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네오

이레네오

다른 표기 언어 Saint Irenaeus
요약 테이블
출생 120/140경, 소아시아
사망 200/203경
국적 프랑스

요약 축일은 서방교회 6월 28일, 동방교회 8월 23일. 루그두눔(리옹)의 주교이며 2세기의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자.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경력
  3. 저서 및 영지주의자들과의 투쟁

개요

180년경 〈이단들을 반박함 Adversus haereses〉을 써서 영지주의(靈知主義)를 반박했다.

저작 활동을 통해 성서의 정경(正經)·신조·주교직의 권위를 한 단계 더 높게 끌어올렸다.

초기경력

정확한 출생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이레네오의 저서들에는 어릴 때 폴리카르포스(스미르나에서 사도들과 마지막으로 연관을 가졌던 인물로 알려진 그리스도교도)가 155년 노년에 순교를 당하기 전에 그를 보고 그의 말을 들었다는 등의 자서전적인 내용들이 어느 정도 있다.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오도 이레네오가 177년 갈리아에 대한 박해가 끝난 뒤 순교자 포티누스를 계승하여 루그두눔의 주교가 되었다고 전한다.

4세기에 교회사를 쓴 에우세비오에 따르면, 이레네오는 주교가 되기 전에 갈리아 남부지방의 선교사로, 또한 이단설로 불화를 겪었던 소아시아 교회들의 중재자로 일했다고 한다.

이제까지 알려진 전기 자료들과 출판된 그의 책들을 한데 모아놓을 경우 이 비범한 인물의 생애를 묘사하기에 충분하다. 사료들을 보면 2세기에 소아시아와 프랑스 남부(론 계곡) 간에 밀접한 문화적 유대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승에 따르면 '주(예수)를 본' 아주 연로한 인물인 사도 요한이 폴리카르포스가 젊을 당시 에페소스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나자렛 예수와 프랑스 남부의 이레네오 사이에는 3세대의 차이가 있었다. 이레네오가 살던 때는 교회가 밖으로 팽창하면서 안으로 긴장을 겪던 시기였다. 그는 서로 분쟁하던 분파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소아시아 교회들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기념하던 날(니산월 14일)에 부활절을 지킨 반면, 로마 교회는 부활절을 언제나 일요일(그리스도가 부활한 날)에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교회의 중간에서 중재 역할을 맡은 이레네오는 축일 날짜 같은 외부 요인들은 교회의 단일성을 파괴할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저서 및 영지주의자들과의 투쟁

그러나 이레네오는 로마에서 분파 운동을 이끈 마르키온과 급속히 팽창하던 교회 안에서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한 당시의 지적 운동인 영지주의에 대해서 철저히 부정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영지주의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이레네오를 비롯한 초기 교부들의 노력을 통해 극복되었기 때문에 영지주의 저서들은 대부분 소멸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학자들은 영지주의 교리들을 재구성하려고 할 때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의 견해를 정리한 이레네오의 저서들에 크게 의존한다.

1940년대에 이집트 나즈함마디 근처에서 영지주의 도서관이 발견된 뒤 이레네오는 더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자신이 배척한 교리들을 매우 정확히 기록했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그의 모든 저서들을 보면 그가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에 전념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작 〈이단들을 반박함〉은 모두 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180년경 그리스어로 씌어진 이 저서는 오늘날에는 라틴어 번역본만 알려져 있는데, 이 번역본이 나온 시기(200/400?)는 쟁점으로 남아 있다. 이보다 부피가 작은 책 〈사도들의 설교에 대한 논증 Demonstration of the Apostolic Preaching〉도 원래는 그리스어로 썼으나 오늘날에는 아르메니아어 번역본으로만 현존하는데, 젊은 세례예비자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의도로 쓴 듯 하다.

이레네오는 영지주의자들이 유대인들의 성서(〈구약성서〉)의 유효성을 부정한 것에 맞서서 그것이 정의로운 창조주 하느님의 율법을 떠받치고 있다고 주장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그 유효성을 옹호했다.

그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구체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길을 닦아놓았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일치와 차이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졌을 때 그는 이 두 성서의 유효성을 변호했다. 2세기에는 많은 책들이 성서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었고, 이 가운데는 영지주의자들이 쓴 책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레네오는 영지주의자들을 비판함으로써 그들이 쓴 책들의 중요성을 축소시키고 성서의 정경을 확립하는 데 이바지했다. 사도신경과 주교직의 발전도 영지주의자들과 벌인 그의 투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신조). 만일 사도신경이 인간구원과 관련된 〈신약성서〉에만 근거했다면 그것은 세상과 인간 창조에 관한 조항으로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약성서〉에 계시된 하느님이 창조주라는 점을 부정했기 때문에, 사도신경의 첫번째 조항을 〈창세기〉("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와 직접 연결시켰다. 이레네오는 이 신경을 사도단과 투쟁하는 데 사용하는 '진리의 규범'(Rule of Truth)이라고 했다.

가장 오래된 주교들의 목록도 예수에게 직접 받은 비밀 구전전승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영지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이레네오는 여러 도시들의 주교들이 사도시대에 이미 있었고, 이들 가운데 영지주의자는 하나도 없었으며, 주교들만이 성서 해석에 안전한 지침을 준다고 주장했다. 후대에 생긴 주교들의 '사도직 계승권' 교리는 이러한 주교들의 목록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사도권 계승). 모호한 문맥이긴 하나, 이레네오는 로마 주교가 가장 권위 있는 지위를 지닌다고 강조했다(교황의 수위권).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전설 이상의 자료가 없지만, 일반적으로 그 시기를 190년대로 잡는다.