로 작용하고 있던 미국의 자유주의였다.

미국 사회는 어느 정도 평등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모순이 유럽과 같은 양상으로 표출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를 조기에 실현한 미국 사회가 뉴딜 정책을 통해 자유방임경제의 방향전환을 완수한 것은 전체주의의 도전에 대한 자유주의의 가장 효과적인 처방을 의미했다(자유방임주의). 오늘날 자유주의가 대부분의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체제의 원리로 정착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현대의 자유주의는 보통선거제와 대중정당제를 당연시하고 있지만, 사회주의적 정책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 자유주의가 19세기의 부르주아적 제약에서 벗어나 대중사회에 적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자유주의의 출발점인 개인의 자발성과 개성의 존중에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의 정치 신조는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는 액턴 경의 말과 같이 권력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특징으로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개인으로서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낙관주의가 엄연히 존재한다. 오늘날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체제에서도 중앙집권화 현상이 진행되고, 사회조직이 고도화되면서 대중의 수동성과 획일화가 확대되고 있어 자유주의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재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